p21
연우의 죽음 그리고 무너져 버린 아내. 지난 기억들이 아련하게 느껴지면서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어디선가 불어온 미세한 바람이 내 뺨을 스쳤고, 바닥에 마찰하면서 삑삑대는 운동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p27
쥐의 몇 배나 되는 크기와 무게의 뇌를 가진 인간들은 외부 자극에 따라 위험 상황에서 불안을 느껴 회피하느냐, 두려움 없이 무모한 도전을 하느냐 등으로 나뉜다. 여기에는 주로 뇌의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이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간은 성장하면서 많은 경험을 통해 각자의 성향이 어느 정도 정해진다. 무모한 도전을 일삼는 사람은 안정적이고 변화가 없는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도전을 두려워하는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p36
지현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엄마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게 싫었다. 이제 내 인생 정도는 스스로 헤쳐 나갈 자신이 있는데, 엄마는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아이 보듯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현은 일부러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 학교에서 더 어른처럼 행동한다. 엄마를 걱정시킬 일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면 답답했다. 엄마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일거수일투족을 꼬치꼬치 묻는 엄마가 불편했다.
p82
그 악마는 나에게 최고의 즐거움을 알려 줬다. 그래서 나는 지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은색의 문 앞에서 두 발을 딛고 서 있다. 넘치는 기대감에 몸을 떨며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저 은색 문을 열면 쾌락의 천국이 내 눈앞에 환하게 펼쳐질 것이다. 점점, 환희의 냄새가 난다. 피부 속으로 희열이 차오른다. 매번 이 살인의 쾌락을 맛보기 직전에 내 안의 악마가 오감을 자극하며 부추긴다.
p140
그날 불이 나자 집 밖으로 빨리 도망치라고 나에게 소리치시던 부모님이 내려앉은 집 천장 기둥에 깔리는 장면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 역시 유독 가스로 질식사했고, 귀신이 되어 혼자 울부짖으며 타다 남은 불씨가 이곳저곳에 있는 집 안을 마구 날뛰어 다녔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나를 집어삼키는 끔찍한 기억이 악몽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p255
장마가 시작되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녀석들에게 새 우산도 빼앗기고 눈두덩이와 입술이 퉁퉁 부어 쓸쓸하게 집으로 가면서 김팔봉 씨는 ‘난 왜 이렇게 몸집이 작고 힘이 하나도 없게 태어났을까? 내가 지금보다 키도 좀 더 크고 힘도 셌다면 그 못된 녀석들을 시원하게 패 줬을 텐데.’ 하는 자조 섞인 안타까움과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빠지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