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와 노래에 반복되어 온 봄날
어느 순간 인생의 찬란한 봄날 같은데 시간은 가고, 해는 반복되고, 봄은 또 왔다가 가고, 그렇게 나이가 들어 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시인들이 꼽은 아름다운 노랫말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로 유명한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가 있고, 자우림의 ‘봄날은 간다’ 역시 봄날에 대해 처연하고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이 봄을 노래했다. 봄이 뭐길래, 그렇게 애틋하고 절절하게 봄을 노래하는 것일까?
그림책 《누가 사자의 방에 들어왔지?》와 《내가 여기에 있어》를 발표하자마자 볼로냐 라가치 상을 수상한 작가 아드리앵 파를랑주가 2023년에 발표한 새 그림책 《봄은 또 오고》는 한 사람의 인생 속 여러 봄을 중첩시키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표현해낸 작품이다. 이 작가는 2017년 국내에 출간된 《리본》으로 보드북의 물성과 책에 쓰이는 가름끈 한 줄을 활용하여 매우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봄은 또 오고》도 보드북의 특성을 잘 활용하여 잘려 나간 부분과 구멍 난 부분을 통해 추억과 삶의 흔적을 환기시킨다. 책의 일부를 잘라 내고 구멍 낸 것이 텍스트 너머까지 이야기를 확장시켜 주는 독특한 그림책이다.
파라텍스트도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는 그림책
이 책은 70쪽으로 꽤 두툼한 두께를 자랑하며, 내지가 보드북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매우 심플하다. 표지에 제목치고는 매우 작은 글자로 ‘봄은 또 오고’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더 작게 작가 이름이 들어가 있고 나머지는 라인으로 그린 아기 그림이 다다. 본문도 표지처럼 깔끔하고 심플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왼쪽 페이지에만 그림이 있고 오른쪽 페이지는 흰 바탕에 텍스트만 있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색을 상당히 아껴 썼다. 왼쪽 페이지에는 솔리드한 바탕색이 있고 두 가지 색의 라인으로 그림을 그렸다. 바탕색은 노랑색, 보라색, 초록색, 주황색 계통으로 변주했고, 그림 라인은 보라색과 초록색만 사용했다. 매우 심플한 선과 색으로 표현했지만 다양한 타공(구멍)과 잘린 부분 등을 통해 잔잔하면서도 풍성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판형, 제본, 표지, 날개, 띠지 등 본문 텍스트 외의 요소를 파라텍스트라고 하는데, 이 책은 본문 텍스트와 더불어 파라텍스트가 건네는 이야기에도 시선을 맞추게 한다. 잘려진 부분과 타공된 구멍 너머로 보이는 그림들 덕분에 작가가 그 속에 숨겨 둔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봄날의 중첩으로 그려 낸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
첫 번째 페이지에는 표지에서 봤던 아기가 나온다. 두 살배기 아이가 담요를 덮고 새근새근 자고 있다. “두 살 때까지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는 텍스트를 읽으면 이 책은 이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겠구나 추측할 수 있다. 다음 장을 열면 세 살이 된 아기가 엄마 손을 잡고 바다에서 걸음마를 한다. “파도 거품 속 가지런히 놓인 나의 두 발, 내가 간직한 첫 기억이야.” 누구에게나 인생 첫 기억이 있을 것이다. 서너 살 무렵의 첫 기억은 희미한 듯하지만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다음 장에는 네 살 때 아빠가 도랑가에서 맛보게 해 준 첫 번째 산딸기의 기억이 나온다. “혀끝에 남은 산딸기의 기억은 그 뒤로도 내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이 페이지에 있는 산딸기는 페이지 일부를 잘라내서 맨 마지막 페이지까지 보인다.
주인공은 조금씩 성장한다. 할아버지 어깨에 목마를 타고 올라가 호두나무 가지에 멋진 장식을 달기도 하고, 꿈틀거리는 뱀을 보고 무서워하며 도망을 치기도 하고, 마음 맞는 친구와 신나게 놀기도 한다. 특별하지 않지만 한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이사를 하고, 사춘기를 맞고, 좋아하는 상대가 생기고, 그 아이와 사귀었다 헤어지는 어린 시절을 거쳐 어른으로 자라나 일을 하고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는 일생이 잔잔하면서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주인공의 봄날이 있다. 두 번째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일어나는 모든 일은 봄날의 기억들이다.
구멍 저 너머의 그림이 건네는 또 다른 이야기
이 책에는 처음 두 페이지를 제외하고 모든 페이지에 잘린 부분과 타공된 구멍이 두어 개씩 있다. 이 구멍과 잘린 부분은 뭔가 의아하겠지만 책을 보고 또 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어느 부분에 구멍이 있는지, 왜 잘려서 이전 페이지의 그림이 계속 보이는지……. 뱀을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은 누구에게나 강하게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뱀은 꽤 오랫동안 페이지를 넘겨도 구멍을 통해 계속 보인다. 서른여섯의 봄날, 아이와 함께 뱀을 만난 주인공은 비로소 뱀의 기억을 보내 준다. 이제는 뱀이 무섭지 않으니까. 그래서 다음 페이지부터는 뱀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이 작가 아드리앵 파를랑주는 매우 섬세한 감각으로 페이지마다 구멍과 구멍 속 그림으로 한 사람의 기억과 트라우마, 추억을 연결시키고 적절한 시점에 그 맺힘을 풀어내고 기억을 내보내 주고 있다. 영민한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책을 여러 번 읽게 만들고, 그로써 작가의 설계도에 내밀하게 다가가게 만든다. 그러면서 독자 스스로 자신의 지난 과거와 추억, 트라우마를 돌아보게 한다. 누구에게나 친구 얼굴, 산딸기, 뱀과 같이 쉽게 잊히지 않는 과거들이 스냅 사진처럼 남아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여러 번 읽으면서 발견하는, 작가가 숨겨 둔 이야기
독자들은 필히 이 그림책을 여러 번 읽게 된다. 그때 텍스트를 읽다가 무엇인가 눈치챌 수도 있다. 이 책은 마지막 장을 제외한 모든 페이지의 텍스트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 장만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인생 모든 순간마다 현재의 순간을 캡처해 내는 작가의 의도가 농후해 보인다. 사실 맨 끝에 할아버지가 된 입장에서는 그보다 앞선 모든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서술해야 맞지만 생의 마지막이라 여겨지는 봄날에 딱 한 번 과거를 회상하는 데 방점을 찍기 위해 앞선 이야기가 모두 현재여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곳곳에 정확하고 은밀한 의도를 숨겨 두었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 번 읽을수록 독서의 즐거움 역시 중첩되어 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