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
언론은 이런 갈등 지향적 정치 구도에 아주 요긴한 도구다. 그러다 보니 언론이 정치 갈등의 전위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언론인들 사이에 전반적인 윤리 의식은 높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이 정파성 문제로만 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많이 후퇴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p.6
정말 무서운 것은 돈 문제와 달리 정파성 문제에서는 무엇이 정상인지 분별하기조차 쉽지 않다는 점이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오히려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는 일도 다반사다. 자기 나름의 정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p.7
제목을 ‘불편한 언론’으로 정한 것은 언론은 원래 ‘내 편’이나 ‘네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좀 불편한 소리를 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편을 들어주는 언론은 어느 쪽이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정파적인 언론의 길을 선택하면 적어도 한 진영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생존 문제도 쉽게 해결된다. 정파적이지 않은 언론은 어느 쪽의 환영도 받지 못한다. 모두에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손쉽게 어느 편을 선택하지 않는 언론과 언론인도 불편하고, 독자들도 자기편의 잘못을 지적하는 언론을 보면 일단 불편하다. 이제는 우리 모두 그런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p.15
그럼, 한국 언론은 실제로 정치적으로 독립적이거나 중립적인가?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 언론 중에서 제대로 정치적 독립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곳은 한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p.18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에서 언론인은 구체적인 정치 과정에도 참여하고 사회 운동도 한다. 언론인이 관찰자, 감시자가 아니라 직접 선수로 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언론학자 강명구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 게임을 하면서 중계까지 하는 형국”인 셈이다.
p.21
지금 한국에서 나타나는 정파성은 이런 ‘의견의 다양성’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에 기반한 ‘일관된 입장과 태도’가 아니라 오로지 진영적 이해관계에 따른 공방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조건을 걸고 ‘정파성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자칫 한국 언론을 병들게 하는 심각한 문제를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p.23
한국 언론의 정파성 때문에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공적인 논의의 전제가 되는 사실 확인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어느 한 언론만 봐서는 도대체 객관적인 사실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p.27
도대체 한국에서 지금 언론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얼마나 정파적 언론관이 사회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지, 특정 진영의 유불리를 떠나 생각해볼 때가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한다는 확신에 빠져 특정 정파의 행동대 역할을 하는 언론인과 소비자, 언론 관련 단체들은 도대체 언론은 본질적으로 무엇이어야 하는지, 자신들 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너무나 간명하게 자신과 상대방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p.49
정치권은 언론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잘못을 들춰내면 그 문제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공격’이라고 반발부터 한다. 이런 태도는 그대로 그 정권 지지자들에게 전이된다. 특정 진영 전체가 불편한 언론을 공격하고 무릎 꿇도록 압박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언론도 정치권과 소비자들의 공격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남는 것은 특정 정치권과 호흡을 맞추는 정치병행성이나 정치적 후견주의뿐이다.
p.50
정치권이 끊임없이 ‘언론개혁’을 내세우며 불만을 제기하는 이유는 언론의 이런 권력 감시와 비판이라는 기본 속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p.52
정치화가 문제인 것이 어디 언론인뿐일까? 결국 관건은 뉴스 소비자들이다. 뉴스 소비자들이 누군가가 던져주는 프레임에 쉽게 빠지면, 이런 흑역사의 반복을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다.
p. 69
특히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방송산업과 통신산업의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이처럼 방송통신 정책과 감독을 담당하는 중앙행정기관을 파행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방송통신업계는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의 해외 사업자들의 시장 잠식은 물론 새로 등장하는 AI 등의 쟁점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적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시기에 정책과 규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방통위에도 높은 식견을 갖춘 전문가가 필요하다.
p.71
방송의 내용을 국가 공권력이 직접 심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민간 독립기구’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지만 실상은 여야 대립이 그대로 투영되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방통심의위의 심의가 정치적이라는 불만은 끊이지 않는다.
p.88
독립성을 지킨다는 것은 언론 활동이 특정한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이 아니라 ‘일반적인 공익’을 위한 행위여야 한다는 의미다.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저널리즘 교과서인 로젠스틸과 코바치의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도 언론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p.89
이런 독립성의 뿌리는 그 책의 두 번째 원칙에 있다. “저널리즘이 가장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시민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은 특정 언론의 취재원이나 특정 독자나 소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회의 구성원인 일반적인 시민이다. 소속된 집단이나 진영을 따지지 않는, 그냥 일반적인 시민이다.
p.91
언론은 ‘선수’가 아니라 관찰자이거나 감시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주권자인 국민이 중요 사안들을 제대로 파악해서 필요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보를 공급할 수 있다.
p.138
언론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에 비해 국내 언론은 상호 매체 비평을 잘 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언론의 상호 비판은 일종의 ‘동료 비판(peer review)’으로 서로 잘못을 감시함으로써 좋은 보도를 위한 자극이 된다. 하지만 저널리즘 비평이 정치적 성향이 다른 매체에 대한 공격 수단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p.151
지지자들은 한쪽에는 한없는 이해와 관용을 베풀면서 반대쪽에는 악마화는 물론 음모론까지 덧씌우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보도를 반복적으로 접하면 사회 전반에 대한 매우 비현실적인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언론이나 유튜버 채널이나, 독자나 시청자를 상대로 프로파간다, 혹은 일종의 심리전을 펼치는 셈이다.
p.176
정보를 조작해 사람을 속이는 심리전은 너무나 오래된 전쟁의 기술이다. 이 기술은 어디까지나 적국을 향해서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전체주의는 폭력을 휘두르고 민주주의는 선전을 휘두른다”는 노엄 촘스키의 말처럼 현대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거짓 선전에 휘둘리는 일이 잦다.
p.177
해마다 발표되는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디지털 뉴스 리포트”의 일부인 언론 신뢰도 조사 결과는 국내에서 매우 많이 인용된다. 주로 한국 언론 신뢰도가 올해는 몇 년째 세계 꼴찌라는 식의 기사들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 이렇게 심각하다는 뉴스를 남 얘기하듯 앞다퉈 속보로 전하며 조회 수를 올리는 것도 한국 언론이라는 사실이다.
p.180
저널리즘의 독립성을 중요하다고 보는 태도와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의 상관관계를 보면 완전 정비례 관계는 아니지만 저널리즘의 독립성을 중요하게 볼수록 뉴스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p.182
실제 존재하는 사실이 아니라 반복해서 사실인 것처럼 주장해서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런 가상의 사실을 믿게 하는 것이다. ‘대안적 사실’이라는 그럴듯한 이름도 붙인다. 사실이면 사실이고 거짓이면 거짓인 것이지 사실의 대안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대안적 사실’은 그냥 ‘허구’, ‘거짓말’을 교묘하게 비틀어 표현한 것일 뿐이다.
p.186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기사는 ‘가짜뉴스’, 이를 보도한 언론인은 ‘기레기’라고 공세를 펼친다. 이런 행동을 언론에 대한 비판적 소비, 언론 소비자 주권 등 다양한 표현으로 정당화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지지하는 정치 진영이나 인물을 도우려는 정치 활동이다.
p.216
‘언론의 정파성’ 문제를 얘기하면 나름 합리적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언론이 어느 정도 정파적일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식의 얘기를 한다. 우선 지금 언론이 ‘어느 정도’만 정파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p.218
이 모든 대책의 출발점은 언론을 중심으로 한 정파적 생태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의 작은 인식의 변화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언론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언론이 우리 편을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헝클어진 언론 문제를 고칠 수 있는 출발점이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