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에서
리호는 융프라우산 정상까지 올라오는 산악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새하얀 눈밭을 뛰어다녔다. 은실이는 생전 처음 보는 눈을 신기하다는 듯 앞발로 톡톡 쳐 보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야옹 하고 울었다.
“왜? 안아 달라는 거야? 은실이 너, 발이 시리구나.”
은회색 털의 은실이를 품에 꼭 안으니 따뜻했다.
나 역시 눈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가 말로만 듣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아 벌써 설렜다. 전망대 앞에 설치된 알록달록한 대형 트리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_10쪽
자세를 낮춘 은실이가 몇 걸음 떨어진 작은 바위를 향해 하악거렸다.
“왜 그래? 저기 뭐가 있어?”
긴장한 모습의 은실이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바위에 접근했다. 나도 숨을 죽인 채 살금살금 은실이의 뒤를 따랐다. 바위 뒤쪽에서 연한 갈색의 작은 솜뭉치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은실이가 앞발을 뻗어 툭 건드리자 솜뭉치가 펄쩍 튀어 올랐다.
그건 뜻밖에도 살아 있는 동물이었다. 족제비처럼 긴 몸에 짧은 다리, 꼬리는 길고 풍성했다. 고양이와 개를 반씩 닮은 묘한 생김새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물이었지만, 주먹 두 개 크기밖에 되지 않는 걸 보니 새끼 같았다. _14~15쪽
“너, 넌 누구야? 대체 어디서 나타……. 아니, 어떻게 우리가 보이는 거야?”
그제야 내가 눈에 들어왔는지 여자아이가 나지막한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과거인이잖아? 어라, 그런데 어떻게 미아의 버튼이 움직였지? 그 버튼은 타임머신을 타 본 사람에게만 반응하는 건데…….”
“타임머신이라고? 너 설마…… 미래에서 온 거야?” _16~17쪽
갑자기 눈앞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렁임이 점점 심해지더니 허공에 가느다란 틈이 생겼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이 딱 벌어졌다. 갈수록 벌어지는 틈새로 짙은 어둠이 보였다.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솟는 느낌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19쪽
엄마의 불행한 과거를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바꿔 놓은 게 바로 나였다. 얼마나 힘들게 찾은 행복인데, 이대로 사라지게 둘 순 없었다.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_23쪽
“서른세 시간이 최대한 버틸 수 있는 시간이란다. 좀 전에 봤다시피 우리가 직접 나서면 시공간이 더욱 틀어질 거야. 미안하지만 그 전에 미아를 데려다주겠니?”
애니가 타임 터널을 나오려고 할 때 허공이 갈라지고 땅이 마구 흔들리던 걸 말하는 듯했다. 직접 미아를 데려갈 수 없으니 미래공원까지 데려다달라는 거였다. _25쪽
리호가 멈춰 서더니,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서림아, 저기 좀 봐. 아이스크림이 사라지고 있어!”
고개를 돌린 나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산꼭대기를 덮고 있던 하얀 눈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다리가 떨려 왔다. _27쪾
리호가 손목을 내밀며 외쳤다.
“이것 봐. 탄소 밴드의 색깔이 붉게 변했어.”
정말이었다. 탄소 밴드의 디스플레이가 ‘위험’을 나타내는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은실이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자꾸만 하악거렸다. _35쪽
무서운 생각에 머리칼이 곤두섰다.
뒤를 돌아보니 달리는 기차 뒤꽁무니에 몸을 반쯤 내민 남자가 보였다.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찾는 듯했다. 그 옆에서 남자를 말리는 금발 여자도 보였다.
기차는 이미 엄청난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더는 쫓아올 수 없겠지, 생각한 순간 남자가 달리는 기차에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철길을 따라 승강장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_42~43쪽
어떻게든 엄마를 피신시키고 싶었는데 연락 자체가 안 된다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저 싱크홀은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생긴 이상 증세가 분명하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도 벌써 저런 일이 벌어지다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한시라도 빨리 미래공원으로 미아를 데려가야 해.’ _93쪽
어제라면 융프라우산 빙벽이 녹아내리고, 헝가리에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창밖을 보니 열차는 어느새 도시를 벗어나 있었다. 가지만 남은 메마른 나무와 쩍쩍 갈라진 황토색 땅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 강이 시냇물처럼 보였다. 겨울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131쪽
“궁금한 게 있어요. 미아를 노리는 사람이 있어요. 지난번에 불법 시간 여행의 흔적이 있다고 했잖아요. 혹시 그 사람이 아닐까요?” _133쪽
남자가 리호를 지나쳐 통로에서 떨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힘들게 차를 빠져나왔을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 매끈했다. 어제 산악 기차에서 은실이가 이마를 할퀴기까지 했는데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찾았다, 이서림.” _155쪽
나는 객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혹시 물을 가지고 계신 분 있나요? 물이 있으면 저 문을 열 수 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서 엄마를 구해야 하거든요. 그건 저만 할 수 있어요. 제발…….” _164쪽
“그건…… 잠깐의 부작용일 뿐이야. 큰 성공을 위한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그분이 말씀하셨어.”
그건 소장이 늘 하던 말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크고 뭐가 작다는 거지? 세상에 희생해도 되는 존재가 어디 있냐는 말이야.’ _2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