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서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해방, 구속, 그리고 설립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과 구속,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의 백성으로서 그들을 세우는 위대한 역사에 대한 일반적이고 특징적인 주제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서건 아니면 오래 참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건 하나님의 하나의 백성이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에게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셔서, 신실함이 없는 자신의 백성을 돌보고자 하셨다. 그렇지만 자신의 임재 속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먼 거리에서 그분 자신에게로 나아오게끔 하셨건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휘장은 찢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로 오신 것도 아니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기독교를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죄악된 사람들 가운데로 오셨고, 사람은 의(義)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율법은 사람에게 아담의 자녀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요구했다. 생명은 그것을 지킨 결과로서 주어졌고, 만일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에게 저주가 임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관계는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지만, 이 은혜는 지속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인 지각을 가지고 은혜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이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처럼 죄인들로서 전혀 은혜를 이해하지도 못했다. 이제 이 신성한 교훈의 과정을 살펴보자.
Exodus
|출애굽기 1-2장|
이스라엘의 박해와 하나님의 섭리적인 감독
우선 우리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 역사적 상황을 볼 수 있다. 즉 이 이스라엘 민족이 감당해야 했던 박해와 어린 모세의 부모의 믿음에 응답하시고, 그리하여 어린 모세의 생명을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모세를 장차 바로의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계획을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감독을 볼 수 있다. 지상에서 행해지는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신 사건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은 때에라도 모든 것을 내다보시고 미리 준비하신다.
믿음에 대한 섭리적인 응답. 하지만 믿음의 지침을 준 것도 아니고, 일을 성취하도록 힘도 제공하지 않았던 섭리
섭리가 믿음에 대해 응답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행동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실을 통제하는 일을 하지만, 그것 자체가 믿음의 지침은 아니다. 비록 가끔 빛의 선명성이 부족한 신자들에 의해서 일이 성사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의 지침으로 삼을 순 없다. 모세의 믿음이, 그가 장성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에 의해서 정해 주신 지위의 모든 유익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났다. 섭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종들을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사역에 맞도록, 다양한 그릇으로서 만들 수도 있고, 종종 그렇게 역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섭리 자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 될 수는 없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섭리는 세상의 영광을 포기할 수 있게 해주는데, 그런 것이야말로 참 신앙의 실제성에 대한 증거이며 또한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섭리는 다만 그러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줄 뿐이다. 이런 것은 준비의 일부일 뿐이다. 믿음은 자신이 하나님께 붙들렸다는 감정적인 정서를 통해서 작용하며, 결과적으로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비록 자신의 지위가 그들에게 도움이나 구제를 베풀 수 있는 입장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그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그들과 일치시키려는 정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믿음 자체는 하나님께 속하고 싶어 하고,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 되었다는 유대감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마치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슨 권위를 가지고 있거나, 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으며, 높은 권세자에게서 무슨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믿음은 (왜냐하면 그런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분의 백성은 그분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 지상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에 - 느낀다. 그리고 믿음은 그러한 정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차지해야 하는 그 자리에 자신의 자리를 잡는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었다. 믿음은 오직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를 따를 뿐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동일시했던 모세의 신앙
모세가 세상에서 자신의 높은 신분과 지위를 고수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과연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심지어 그는 자신의 높은 신분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끈은 보지 못한 채, 그저 바로의 권력에 기대어보려는 심산일 뿐이다. 결국 세상의 힘과 권력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에 의한 해방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도움을 힘입어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이루는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모세는 많은 고난을 면제받았을 수는 있을 터이지만, 진정한 영광은 잃었을 것이다. 바로는 우쭐대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바로의 권위가 오히려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귀하고도 심지어 영광스러운 관계 속에서 빛을 발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대신, 바로를 의지함으로써 계속 노예상태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지 못하셨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이성과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적인 시야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해력은 모세가 계속해서 세상의 자리에 머물러야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참 믿음은 모세가 기꺼이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정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봉사가 더욱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되게 하고자 잠시 제외되었던 모세
이제 모세는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한다. 어떤 자연스러운 활동, 그리고 위에서 온 것도 아니고 순결하지도 못하지만,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한 데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습관이 그를 지배했다. 어쨌든 그런 것이 최초의 헌신적인 행동이었고, 성령님은 그 점을 나름 선하고 받아줄만한 믿음의 열매로 드러내셨다.1)
1)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보라. 이것은 종종 자신의 믿음의 원칙과 열망에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아와 자아에 속한 에너지에 대해서 죽는 법을 아직 배우지 않았을 수가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은 자아가 완전히 심판을 받고 그 실상이 알려지기까지, 소위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 시작되기까지 항상 일어날 수 있다. 세상은 육신에 속한 상태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에너지보다 강하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기 위한 것이어야 했고,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어야 했으며,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분별한 가운데서 나온 순종의 행위여야 했다. 이 경우 우리는 우리 주님이 종종 행동하신 방식을 통해서 보여주신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 충성스러움의 진지한 에너지가 나타나도록 허용되었지만, 섬김과 봉사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도구는 잠시 동안 제쳐지게 되었다. 예수님에게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다만 예수님 속에는 거짓된 계산이나 실수, 또는 예수님을 그들에게서 건져내는 외적인 섭리는 없었다. 예수님 속에는 삶의 에너지의 완전함이 있었으며, 항상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행동하셨고, 동시에 아버지께서 자신을 도덕적으로 두었던 환경과 상황 속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주님은 어린 시절 아들로서 성전에서 선생들과 함께 나타나셨고(눅 2:46,47), 하나님의 시간과 정해진 섭리가 나타날 때까지 요셉과 마리아에게 복종하셨는데, 이 두 가지 모두에서 완전하셨다. 모세는 충성스러운 가운데서도 두려움에 떨었으며,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 곧 힘을 사용하는 습관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겁을 먹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자신의 영혼을 움직였던 그의 사랑과 그의 충성스러움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 때문에 거절당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행 7:25). 그래서 그는 광야로 도망을 쳐야 했다.
모형으로서 요셉과 모세의 차이점
모세와 요셉의 모형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요셉은 죽으셨다가 지극히 높은 위엄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의 모형으로, 형제들에 의해서 배반을 당했으나 이방인들을 다스리는 가장 높은 보좌의 우편 자리까지 올라갔으며, 결국 이별했던 자신의 형제들을 용서하고 받아 준다. 요셉의 자녀들은 그 당시 그가 받은 축복의 증거였다. 그는 그들을 므낫세(“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와 에브라임(“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으로 불렀다. 모세는 형제들에게 버림당한2)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2) 모형으로서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왔지만 그들은 그분을 거절했다. 아래를 보라. 스데반은 이 사실을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행 7장).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권능 가운데 재림하실 때까지 세상에 있는 형제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비록 십보라가 교회의 모형으로, (요셉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가 이스라엘에게서 떨어져 지내는 동안 거절당한 해방자의 신부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음, 그의 감정들을 생각해볼 때, (모세가 자녀의 이름을 지으면서 그 이름에 부여했던 의미들을 생각해볼 때)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따로 떨어져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형제사랑의 마음이 거기에 있었고, 그의 생각이 거기에 있었으며, 그의 안식과 그의 조국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다른 어느 곳에 있을지라도 그저 이방인일 뿐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해방자로서 예수의 모형이다. 그는 자기 아들을 게르솜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곧 “거기선 나그네”란 뜻이었고, 그래서 그는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고 말했다. 그의 장인 이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하셨을 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이끌렸던 이방인들을 우리에게 모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