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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넬슨 다비의 성경주석: 레위기


  • ISBN-13
    979-11-6914-035-5 (03230)
  • 출판사 / 임프린트
    형제들의집
  • 정가
    14,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3-02-22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존 넬슨 다비
  • 번역
    이종수
  • 메인주제어
    기독교도: 신앙생활
  • 추가주제어
    구약성경
  • 키워드
    #기독교신앙생활 #기독교교리 #레위기 #존넬슨다비 #기독교도: 신앙생활 #구약성경
  • 도서유형
    종이책, 반양장/소프트커버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30 * 190 mm, 264 Page

책소개

“레위기는 성소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간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과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레위기에는 레위기 제사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거대한 은혜의 계획과 여호와의 절기를 통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그림이 감추어 있다.”

목차

레위기 서문…………………………………………………9
레위기 제 1장………………………………………………22
레위기 제 2장………………………………………………64
레위기 제 3장………………………………………………109
레위기 제 4-7장………………………………………………137
레위기 제 8,9장………………………………………………163
레위기 제 10장………………………………………………171
레위기 제 11,12장……………………………………………173
레위기 제 13,14장……………………………………………176
레위기 제 15장………………………………………………196
레위기 제 16장………………………………………………198
레위기 제 17장………………………………………………219
레위기 제 18장………………………………………………221
레위기 제 19,20장……………………………………………223
레위기 제 21,22장……………………………………………226
레위기 제 23장………………………………………………230
레위기 제 24장………………………………………………254
레위기 제 25장………………………………………………257
레위기 제 26장………………………………………………259
레위기 제 27장………………………………………………261

본문인용

Leviticus

|레위기 서문|


자기 백성 가운데 있는 성소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법


레위기는 성소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the way of drawing near to God)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과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제사장 제도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즉, 제사장 제도란 성소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를 가리킨다. 이로써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형성하게 된 사람들에게 합당하지 못한 것과 부정한 것들을 인식하고 분별하게 해주는 기능과 사람이 부정한지 여부를 분별하는 기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어느 경우든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제사장 봉사의 일부였다. 레위기에는 또한 여호와의 절기를 포함해서 특별한 경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께로 모으는 여러 차례의 집회가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을 침해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교통은 성막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 있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모든 관계의 기초이자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더 이상 위에서 규례를 내려주시는 입법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1) 하나님으로서, 하나님 자신과 백성들과의 관계 증진을 도모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1) 이것은 하나님께서 관계를 설정하시는 성격의 문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대부분의 지시사항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관계 속에 있다는 가정 하에 주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실제로 성소 밖에 있었고, 하나님은 백성들이 가까이 나아올 수 있도록 성막 안에 거하셨기에, 백성이나 개인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는 지시사항들을 받았다. 이로써 비록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는 형성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있는 위치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것을 눈여겨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은 로마서 3장에서 이방인 뿐만 아니라 죄인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는 사도 바울의 논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지시사항들은 이미 보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 해당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특히 지금 은혜의 증거로서 피가 속죄소에 뿌려졌고, 휘장이 제거된 상태에서 영광의 계시와 증언이 선포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은혜의 역사와 구속사역이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가까이 오시고자 자신을 낮추신 곳, 곧 성소에 있는 보좌로 나아오는 관계의 조건들이 제시되었는데, 여기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를 유지시킬 수 있는 세부사항이 포함되었다. 독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유대인의 위치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히브리서 9장을 보면, 그 때까지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도, 심지어 제사장들도 휘장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제사들은 죄들을 기억나게 해줄 뿐이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되었고, 휘장은 찢어졌다. 이 일은 이제 하나님과 특정한 관계 속에 있었던 하나의 백성, 즉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일이 이루어졌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밖에 있었으며, 사실 그들은 제단까지만 나아갈 수 있었고, 그들 중 일부만 기껏해야 향단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충만한 은혜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이제 구속사역이 완성되었고,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며, 지성소에 들어갈 완전한 담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다룰 주제는 레위기에 예표적으로 나타나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격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고자 나아가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선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줄로 안다. 성소에 있었던 것은 심판의 보좌였다. 그럴진대 과연 누가 거기에 접근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단이자 방법으로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장의 위치가 아무리 하나님께 가까이 있고 또 그 특권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확립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의 영원한 기초이자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완벽한 희생을 대표하는 희생제사로 시작되고 있다. 다양한 특징과 다양한 적용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모형적인 희생제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가지고 있는 측량할 수 없는 진가(眞價)를 가늠해볼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부분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모형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성격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모형들은 서로 다른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모형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의 원리들에 대한 것도 있고, 사라와 하갈처럼 두 언약에 대한 것도 있다. 부분적으로 어떤 것은 주 예수님에 대한 것도 있고, 희생제물이나 제사장과 같은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들도 있다. 부분적으로 특정한 하나님의 섭리나 다양한 세대에 속한 사람들의 행실에 대한 것도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된 미래적인 측면도 있다.

비록 엄격하게 적용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창세기는 첫 번째 부류에 속한 모형들을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 놀라운 모형들은 출애굽기에 많이 나오지만, 레위기는 두 번째 부류에 속한 모형들을 제공하고 있다. 민수기는 세 번째 부류에 속하며, 네 번째 부류는 이상의 성경 속에 널리 퍼져 있다.

우리의 능력에 맞는 방식으로 설정된 모형들

하나님의 말씀에서 모형을 사용하는 것은 그냥 지나쳐선 아니 되는, 하나님의 복된 계시를 소개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모형 속에는 특별한 은혜가 담겨 있다. 그 모형의 실제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능력과 이해력을 거의 초월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모형의 실제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알고 또 성령님에 의해서 이 실제를 누리는 법을 배움으로써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지극히 높이 고양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 실체를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무한히 초월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굳이 표현하자면, 모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실제가 되어야 하며, 우리에겐 유익한 것이긴 해도 그들에겐 실제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원칙의 실제적인 측면에서 무한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심오하고 무한한 가치를 지닌 우리 신앙의 대상들은 모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뚜렷해지고 또한 가까워진다. 실제 또는 원형(antitype)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자비와 탁월함의 세부적인 사항이 모형을 통해서 바로 우리 눈 앞에 제시되며, 하나님의 자비와 탁월성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제시됨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을 정확하게 판단하시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능력에 맞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정하신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영광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로 가득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고양시키려는 목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모형은 이런 목적을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림이다. 이제 우리는 위대한 실체를 담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가지 모형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실체를 담고 있는 모형의 실타래와 설명들을 모두 우리 손에 쥐고 있다. 그분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길!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들을 보여주는 성막, 백성의 필요와 죄를 화해시키는 수단

이것을 레위기 시작 부분에 있는 희생제사에 적용하기 위하여, 성막의 설치는 상당히 구별되는 두 가지 점을 아우르고 있었다. 즉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고,2)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과 현재적인 은혜의 나타남으로써 백성의 필요와 죄를 속죄하는 수단을 포함해야 했다. 성막의 모든 구조는 시내 산에서 보여주신 하나의 양식(a pattern)을 따라야 했다. 즉 하늘과 땅의 상호작용을 포함해서 하늘에 속한 것들의 패턴을 따라야 했으며,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나은 성막의 완성을 내다보면서 하늘의 질서를 따라야 했다. 하지만 성막의 경륜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죄를 지은 후에,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가 발효된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범법을 속죄하는 예물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성소에 있는 보좌에서 흘러나오게 되었지만, 그들의 범죄로 인해서 제사장들이 항상 성소를 출입하는 일은 금지되었으며, 그럼에도 범죄한 백성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모든 것이 은혜를 통해서 공급되었다.

2) 내가 받은 인상은 성전이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고 왕족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성막이 천년왕국 시대의 상태의 일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년왕국 시대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위에 확립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성전 휘장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찢어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대제사장은 성소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될 것이며, 그 때 영광과 아름다움의 예복을 입을 것이다. 따라서 진설병과 일곱 개의 가지로 이루어진 등잔대는 세상을 밝히는 빛과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제사장의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우리에겐 휘장이 찢어졌기에,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죄를 지은 후에 세워진 성막의 경륜

그러므로 우리가 성막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는 곳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죄를 지은 사건 이후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의 세부 사항과 법령 또는 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받기도 전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광기 어린 불경스러운 죄를 저질렀으며, 이에 모세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는 장막을 옮겼고, 이스라엘 진 밖에 쳤으며, 진과 멀리 떨어지게 했으며, 그것을 회막(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 때는 아직 성막을 세우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여호와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다.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율법에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없었다. 율법은 이미 불러냄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조건에 따라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하나의 백성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지만 악이 들어왔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의 몸으로서 배도했으며, 언약을 깨뜨렸고, 그런 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로서 회막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산에서 보여주신 패턴을 따라 성막이 세워지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로써 참으로 충격적인 방식으로 성막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 위에 하나의 원리가 확립될 수 있었다.

실행된 일은 없지만 본래 정해진 질서

본래 설정되었던 성막의 질서는 결코 실행된 일은 없었지만, 마치 율법이 본래의 성격을 지닌 채 도입되지 않은 것과 같다. 나답과 아비후는 첫 날부터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고, 아론은 대속죄일 외에는 지성소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성막 자체는 하나의 양식(pattern)을 따라 설치되었지만, 성소로 들어가는 입구는 봉쇄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죄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었으며 또한 일시적인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죄에 대한 예비적인 절차가 남아 있음을 가리켰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처럼 영원하고 완성된 속죄사역은 아니었다.

중보자를 통해서 여호와와 백성이 만나는 방식

중보자를 통한 여호와와 백성의 이러한 만남은 이중적인 특징을 띠고 있었다. 즉 사도적인 특징과 희생제사적인 특징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와 실패와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암시한다. 여호와의 뜻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행해야 한다)3) 전달할 목적으로 성막 안에 거하시는 여호와의 임재에 대해선 출애굽기 25장과 29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출애굽기 25장을 보면, 지성소에 놓이게 될 언약궤의 구조와 그 부속물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1,22절)고 말했다. 이것은 비밀한 가운데 여호와와 홀로 대면하는 중보자를 위한 것이었다. 이제 출애굽기 29장을 보면, 우리는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42,43절)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그곳은 비록 중보자를 통하는 것이긴 했지만, 모세와만 단독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백성과 만나는 장소였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지성소에 있는 케루빔 사이에서 모세와 소통하셨다. 율법이 깨어진 이후로 이런 일이 전개되었다.

3) 예언은 별개 사안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레위기는 시작되고 있다.




Leviticus

|레위기 1장|


성막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예비된 중보자, 희생제사, 제사장 제도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감

하나님은 이제 시내산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막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성막으로 나아와야 했다.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양식을 따라,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세워졌고, 하나님은 중보와 희생제사라는 방법을 통해서 백성과 관계를 맺고 계셨다. 시내산에서, 무서운 영광 가운데서, 여호와께서는 순종이라는 조건을 요구하고 제안하셨으며, 그 결과에 따른 그분의 은총을 약속하셨다. 이러한 의사소통 방식은 직접적인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죄인과 성도에게 다가가실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중보자와 제사장 제도에 의해서 예비된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중심과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자신을 예물로 바친 사역이 있다. 레위기 1장은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처음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희생제물들의 순서

우리는 이러한 희생제물들의 순서에 우선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순서는 놀랍게도 제정된 순서와 반대다. 제물에는 네 가지 큰 종류가 있다. 1) 번제, 2) 소제, 3) 화목제, 4) 속죄제다. 나는 우선적으로 제정된 순서에 따라서 이름을 배열했지만, 적용의 측면에서 볼 때 또는 이 제사들이 함께 드려질 때에는 항상 속죄제가 먼저 나온다. 왜냐하면 속죄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회복되는 것이 최우선적인 사안이기 때문이다.4)

4)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영원한 속죄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지은 죄들로 인해서 양심의 송사를 당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이러한 것을 경험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방식은, 죄인이 하나님께 처음 오는 방식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의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들 때문에 죄인으로서 나아와야 했으며,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나아올 수 없었지만, 어쨌든 화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미약하나마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위대한 사실의 실제와 가치를 날마다 더 많이 보고 경험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영원의 역사 속에 우뚝 서있으며, 영원한 축복을 흔들림 없이 보장하는 토대를 이루고 있다. 선과 악의 모든 요소와 힘이 거기에 집결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 마음의 절대적인 적대감이 은혜 가운데서 표출되었다. 사탄의 완전한 힘이 사람들을 덮고 있었고, 인자이신 그리스도는 죄가 되셨을 때에도 자기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사랑에 있어서 완전하셨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공의를 집행하는 일에 있어서 완전하셨으며, 또한 죄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도 완전하셨다. 이 일이 완성되려면, 완전한 기반이 정의 또는 공의 위에 놓여야 했고, 그럴 때에만 완전한 성취와 변경할 수 없는 불변성이 보장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는 도덕적으로 변할 수 없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생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누군가 자신이 지은 죄들을 대신 지고 감으로써 죄를 없애는 효력을 덧입고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자신을 큰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죄가 된 것은 완전한 자신을 하나님께 완벽하게 바친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록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완전하신 분이시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었다. 이것은 사실 위대한 일이며, 복된 비밀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셔서 자기 자신을 바치셨으며, 죄를 알지 못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으며, 이에 죽음을 당하셨다.

단번에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들이 제거되었고,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능하게 해준 원천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아무 흠도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있다. 죄가 하나님 앞에 있었고, 죄로 인해서 죽음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으며, 이러한 상태를 처리하고자5)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사역 덕분에 하나님과의 사귐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이 일을 위해선 우리의 죄들이 제거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기에 대속죄일과의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나서 피가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에 뿌려졌다. 이 일은 예표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한 예물을 바침으로써 완전히 정결하게 된다는 토대 위에서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희생제물 자체가 실제적으로 죄들과 더러운 것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수하고 향기로운 냄새로 드려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죄가 상존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예물을 드리는 일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죄가 완전히 처리되고 또 거룩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으며, 이로써 번제, 소제, 화목제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속죄제가 따로 나오고 있다. 속죄제는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완전함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물론 죄를 처리하는 부분에 있어서 완전함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저 죄를 지고 가는 모습에 대한 표현일 뿐이기 때문에, 나중에 나오게 되었다.

5) 율법 앞에서 속죄제에 대해서 긍정적인 내용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담의 옷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창세기 4장 7절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속죄제는 자주 드려지진 않았다. 한편 번제는 자주 드려졌다. 이러한 제사들은 죄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희생제물과 죽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었으며,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화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제사는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십자가 사역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눈에 무한히 소중하게 보시는 것을 통해서 완전하게 영광을 받으셔야만 했다. 그리스도는 의로움, 사랑, 위엄, 진실, 목적 등 모든 것이셨으며,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스럽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하실 수 있으셨다. 죄가 전제되어 있었고,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제사가 하나님께 바쳐졌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개인들의 죄들을 감당하신 일보다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예배가 이러한 특징을 띠고 있는 희생제사의 향기로운 냄새가 피어오르는 상태에서 드려질 수 있었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으며 또한 이 토대가 없었다면 감히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었던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 그리스도의 제사라는 토대는 영원한 효력을 가진 채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며, 레위기의 모든 것을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로 말미암아 의(義)가 거하는 장소로서 확정되었다. 그렇지만 나의 실제적인 죄들이 제거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하나는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서 인간이 처한 전체적인 관계의 문제다. 다른 하나는 내가 지은 개인적인 죄들의 문제다. 그러므로 모든 희생제사는 전자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은 관계가 확립되었을 때에야, 그 관계 속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때 죄들을 위한 희생제사가 필요하다.

이미 언급했지만,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다양한 제사들에 있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이 모든 제사들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다. 즉 그리스도께 자신의 몸을 바치셨던, 그 하나의 완전한 희생제사(one all-perfect sacrifice)에 첨부되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가치와 효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여기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제사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열매로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목표는 이러한 제사들 속에 예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어야 한다.

속죄제사와 다른 제사들 사이의 차이점

나는 앞서 네 가지 부류의 제사에 대해서 언급했다. 즉 번제, 소제, 화목제, 그리고 죄를 속죄하기 위해 드리는 몇 가지 제사다. 이러한 것들은 히브리서 10장에 열거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제사는 아주 근본적인 차이를 띠고 있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즉 속죄제사와 기타 제사들이다. 엄밀히 말해서 다른 제사들은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화제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속죄제는 그렇지 않았다. (제단에 불살라 드리는 제사의 경우 기름 때문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레위기 4장 31절을 보라. 우리의 죄들을 대신 지고 있었음에도 그리스도의 완전은 여전히 손상되지 않고 있었다.) 능동적인 죄들은 속죄제를 통해서 처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범한 죄들(sins)로 인해서 기소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죄 문제와 관련된 제물에 접촉한 사람은 부정하게 되었다(레 16장, 민 19장 참조).6)

6) 이러한 경우들을 보면, 번제는 진 밖에서 드려졌다. 이 점은 아사셀 염소(scape-goat)를 속죄제로 드리는 경우와 같았다.

하지만 번제의 경우, 능동적인 죄들 때문에 바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죄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피가 흘려져야 했으며, 화목을 위한 것이긴 했지만, 제단 위에서 불살라짐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바쳐졌다. 그러므로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희생제사를 의미했으며, 비록 여기에도 죄가 상정되어 있긴 했지만 모든 측면에서 완벽한 제사였다. 이 희생제사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죄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 영원히 제거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요한복음 1장 29절과 히브리서 9장 26절을 보라. 하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죄의 상태를 의식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것은 결과일 뿐이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따로 있다. 즉 우리가 지은 죄들(sins)을 짊어지신 것 외에도, 그리스도는 죄(sin)가 되심으로써 하나님을 완벽하게 영광스럽게 했다는데 있다. 죄의 자리에서 죽기까지 순종했던 그리스도의 순종은 완전했고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성품을 훼손하지 않은 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 13장, 17장을 보라). 사실 원문에는 죄(sin)와 속죄제(sin-offering)를 뜻하는 단어가 하나만 있다. 속죄제물은 불에 탔지만, 제단 위에서 불살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름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다(레 4장). 다른 제물들은 불에 의해서 살라짐으로써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바쳐졌다. 그 모든 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완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일 뿐, 거룩하신 분 곧 재판장이신 여호와에 의해서 대속제물에게 죄들을 짊어지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서 이러한 두 가지 요소는 매우 뚜렷하고 매우 소중하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던 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것도 사실이다. 레위기에서 순서상 첫 번째로, 자연스럽게 최우선적으로 제시되었던 번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번제

첫 번째 종류의 제사이자, 불에 의해서 향기로운 냄새로 바쳐지는 제사의 성격을 띠고 있는 가장 완벽하고 또한 특별한 특징을 띠고 있는 것은 번제였다. 번제를 바치려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열납되도록7) 제물을 회막 문 앞으로 가져와서,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죽여야 했다.

7) 이와 같이 번제는 자발적으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여호와께서 제물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의 호의를 얻고자 번제를 바치는 사람을 기쁘게 열납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라쫀(ratz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엔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서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신 것이 교리적으로 그대로 예표되어 있다.

성막의 예식 장소:

(1) 지성소
첫째, 성막에서 예식이 드려지는 전체적인 장면을 보면, 장소적으로 세 부분이 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지성소였다. 지성소는 천막으로 덮인 널판 안의 공간 중 가장 안쪽 부분이며, 그 앞에 휘장으로 가리고 있어서 나머지 공간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언약궤와 속죄소가 있고, 케루빔이 속죄소를 덮고 있었으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보좌이며, 하나님이 계시하고 싶어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며, 그 위에 속죄소가 있는 진정한 언약궤였다.

(2) 성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휘장은 구약의 경륜이 존속하는 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8)

8) 이것은 광야에 세워진 성막이 실제가 아니라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왜냐하면 찢어지지 않은 휘장은 입장을 금지하는 강력한 신호였기 때문이다. 찢어진 휘장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담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대조적인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휘장 바로 앞에는 금 향단이 서 있었고, 향은 향로에 담긴 상태에서 이동할 수 있었다. 지성소와는 구분되는 장소로, 바깥쪽의 내실은 성소라 불렸으며, 진설병과 촛대가 있었다. 진설병과 촛대는 성육신 이전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진설병은 그리스도께서 열두지파의 머리이시며 또한 참된 빵으로서 하나 됨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촛대는 빛을 비추는 하나님의 영의 완전함9)을 나타낸다. (이러한 것들은 마지막 날의 이스라엘과 연관이 있음을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9) 숫자 7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이고, 마찬가지로 숫자 12 또한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완전을 의미했다. 전자는 선이나 악에 있어서 절대적인 완결성(completeness)을 의미했고, 후자는 인간을 다스리는 경영에 있어서 완결성을 의미했다.

교회는 이러한 모형적인 의미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으며,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지만, 정작 교회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하늘에서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으며, 하늘에 속한 것들을 교회에 전달하는 사역을 하시는 성령께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임재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모형들은 땅에 속한 하나님의 경륜이 확립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땅에 속한 백성들과 맺게 될 관계와 다양한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스가랴서 4장과 요한계시록 11장을 비교해보면, 거기엔 촛대에 대한 증언을 볼 수 있다. 물론 실제 완전한 형태의 증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촛대는 땅 위에서 펼쳐지게 될 일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을 밝히고 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예표들을 현재 우리에게 적용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허용이 되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빛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영적인 관계와 특권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그저 세상에서 순례자이며, 땅에 속한 백성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있고, 우리는 땅에 있다. 아버지의 이름도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훨씬 더 소중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은혜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적합한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partakers of the heavenly calling)이다. 하늘의 부르심은 교회가 휴거된 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더욱 확장되어 갈 것이며, 그들을 위한 교훈을 제공해줄 것이다. 대제사장만 아니라 제사장들의 무리가 계속해서 성소로 들어가긴 했지만, 사실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우리는 이제 누가 또는 누구만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데, 그들은 곧 하나님의 참된 성도들로서 왕과 제사장이 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성소를 가리고 있었으며 그 길을 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으며,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담력을 가지고 있다. 휘장은 그리스도의 육체에 의해서 찢어졌다. 그리스도는 이제 단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나 성육신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살과 피의 종식으로 표시되는 죽음을 맞이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지금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으로 영으로(in spirit) 들어갈 수 있는 (활짝 열린) 문이 되셨다. 우리는 성소에 들어갈 특권과 자격을 가지고 있다. 지성소가 하늘들 가운데 가장 높은 셋째 하늘에 대한 모형이듯이, 성소는 창조된 첫째 하늘에 대한 모형이다.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지성소와 성소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사람이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성소에 영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하나님과 사귐을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천상세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긴 하지만, 지금은 영으로만 하늘 성소에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을 완전한 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신 그리스도

성막으로 나아가려면 바깥뜰을 거쳐야 했는데, 이것은 회막의 뜰이었다.10) 이 부분으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번제단이었고, 번제단과 성막 사이에 물두멍이 있었다.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성막으로 들어갈 때 또는 제단에서 섬기는 일을 하거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때 씻는 곳이었다.11)

10) 회막의 문은 성소의 휘장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뜰에 있었다. 번제단은 회막 문 앞에 있었다.

11) 제사장들의 위임식을 위해 씻는 일은 물두멍에서 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제사장들은 회막 앞에서 물로 씻었다. 깨끗이 씻는 것은 항상 말씀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물은 곧 말씀을 상징하고 있었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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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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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존 넬슨 다비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

근세의 터툴리안(Tertulianus)으로 일컬어지는 존 넬슨 다비는 아일랜드계로 1800년 11월 18일 리프 캐슬, 킹스 카운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거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아일랜드 대법원에서 변호사로 잠시 봉직하다가 1825년에 영국 국교회의 부제로, 그 이듬해에는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다비는 영적 해방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진리를 경험한 후, 당시 국가와 결혼 관계에 있던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의 신부직을 1827년에 사임했다. 그 이듬해 성경읽기 모임에서 영적해방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 모임에 참석했던 벨렛(J.G. Bellett), 허친슨(F. Hutchinson), 파넬(Lord Congleton-John Parnell), 그로브스(A.N. Groves), 크로닌(E. Cronin), 스토크스(W.J. Stokes) 등이 이 진리가 뿜어내는 영광의 광채 속에서 섬광이 비추는듯 이 진리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후에 6명의 신앙동지와 함께 성만찬을 시작함으로써 교회 역사상 '형제단 교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교파나 사회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토대로 하여 형제와 자매로 영접되었기 때문에 플리머스 형제단 교회(Plymouth Brethren Assembly)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채프만(R.C. Chapman)이 반스테플에서, 크레익과 조지 뮬러가 브리스톨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유명한 본문 비평가였던 트레겔레스(S.P. Tregelles)가 1836년에 영접되었다.

다비의 성경주석(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도 이 무렵 출간되었는데 5권으로 되어있는 이 저서야 말로 성경학자들에 의해 극찬을 받고 있는 불후의 걸작이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라틴어에 능통하였으며 유럽 각국어에도 유창해서 그가 번역한 불어 성경은 프랑스 전역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새번역으로 불리는 그의 영어성경은 원어에 충실하기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밖에도 독일어, 이태리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의 논문과 설교는 윌리암 켈리(W. Kelly)가 편집하여 32권으로 집대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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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이종수
역자 이 종 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세계경영대학원(MBA),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MDiv)을 졸업했으며, 그리스도인훈련원(CTI)에서 풀타임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영성과 경건훈련을 받았다.

19세기에 일어난 플리머스 형제단 운동의 순수한 정신을 계승하고, 플리머스 형제단의 깊은 영성을 한국교회에 소개하기 위해 2006년 도서출판 형제들의집을 설립했다. 도서출판 형제들의집 대표로, 플리머스 형제단의 영성 깊은 도서들을 100여권 이상 번역 및 출간해왔으며, 유튜브 “다비신학연구원(DTI)”을 운영하고 있다. 플리머스 형제단의 신앙과 영성을 토대로 해서 의정부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학자 존 넬슨 다비 평전>, <사도라 불린 영적 거장들>, <악과 고통 그리고 시련의 문제>, <구원 얻는 기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다>, <거듭남의 진리>, <죄사함의 진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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