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가 이곳에 머물렀을 때 임씨 댁에서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했다. 그 맛이 좋아 이름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 사람의 성씨를 따 ‘임절미(任+絶味)’라 불러 오늘날 인절미가 됐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곳이 쌍수정이다. | p.30 〈백제의 병사들〉
곰나루 금강은 갑오년 겨울에 건널 수 없는 3·8선이고 휴전선이었다. 그렇게 가고자 했던 서울 길, ‘내일은 공주, 모레는 수원, 글피는 서울’이라며 기세 좋게 올라가 공주를 함락하고 서울로 진격해 후천개벽 참세상을 열겠다던 동학농민군의 간절한 바람은 금강물에 푸른 물살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 p.39 〈곰나루〉
우연한 일은 1971년 다시 일어났다. 5호분과 6호분 사이에 물이 새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공사를 벌이던 중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무덤을 발견한 것이다. 가루베 지온은 공주를 떠날 무렵인 1940년 “백제 고분을 1000기 이상 조사했다”고 말했는데, 가루베를 비롯한 수많은 도굴꾼들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능이 무령왕릉이었다. | p.58 〈무령왕릉〉
충주에 있던 감영을 공주로 옮긴 것은 1602년(선조 35년)이었다. 옮긴 이유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충주 일대가 대부분 초토화되었지만 공주는 정유재란 때 일시 함락된 적은 있으나 충주보다는 피해가 적었기 때문이다. 또 충주는 충청도 동북부에 치우쳐 있는 반면 공주는 금강의 물길은 물론 충청도 각지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 p.84 〈충청감영〉
느닷없이 절에서 만난 이서방이라는 사람이 마곡사를 추천했고, 그런 인연이 결국 김구가 머리를 깎고 마곡사에 입산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3년 뒤 김구는 “금강산으로 가서 경전의 뜻이나 연구하고, 일생 충실한 불자가 되겠다”며 경성으로 떠났다.《백범일지》에 남긴 다음 글이 그의 의중을 헤아리게 한다. | p.96 〈춘마곡사〉
배롱나무 아래 다소곳이 숨어 있는 승탑은 기단부는 물론 탑신부와 상륜부까지 모두 팔각으로 만든 팔각원당형으로, 꿈틀거리는 구름무늬 조각 위에서 천인들이 악기를 타고 있는 기단부의 모습이 특이하다. 조각의 내용이 다채롭기 이를 데 없어 고려 시대 석탑 중에서도 손꼽히는 유물이다. | p.103 〈추갑사〉
공주시 왕릉로에 있는 황새바위 성지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황새바위라는 이름은 바위 위로 소나무가 늘어져 황새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인데, 또 다른 이야기로는 죄인들이 항쇄(목에 씌우는 칼)를 차고 바위 앞에 끌려가 처형되었다 하여 ‘항쇄바위’라고도 부른다. | p.119 〈황새바위 성지〉
백제 123년의 도읍지로서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던 새벽의 땅 부여에는 백제의 유물이 별로 없다. ‘부여에는 상상력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보고 올 것이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부여 시내는 물론이고 부소산 일대에도 그날의 자취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문화유산들이 없다. 대신 부여에는 부여팔경이 있다. | p.143 〈백제의 마지막 수도〉
궁남지는 왕과 귀족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적을 막기 위한 외호(外濠)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유적을 살펴볼 때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자연형 곡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름이면 백련과 홍련, 수련, 가시연꽃을 비롯해 나라 안에서 가장 많은 수종의 연꽃이 피고 지는 이곳에서는 매년 여름 부여군이 주최하는 연꽃축제가 열린다. | p.149 〈궁남지〉
나라가 망하면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불바다가 되었는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아름다우면서도 세련되고 격조 높은 기품을 자랑한다. 석탑의 높이는 8.33미터이며, 구조는 대부분의 석탑과 같이 지대석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를 형성하였다. | p.152 〈정림사지〉
백제의 왕궁으로서, 사비시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로서 부소산성의 성격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 안에 군창지와 건물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해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p.159 〈부소산〉
후일에 만들어진 전설과 사실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그 당시 백제의 국력으로는 300명의 궁녀도 안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자왕의 서자가 41명이었고, 그들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각 식읍까지 내려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자녀 수는 100여 명이 넘고, 궁녀 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 p.174 〈낙화암과 백화정〉
조선 중기의 문신인 상촌 신흠이 〈고란사의 저녁 풍경〉이라는 시를 남긴 고란사 뒤편의 약수는 백제 왕들의 어용수로 유명하다. 임금이 약수를 마실 적에 물 위에 고란초 잎을 띄웠다. 고란초에 대해서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향방약성대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신라의 고승 원효가 백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셔보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고란초가 있음을 알았다는 신비의 여러해살이풀이다. | p.178 〈대왕포와 고란사〉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 고분군의 서쪽 논바닥에서 출토되었다. 13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진흙 구덩이 속에서 어느 한 곳도 훼손되지 않은 모습으로 벼락처럼 나타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국교인 불교와 관련된 의식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향로는 청동을 주원료로 만들어 도금했고, 뚜껑과 몸체, 받침으로 구성되었다. | p.194 〈국립부여박물관〉
세상을 내 집이라 여기고 평생을 떠돌았던 김시습이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부여군 외산면의 만수산 무량사였다. 그는 왜 말년을 의탁할 곳으로 무량사를 정했던 것일까? 그가 무량사에서 보낸 생활은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버릴지어다”라고 스스로를 평가하였다는 말이 전해질 뿐이다. | p.216 〈매월당 김시습〉
뜻있는 젊은 작가들이 하나둘씩 ‘스스로 따뜻해지기(自溫)’ 위해 마을로 들어왔고, 비어 있던 공간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전통공예작가의 작업실과 쇼룸, 로컬푸드 레스토랑, 카페와 책방, 한옥생활체험장 등 문화라는 씨줄과 공예라는 날줄로 거듭났다. | p.232 〈자온길 프로젝트〉
신동엽이 1967년 팬클럽 작가 기금 오만 원을 받아 발표한 〈금강〉은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100년 전의 장엄했던 혁명을 문학과 역사의 중심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김수영과 함께 민족문학의 양축을 형성했던 그는 서른아홉의 나이에 타계하였다. | p.234 〈민족시인 신동엽〉
은산별신제는 백제의 멸망사와 관계가 있는 장군제라는 점이 특징이다. 별신제의 신은 복신과 도침이고, 제의 속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명장들 이름이 나열된 장군축이 있으며, 별신당에는 그들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나라를 잃은 장군의 슬픈 이야기를 담아내기 때문에 말을 탄 사람이 등장하고 융복(철릭과 주립으로 된 옛 군복의 하나)을 입거나 진을 치는 등의 의식이 등장한다. | p.243 〈은산별신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