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일과 개인의 삶에 균형을 주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추구하고 있다. 개인은 일보다는 삶에 가치를 두며 직업이나 직장을 구할 때 워라밸을 중요한 조건으로 고려한다. 정부도 주 52시간 근무(법정근로 40시간 + 연장근로 12시간)를 법제화해 국민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윤한덕이 살아왔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엇이 그를 일과 개인의 삶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와 동떨어지게 했을까? 윤한덕을 보면서 ‘요즘 우리 사회에 윤한덕 같은 사람도 있을까?’ ‘아, 그런 사람도 있었네!’ 라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과 사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다. 그의 삶은 요즘의 워라밸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살인적인 수준으로 일했다. 사망하기 전 일주일 근무시간이 129시간 30분이었다. 법정근로시간보다 무려 3배 많았다. 한덕은 많은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있었다. 오로지 응급의료 발전이라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명감이 그를 지독한 책임의식을 느끼게 했고, 살인적인 노동으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한덕은 한 아내의 남편이었고,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그 또한 일보다는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낚시를 원 없이 하고, 조용히 살다 갔으면 좋겠다고 1년 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흐르는 물결을 따라, 그의 마음을 담아 편하게 쉬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허락된다면……, 그의 고향 해남 고천암 간척지에 비행학교와 항공학교를 만들어 모형 비행기를 날리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옥 속에서 고통으로 죽어가는 응급환자를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가정이 있는 삶을 뒤로 한 채…….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왔지만, 그는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꾹 누르고 살았다. 뒤에서 묵묵히 자기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덕은 국립중앙의료원 부장 김지숙에게 말했다. “지숙! 내가 만약 없으면,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거니?” “아니요, 제가 왜 해요?” 김지숙은 이전에 알았던 성당 신부의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말했다. 훌륭한 분이라고. 그래서 한덕이 김지숙에게 물어본 것이다. 한덕은 자신의 했던 일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외부로 노출되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저 일만 묵묵히 하면 될 뿐이었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환자가 돈이 있든 없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신속하게 적절한 병원으로 옮겨져 제대로 치료를 받기만을 바랐다. 환자를 위한 생각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개인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한덕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김지숙에게는 자신의 속마음을 많이 털어놓았다. 그런 김지숙이 본인이 없을 때, 남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우려해서 했던 말이다. 윤한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국종의 책 『골든아워』에서 「윤한덕」이라는 챕터를 통해 약간 알려졌을 뿐이다. 이국종은 윤한덕을 응급의료의 책임자이고, 일신의 영달을 마다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한덕은 자신을 과대 포장한 것이라며 오히려 쑥스러워했다. 자신의 존재를 누가 알아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환자를 위한 의사로서의 사명이 더 중요했다. 정작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 형제들도 한덕이 응급의료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을 몰랐다. 한덕의 사후, 언론을 통해 그토록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보건복지부 공무원 고희은은 살아생전 그를 알아주지 못했지만, 사후에 알아주니까 아쉬웠다. 생전에 훈장도 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면 좋았는데……, 고인이 된 뒤 그렇게 됐으니 마음이 아팠다. 몸을 돌보지 않고 밤낮 일하다 보니, 빨리 저세상이 부른 것으로 생각했다. 본인의 수명을 깎아서 응급의료를 세운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윤한덕의 가족들은 그가 사후 좋게 평가받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살아있을 때 좀 더 행복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한덕의 큰누나 윤미향은 동생이 살아있다면,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없었니? 조금 돌아가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서둘렀어. 그렇게 못하면 병원에서 버티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니? 네 몸보다 응급의료가 그렇게 더 중요했어? 그렇지 않았으면 살 수 없었니?” 죽어서 영화가 무슨 소용 있나, 왜 그랬을까? 정말로 응급의료 발전을 위해 무엇이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을까? 동생의 행동이 궁금했다. 윤한덕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응급의료 현실은 어땠을까? 역사는 진보한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바뀌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이 느끼는 체감도다. 환자들이 좋아졌다고 느끼면 바뀐 것이고, 아직도 여전히 불편해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대부분 모를 수 있다. 응급실은 평생 한 번, 아니면 아예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자주 가본 사람만이 변화된 응급실을 잘 알고 있을 뿐이다. 응급실이 예전보다 과연 더 좋아졌는지 국민은 생각할 것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응급실을 이용하면서 불만과 불편한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아무리 응급의료체계가 잘 돌아가더라도, 응급실에 온 이상 불편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한덕이 임상 의사로서 겪었던 응급의료의 현실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그가 중앙응급의료센터에 근무했을 당시에는 응급의료체계 자체가 없었다. 한덕은 응급의료체계를 온몸으로 떠받쳤다. 그것이 그에게 그리 큰 만족을 주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러나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나도 윤한덕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환자밖에 모르는 훌륭한 의사였다고, 사심 없는 의사이자 의료행정가였다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 의료는 많이 좋아졌다고. 일부는 개인이 한꺼번에 많은 걸 짊어지고 가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함께 나누어갔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운 마음을 보였다. 윤한덕이 업무적으로는 열정적이었고 색깔 있는 직업인으로서 삶을 살았지만,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계속 일만 하다 돌아가셔 더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급성심정지로 돌아가시고 한참 지나 발견된 것은 보호받지 못한 고립입니다. 고립된 상황에서 하는 업무는 본인도 힘듭니다. 계속 일만 하는 것이 나의 미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지속가능하지 않죠. 자기관리나 지속 가능한 인재관리 체계가 중요합니다. 센터장님 본인도 천국에서, 열정적으로 살아오면서 헌신이나 희생을 했던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선·후배들이 나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해? 그렇게 되는 걸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삶이란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으면 영원히 오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어렸을 때 추억이 소중하다. 공적인 일도 열심히 하고, 가족도 잘 챙겼어야 했는데 현실은 두 가지를 모두 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윤한덕은 가정보다 왜 응급의료를 택했을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선택이 나을까? 만약 내가 의사였다면, 과연 나의 선택은? • • • 윤한덕은 좀 더 나이가 들면 시골 무의촌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것이 의사로서 마지막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간호사 경력이 있는 김지숙에게 말했다. “내가 시골 가서 의사를 하면, 너 따라갈래?” “미쳤어요, 내가 따라가게!” 윤한덕이 집무실 의자를 단단히 부여잡고 몸이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한덕이 사용했던 집무실은 이제 ‘복덕방’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그의 추모공간 및 직원 휴게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복덕방’은 윤한덕의 ‘덕(德)’자를 따와 그를 기리는 동시에, 복(福)과 덕이 있는 방이라는 따뜻한 뜻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