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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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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윤한덕Ⅱ


  • ISBN-13
    979-11-950503-6-9 (03990)
  • 출판사 / 임프린트
    마이스터연구소 / 마루기획
  • 정가
    15,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0-02-04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김연욱
  • 번역
    -
  • 메인주제어
    인물, 문학, 문학연구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의사 윤한덕 #윤한덕 #인물, 문학, 문학연구
  • 도서유형
    종이책, 반양장/소프트커버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48 * 210 mm, 261 Page

책소개

우리 사회는 일과 개인의 삶에 균형을 주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추구하고 있다. 개인은 일보다는 삶에 가치를 두며 직업이나 직장을 구할 때 워라밸을 중요한 조건으로 고려한다. 정부도 주 52시간 근무(법정근로 40시간 + 연장근로 12시간)를 법제화해 국민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윤한덕이 살아왔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엇이 그를 일과 개인의 삶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와 동떨어지게 했을까? 윤한덕을 보면서 ‘요즘 우리 사회에 윤한덕 같은 사람도 있을까?’ ‘아, 그런 사람도 있었네!’ 라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과 사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다. 그의 삶은 요즘의 워라밸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살인적인 수준으로 일했다. 사망하기 전 일주일 근무시간이 129시간 30분이었다. 법정근로시간보다 무려 3배 많았다. 한덕은 많은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있었다. 오로지 응급의료 발전이라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명감이 그를 지독한 책임의식을 느끼게 했고, 살인적인 노동으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한덕은 한 아내의 남편이었고,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그 또한 일보다는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낚시를 원 없이 하고, 조용히 살다 갔으면 좋겠다고 1년 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흐르는 물결을 따라, 그의 마음을 담아 편하게 쉬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허락된다면……, 그의 고향 해남 고천암 간척지에 비행학교와 항공학교를 만들어 모형 비행기를 날리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옥 속에서 고통으로 죽어가는 응급환자를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가정이 있는 삶을 뒤로 한 채…….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왔지만, 그는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꾹 누르고 살았다. 뒤에서 묵묵히 자기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덕은 국립중앙의료원 부장 김지숙에게 말했다. “지숙! 내가 만약 없으면,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거니?” “아니요, 제가 왜 해요?” 김지숙은 이전에 알았던 성당 신부의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말했다. 훌륭한 분이라고. 그래서 한덕이 김지숙에게 물어본 것이다. 한덕은 자신의 했던 일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외부로 노출되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저 일만 묵묵히 하면 될 뿐이었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환자가 돈이 있든 없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신속하게 적절한 병원으로 옮겨져 제대로 치료를 받기만을 바랐다. 환자를 위한 생각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개인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한덕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김지숙에게는 자신의 속마음을 많이 털어놓았다. 그런 김지숙이 본인이 없을 때, 남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우려해서 했던 말이다. 윤한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국종의 책 『골든아워』에서 「윤한덕」이라는 챕터를 통해 약간 알려졌을 뿐이다. 이국종은 윤한덕을 응급의료의 책임자이고, 일신의 영달을 마다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한덕은 자신을 과대 포장한 것이라며 오히려 쑥스러워했다. 자신의 존재를 누가 알아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환자를 위한 의사로서의 사명이 더 중요했다. 정작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 형제들도 한덕이 응급의료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을 몰랐다. 한덕의 사후, 언론을 통해 그토록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보건복지부 공무원 고희은은 살아생전 그를 알아주지 못했지만, 사후에 알아주니까 아쉬웠다. 생전에 훈장도 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면 좋았는데……, 고인이 된 뒤 그렇게 됐으니 마음이 아팠다. 몸을 돌보지 않고 밤낮 일하다 보니, 빨리 저세상이 부른 것으로 생각했다. 본인의 수명을 깎아서 응급의료를 세운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윤한덕의 가족들은 그가 사후 좋게 평가받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살아있을 때 좀 더 행복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한덕의 큰누나 윤미향은 동생이 살아있다면,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없었니? 조금 돌아가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서둘렀어. 그렇게 못하면 병원에서 버티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니? 네 몸보다 응급의료가 그렇게 더 중요했어? 그렇지 않았으면 살 수 없었니?” 죽어서 영화가 무슨 소용 있나, 왜 그랬을까? 정말로 응급의료 발전을 위해 무엇이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을까? 동생의 행동이 궁금했다. 윤한덕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응급의료 현실은 어땠을까? 역사는 진보한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바뀌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이 느끼는 체감도다. 환자들이 좋아졌다고 느끼면 바뀐 것이고, 아직도 여전히 불편해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대부분 모를 수 있다. 응급실은 평생 한 번, 아니면 아예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자주 가본 사람만이 변화된 응급실을 잘 알고 있을 뿐이다. 응급실이 예전보다 과연 더 좋아졌는지 국민은 생각할 것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응급실을 이용하면서 불만과 불편한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아무리 응급의료체계가 잘 돌아가더라도, 응급실에 온 이상 불편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한덕이 임상 의사로서 겪었던 응급의료의 현실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그가 중앙응급의료센터에 근무했을 당시에는 응급의료체계 자체가 없었다. 한덕은 응급의료체계를 온몸으로 떠받쳤다. 그것이 그에게 그리 큰 만족을 주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러나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나도 윤한덕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환자밖에 모르는 훌륭한 의사였다고, 사심 없는 의사이자 의료행정가였다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 의료는 많이 좋아졌다고. 일부는 개인이 한꺼번에 많은 걸 짊어지고 가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함께 나누어갔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운 마음을 보였다. 윤한덕이 업무적으로는 열정적이었고 색깔 있는 직업인으로서 삶을 살았지만,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계속 일만 하다 돌아가셔 더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급성심정지로 돌아가시고 한참 지나 발견된 것은 보호받지 못한 고립입니다. 고립된 상황에서 하는 업무는 본인도 힘듭니다. 계속 일만 하는 것이 나의 미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지속가능하지 않죠. 자기관리나 지속 가능한 인재관리 체계가 중요합니다. 센터장님 본인도 천국에서, 열정적으로 살아오면서 헌신이나 희생을 했던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선·후배들이 나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해? 그렇게 되는 걸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삶이란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으면 영원히 오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어렸을 때 추억이 소중하다. 공적인 일도 열심히 하고, 가족도 잘 챙겼어야 했는데 현실은 두 가지를 모두 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윤한덕은 가정보다 왜 응급의료를 택했을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선택이 나을까? 만약 내가 의사였다면, 과연 나의 선택은? • • • 윤한덕은 좀 더 나이가 들면 시골 무의촌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것이 의사로서 마지막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간호사 경력이 있는 김지숙에게 말했다. “내가 시골 가서 의사를 하면, 너 따라갈래?” “미쳤어요, 내가 따라가게!” 윤한덕이 집무실 의자를 단단히 부여잡고 몸이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한덕이 사용했던 집무실은 이제 ‘복덕방’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그의 추모공간 및 직원 휴게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복덕방’은 윤한덕의 ‘덕(德)’자를 따와 그를 기리는 동시에, 복(福)과 덕이 있는 방이라는 따뜻한 뜻을 담았다.

목차

3부. 사명과 헌신 7 9장. 응급의료에 영향을 미친 사건과 정책 8 응급의료기금 확대 8 1339, 119로 흡수 통합 9 응급의료 전문의 당직제 13 - 대구 4세 여아 장중첩 사건 13 - 응당법 개정 17 - 일생을 관통하는 철학 24 세월호 침몰과 울음 36 공포의 전염병, 메르스 40 - 임상과 행정을 겸비한 의사 40 - 동요 48 민건이 사건 53 - 26개월 사내아이 사망 53 - 전원 56 10장. 응급의료만 생각 63 환자 중심의 체계 63 이상주의자 69 직위 74 - 공명심(功名心) 74 - 공무원 신분 포기 79 -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승진 84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87 11장. 헌신 93 사명 93 지독한 책임의식 96 에비던스(evidence) 102 추진력 108 윤한덕의 하루 111 낡은 간이침대와 신발 119 하루 19시간 근무 127 번아웃(burnout) 131 사직, 백의종군 139 4부. 생(生)과 사(死) 148 12장. 인간 윤한덕 149 가족 150 - 자상한 아버지 150 - 못다 한 효도 156 - 가족 여행 160 - 취미 164 선·후배, 동료 167 - 솔선수범 167 - 청렴 172 - 배려 175 - 근검절약 179 13장. 일상의 고민 182 ‘의사’라는 직업 182 병원과 경영 186 공무원 190 14장. 죽음, 그 이후 196 죽음 196 이국종의 평가 202 각종 상 수상 211 국가유공자 지정 218 마지막 과업 225 의료전달체계의 꿈 229 부활 232 에필로그 236 참고문헌 243

본문인용

“따르릉~”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2019년 봄, 평소 알고 지냈던 허탁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허탁은 윤한덕의 레지던트 동기였다. “윤한덕이 알지?” “예, 참 안 됐던데요…….” “그 친구 대단한 친구이거든. 응급의료에서는 영웅이야! 그래서 말인데, 윤한덕 평전을 쓰려고 하는데 평전 잘 쓸 사람 혹시 있을까?” 나는 글을 쓰는 일을 25년 넘게 해왔다. 윤한덕과도 인연이 있었다. 윤한덕, 허탁과 함께 2009년 겨울 중앙응급의료센터 앞에서 간단히 술 한 잔을 나눈 적도 있었다. 윤한덕이 전남대병원 레지던트일 때 나는 그를 자주 봤다. 하지만 업무적으로 잠깐 마주쳤을 뿐 스치며 지나가던 사이였다. 윤한덕은 응급실을 담당한 의사, 나는 병원 출입기자로 으레 수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그와 알게 된 인연은 오래였지만 각자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윤한덕은 응급의료의 길로, 나는 기자로 각자의 길을 갔다. 허탁이 윤한덕 평전 작가를 찾는다고 해 나름대로 괜찮은 작가를 소개해야 할 것 같았다. 소위 ‘글쟁이’로 알려진 사람들을 이리저리 찾아보고 연락했다. 그런데 선뜻 써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 일이 바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평전 작업에 전념할 수 없어 거절 의사를 보였다. 몇몇 작가들과 통화해보고 생각했다. ‘나만큼 윤한덕과 인연이 깊은 사람은 없지 않나?’ 피상적으로 알았던 윤한덕의 살아온 과정을 언론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사명감, 책임의식, 헌신, 배려, 열정, 청렴 등등 ……. 얼핏 살펴본 그의 삶은 위인의 삶, 그 이상이었다. 그의 숨겨진 의로움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나는 윤한덕 주위 사람들을 많이 알았고 그와 인연도 있었다. 내가 직접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허탁에게 바로 전화했다. “작가를 찾아봤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평전을 쓰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윤한덕의 고향인 전라도까지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괜찮다면 제가 한번 해볼까요?” “아, 그래, 좋지! 나도 사실은 자네를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네.” 윤한덕 평전 작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윤한덕 평전을 쓰기로 한 이후 그를 잘 아는 지인들에게 전화 몇 통을 돌렸다. 그러자 윤한덕과 지내왔던 이야기보따리를 술술 풀어냈다. 내가 아는 사람들만 취재해도 윤한덕의 살아온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윤한덕의 발자취를 찾을수록 관련된 자료가 별로 없어 한계에 부딪혔다. 윤한덕은 매사 정확하고 꼼꼼한 스타일이었지만 자신을 거의 외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이룬 응급의료의 치적, 대한민국 의료를 발전시킨 그의 행적은 거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윤한덕은 전남대 의대 동문과도 담을 쌓을 정도로 왕래가 없었다. 그가 소속돼 있는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는 각 병원의 응급의료 관련 평가를 주로 하는 곳이다. 오해를 받기 싫어 아예 친구들과 만남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혈연이나 지연 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업무로만 판단했다. 대학 동문 사이에서도 업무 외에 최근 윤한덕을 만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90여 명과 인터뷰하며 그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뛰었다. 자료조사, 탐문, 인터뷰한 내용을 조각조각 꿰맞췄다. 이렇게 10개월에 걸친 작업으로 윤한덕의 행적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지만 짧은 시간에 그의 50년 인생을 다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석해균 선장을 살려 아덴만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던 외과 의사 이국종도 윤한덕을 영웅으로 생각했다. 윤한덕 만한 의사는 대한민국 10만 의사 중 찾아보기 힘들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이국종의 진정 어린 마음이었다. 과장되지도 않았다. 의사로서 윤한덕의 삶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공론화됐다. 윤한덕의 모교인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총동창회가 나섰다. 윤한덕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사업과 평전 작업에 착수했다. 그중 하나로 윤한덕의 죽음 1주기에 맞춰 『의사 윤한덕』이 세상에 나왔다. 『의사 윤한덕』은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그의 몸은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에 길이 남았다.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응급의료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공이 컸다. 평전 작업을 하면서 관련 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민영주 여사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자식을 잃은 아픔에도 아들의 살아온 과정을 담담하게, 어떤 때는 슬픔에 잠기면서도, 끝까지 이야기해 준 윤한덕 센터장의 어머니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윤한덕과 관련해 평전 작업 제안을 한 허탁 교수와 바쁜 가운데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평전 출간을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여주신 양한모 전남대 의대 총동창회 회장과 회원, 윤한덕 추모위원회 서해현 위원장을 비롯한 추모위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서평

2019년 2월 4일. 민족의 대명절 설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다. 민영주는 남편과 사흘째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설 명절을 맞아 시댁이 있는 광주로 떠나야 하는데, 남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워낙 바쁜 사람이어서 평상시에도 남편과 잘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자 카카오톡을 보냈다. 이것도 읽지 않아 답답했다. 고향으로 출발할 시간이 늦어질 것도 염려됐다. 남편 윤한덕의 근무지인 국립중앙의료원에 찾아가기로 했다. 오후 4시 30분경 집을 나서 남편 병원으로 향했다.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바쁜 일이 많아 연락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오후 5시 30분경 병원에 도착하니 하늘은 어두컴컴해졌다. 민영주는 평소 병원은 가끔 갔지만, 남편이 늘 마중 나와 사무실 안까지는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남편 사무실은 병원 본관 건물에서 떨어진 오래된 벽돌 건물에 있었다는 것만 대충 알고 있었다. 본관은 진료를 보는 곳이고 남편 사무실은 행정 만을 보는 2층 벽돌로 쌓아진 독립 건물이라고 남편에게 들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지만 2층 벽돌 건물을 찾아 불이 켜진 곳만 관심 있게 살펴봤다. 빨간 벽돌 건물의 중간 정도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라는 푯말이 보였다. 그곳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마침 바로 옆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어 그곳을 방문했다. 여직원이 있어 ‘윤한덕 센터장의 부인’이라며 남편 연락이 안 돼 찾아왔지만, 사무실 문이 잠겨 있다고 말했다. 여직원은 비밀번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중앙응급의료센터 상황실을 통해 사무실의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문을 열었다. 여직원은 2층에 센터장의 집무실이 있다고 알려주면서 1층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영주는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두컴컴했으며, 올라가는데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영주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적막만이 흐르는 조용한 행정동의 계단을 홀로 밟을 때 내는 소리가 왠지 으스스했다. 2층 사무실에는 살짝 문이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인기척은 없었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아~악!” 설날 연휴 조용한 행정동에 민영주의 날카로운 비명이 적막을 갈랐다. 민영주는 문을 연 순간, 남편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러닝셔츠만 걸치고 코에서는 피를 흘린 상태였다. 바닥에는 젖은 피가 선홍색이 아니라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른쪽 목 쪽 핏줄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영주는 숨이 막히고 정신이 혼미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영주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한눈에 봐도 남편이 숨진 지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남편을 살리기엔 너무 늦은 상태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남편의 부어오른 배와 팔, 다리를 만지며 “어떡해, 어떡해!”라는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아! 남편의 삶이 이렇게 끝난 건가…….’ 남편이 너무 안쓰러웠다. ‘내가 조금만 더 잘해줄걸…….’ 그러면서 남편을 꼭 껴안았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이성으로 사랑했던 사람, 한덕을 이제 안아주지 않으면 언제 다시 안을 수 있을지 몰랐다. 영주는 남편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기댔다. 그리고 더 세게 안았다. 마음은 남편을 놓고 싶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동안 살아왔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꽃다운 나이 20세 때 남편을 만나 30여 년 동안 살아왔던 지난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삶은 한 번뿐이라고,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던 남편이 떠올랐다. 어느 곳인지는 모르지만, 남편이 다시 태어나서 이번 삶보다 더 멋진 또 다른 여행을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마 그곳에서도 남편은, 더 나은 세상을,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라고……. 정신을 서서히 되찾으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암담했다. 아이들한테는 이를 어떻게 말하지? 군대에 가 있는 큰아들 형찬이와 고등학생이 되는 작은아들 형우에게 아빠의 죽음을 말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 후 검안의가 들어왔다. 남편의 임종 사실을 확인했다. 부분부분 손발의 괴사가 진행된 것으로 미뤄볼 때 하루나 이틀 정도 지난 것으로 추정했다. 주말 내내 연락이 되지 않은 윤한덕은 집무실 책상에서 앉은 자세로 숨졌다. 그의 나이 만 51세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윤한덕의 부검결과 고도의 관상동맥 경화에 따른 급성심장사라고 소견을 냈다. 누적된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판단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일생을 헌신과 봉사로 점철했던 윤한덕은 이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 어느 선진국보다 더 나은 응급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꿈꾸었다. 윤한덕은 모든 응급환자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다. 그는 비록 떠났지만, 그의 업적은 이 땅 대한민국 곳곳에 흔적처럼 남아 있다. 윤한덕은 대한민국 응급의료시스템을 만들었다. 25년을 거의 홀로 분투하며 응급환자를 위한 응급의료시스템 구축과 운영에 매달렸다. 응급의료시스템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 기여를 많이 한 의사였다. 응급의료의 성공을 위해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도와 법령, 그리고 예산을 조금씩 끌어 올렸다. 응급의료정책을 만들기 위한 행정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윤한덕밖에 없었다. 응급의료를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해 뒤지지 않을 정도로, 짧은 기간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 과정은 험난했다. 부처 간, 병원 간, 개인 간 이기주의로 인해 그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좌절도 많이 했다. 갈등은 대한민국의 응급의료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굽힐 수 없었다. 자신이 믿는 응급의료의 발전을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2002년부터 국립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에서 응급의료 정책지원 업무를 총괄했다. 환자 중심의 응급의료서비스를 구축했다. 응급의료정책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환자와 관련한 통일된 데이터베이스(DB)가 없었다. 의학은 과학이라고 생각한 그는, 응급환자의 통계와 데이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것이 응급의료의 초석을 다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응급진료정보망(National Emergency Department Information System, NEDIS)을 만들었다. 환자의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시스템이었다. 근거 기반 응급의료정책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이를 근거로 응급의료기관을 평가했다. 평가 이후 병원에 당근과 채찍을 주며 응급환자 치료에 매진하도록 했다. 중증 외상 환자가 신속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권역외상센터를 기획해 마련했다. 신속한 응급환자 이송을 위해 응급의료 전용헬기 이른바 닥터헬기를 도입했다. 재난 및 다수사상자 사고 발생 시 신속한 의료지원을 위해 재난‧응급의료상황실을 만들었다. 상황이 발생하면 윤한덕은 항상 24시간 응급상황을 지켜봤다. 응급환자를 이송하는 119 구급대원을 대상으로 현장 교육을 했다. 이송 중 구급대원의 응급처치 능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구급 대원뿐 아니라 일반인도 응급처치를 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윤한덕은 이 일들을 달성하기 위해 밤새는 날이 많았다. 낮에는 회의와 일상 업무를 봤다. 밤에는 밀린 결재를 하고 관련 자료 등을 검토하고 만들었다. 머리에는 온통 응급의료 생각밖에 없었다. 하루 19시간을 근무했다. 응급의료 발전을 위해 25년을 이렇게 살아왔다. 거의 모든 삶을 환자를 위해 바쳤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병원 안에서, 삶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곳에서, 혼자 외롭게 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1월 1일 윤한덕의 아들 윤형찬과 함께 서울 아차산 해맞이 산행을 한 뒤 2019년 그해 가장 가슴 아픈 죽음으로 ‘윤한덕의 사망’을 꼽았다. 그해 가장 가슴 아픈 죽음이었다. 故 윤한덕 센터장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어 다행이다. 유공자 지정을 한다고 해서 유족들의 슬픔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국가로서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앉은 상태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윤한덕의 집무실에는 고민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응급의료 발전을 위한 보고서 작성 초안이 놓여 있었다. 설 연휴 이후 국립중앙의료원장에게 보고할 중앙응급의료센터 조직개편과 응급의료 발전을 다룬 서류였다.

저자소개

저자 : 김연욱
26년 동안 글을 썼다. 저서는 『오늘, 희망을 쓰다』 등 6권이 있지만, 만족을 못 한다. 대통령 연설문을 다듬고 기록으로 남겼다. 공공기관에서 임원을 하면서 정부 정책을 집행한 경험이 있어 정부 돌아가는 일은 약간 안다. 현재는 마이스터연구소 대표로 있으면서 장인, 명장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을 홍보하고 있다. 앞으로도 숨어 있는 진주 같은 장인 등을 발굴해 그들의 살아온 과정을 쓸 것이다.
서구 언론에서는 자리를 잡은, 실화를 묘사하고 표현하는 구조적 형식인‘내러티브(narrative)’방식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논픽션 스토리텔링을 추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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