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머메이드지로 감싸 노트를 한 권 만들었다. 또 비가 온다. 비가 오는 날엔 보라색이 좋다. 보라색 하니 떠오르는 방탄소년단, 그들은 ‘사랑해’를 ‘보라 해’라고 말하지. 끊임없이 비가 오니 생각도 추적인다. 노트에 이름을 쓸까 하다, 내 얼굴을 그려 보자,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엄마에게 얼굴을 그려서 보여 준 적이 있다. 다들 어김없이 자기 아니라며 연습을 더 하라는 둥 맘에 들지 않는다는 둥 말이 많았다. 어차피 핀잔 들을 거 나를 보고 그리자, 그 어떤 모습이건 모두 나인데,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어렵겠어?(아줌마, 나를 그리다 21쪽)
아주머니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속으로 적지않이 당황했다. 역시 옷이 문젠가.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호호, 네, 그래서 안 앉아요. 날도 더운데 더 더울까 봐요.” 다시 잘 보니, 몽당연필 선 같은 몸에 마침표 같은 눈을 한 아주머니. ‘비대하다’는 말은 ‘뚱뚱하다’를 피하려고 고르고 고른 말일 텐데, 왠지 웃음이 났다. 애 가졌냐고 하지 않은 게 어디야, 생각해 보니, 그럼, 나이가 있는데 망측하지 않냐 싶다. 그래도 나는 ‘비대하다’는 말보다 ‘뚱뚱하다’는 말이 더 편한데.(아카풀코에 대한 희망 30쪽)
인간사라는 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하고, 얽히고 꼬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오늘 종일 불린 병아리콩을 이제 에어프라이어에 구워서 남편, 아들과 함께 야식으로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다. 뭐, 그런 게 사는 거지 싶다. 엄마는 늘 이렇게 살아가는 편에 서 있다.(엄마와 병아리콩 54쪽)
오늘 시어머님이 끓여 주신 미역국을 먹었다. 너무 짜서 물 반 컵을 바로 부었다. 그래, 긴 시간이 지났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 토끼가 가끔은 곰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부디, 힘 빠지니 저렇게 맘대로구나, 생각하시지만 않았으면 싶다.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본다. 그래도 틈만 나면 피아노를 친다. 이루마의 〈너의 마음속엔 강이 흐른다〉를 친다. 문득 내게 호의적이기만 했던 세계가 순간 등을 돌린 듯했던 그때 그 시간으로 가본다. 아주 가끔은 그 시간 앞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기보다, 어느 동네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 그런 것들이 아무 의미 없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밤새 피운 모닥불이 따뜻하고 포근하던 그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산을 올라야겠다고 결심하던 그 순간이 보고프다. 참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참 별일이기도 하다, 나를 찾는다는 것. 나는 그를 만나 함께 잘살고 있는 것이 그래도 내가 한 일 가운데 제일 잘한 일이라 믿고 있다.(너의 마음속엔 강이 흐른다 63쪽)
린다가 ‘사랑할 대상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법의 보호 아래 가정을 지킬 수 있는 그대들’이라 한 대상에 나도 분명 속하리라. 지붕 아래 좁은 공간에서 안네 프랑크보다도 더 꼼짝하지 못하고 숨어 있던 린다가 나를 격려하며 말해 준다. ‘모든 게 다 잘되고 … 무사할 거라고, 무조건 그렇게 믿기를 잘했다. 언제나 의심하는 것보다는 믿는 게 낫다’고.(청바지 가랑이가 터진 날 83~84쪽)
내 가슴속에 뚫린 구멍이 이 상자의 구멍으로 연결돼 있는 건 아닐까? 그 구멍으로 얼핏 친구들과 술 한 잔을 즐기고 있는 아빠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어딘지 모르는 어딘가에서 아빠도 예전처럼 문 활짝 열어젖히며 “위대한 우리 딸!” 할 수는 없어도 이 구멍을 통해 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슴속의 구멍은 아물지 않겠지. 하지만 쓰임이 있구나. 바로 이거야. 구멍이 뚫린 상자 속 양 한 마리.(구멍 뚫린 상자 속 양 한 마리 117쪽)
또, 아날로그 복제품인 책을 디지털 자료로 옮기는 일엔 그 작업에 동원되는 육체노동자들의 존재가 필수라고 한다. 아나소피 스프링어와 에티엔 튀르팽이 엮은 『도서관 환상들』에서 읽은 말이다.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대도 디지털 프로세스 안에는 언제나 익명의 누군가가 존재한다…. 구시대적이고 기꺼이 고독한 책이라는 영역만큼 의도적으로 지워진 인간 존재에 대한 증거가 슬프고도 아름답게 남을 수 있는 곳이 과연 있을까?’(책에도 운명이 있다 141쪽)
그러다 비로소 알았다. 내가 피곤하게 해야 했던 그 많은 일들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한다는 걸. 여자, 엄마, 아내, 며느리 그리고 신앙의 이름으로 떠맡았던 일들이었다는 걸. 나는 결국 번아웃이 되었고 공부도 일도 모두 멈췄다.(일이 너무 하고 싶어요 174쪽)
나는 오늘도 혼자 공부한다, 폴 세잔처럼. 물론 그처럼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는 역량도 그럴 목표도 없지만. 여름 끝자락 불던 후텁지근한 바람에 흔들리는 연꽃 아래 지나간 시간 흔적처럼 꽃잎 그림자를 슬쩍 더해보기도 하고 4월, 흔들리는 목련 가지 위에 다른 빛으로 반짝이는 꽃을 올려놔 보기도 한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남편이 그림을 보고 이건 뭐냐고 물어 온다. 그 순간의 기쁨은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한 줄 글로 남긴다.(폴 세잔처럼 185쪽)
크고 작은 폭력, 보이지 않는 경쟁이 여전한 세상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는 내 아이에게 나는 “너의 삶을 살아라”라고 신념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 꼭 말해 주고 싶다. 방법은 여전히 잘 몰라도 그리 사는 것만이 행복한 거라고.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단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에 대해 생각하느라 책 붙들고 끙끙거린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할머니 담배 ‘태던’ 시절에 대하여 211~212쪽)
요즘은 모두 한결같이 화가 나 있다. ‘성난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면 오히려 분노가 커질 수 있다’고 『모두 거짓말을 한다』의 저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말한다. 난 그냥 아줌만데, 평범한 주부인데, 이 와중에 화내지 않고 뭘 어떻게 해야 좀 창의적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경멸’과 ‘증오’를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까?(경멸과 증오가 유산이 되지 않게 220쪽)
웃으시며 메뚜기가 이마를 쓰는 모습을 흉내 내던 할머니의 손짓이 너무 재밌어서 우리 셋은 깔깔 웃다가 아빠, 엄마한테 얼른 자라는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 할머니, 할아버지를 때리던 버릇없는 아들이 궁금해서 할머니께 조잘조잘 묻기 바빴다.(할머니의 옛날이야기 223쪽)
그 별빛을 바라보듯 나는 꽃을 그린다. 화분이나 화병의 것이 아니라 산에 핀, 밤에 핀, 무리 지어 흐드러지게 핀 꽃을. 지금은 사라진 그 꽃을 그리며 별빛을 보듯 기억한다. 나는 비로소 이별의 슬픔을 바라본다.(꽃, 별 그리고 나의 멜랑콜리 2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