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의 할아버지 루이 15세가 1770년에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하도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뒷걸음질 쳐야 했다. 그 후 계속해서 나랏빚이 늘어나고 재정이 허약해졌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영국에 반란을 일으킨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을 지원하면서 적자가 늘었다. 거기에 흉년과 산업의 위기가 겹쳐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1789년 1월에는 강력한 군주정이 그렇게 급격하게 무너질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완전히 익어서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과실처럼 ‘구체제’가 낡아빠졌다고 보고 싶어 안달인 역사가의 상투적인 표현을 경계하자. (16~17쪽)
1791년 6월 21일, 루이 16세와 가족은 한밤에 파리를 떠나 반혁명가로 알려진 부이예 장군이 주둔하고 있는 몽메디로 향했다. 그는 세심히 도주 준비를 했지만, 거의 막판에 운도 나쁘고 결단력도 부족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아마 부이예 장군의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국회의원 일부는 도주가 아니라 납치라고 했지만, 어쨌든 이 사건 때문에 나라가 크게 흔들렸다. 단 며칠 만에 그 소식이 방방곡곡에 퍼졌고, 사람들은 내전의 고통과 반혁명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즉시 격렬히 반응하고 나흘에 걸쳐 왕을 파리로 데려갔다. 그러는 동안 정치투쟁은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공권력에 맞서다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다. 일주일은 놀라운 모험으로 끝나지 않고 프랑스 역사를 바꾸었다. (28쪽)
1792년 여름은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 프랑스가 군주정과 근본적으로 결별하는 시기다. 1789년부터 자리 잡은 의회군주정/입헌군주정은 8월 10일의 반란으로 휩쓸렸다. 적군이 북방을 침입하고 파리를 직접 위협하던 때였다. 정치권력의 빈자리가 생기고, 정변을 조직한 반란 코뮌/혁명 코뮌이 입법의회에 남아 있는 의원들, 대신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새 의회인 국민공회를 소집해서 새로운 체제, 이 경우 공화국을 세우도록 할 책임이 있었다. 8월 10일은 적대적인 세력들의 장기적 힘겨루기가 마침내 정점을 찍은 날이었다. 왕은 반란군에게 맞설 수 있는 병력을 주위에 모아놓고 있었다. 그날은 혼란스럽게 흘러갔다. 왕과 의원들은 각자 복잡한 정치적 속셈을 품은 채 상황에 대처했고, 격돌과 학살로 1,000명 이상이 숨진 하루였다. (34쪽)
1793년 1월 21일, 왕의 처형은 혁명과 프랑스 역사에서 중대 전환점이다. 많은 사람이 종종 확신하는 바와 달리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1792년 8월 10일, 입법의회 의원들은 왕과 가족을 환영했다. 그들은 무기가 그날의 운명을 결정해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뤽상부르 궁에 왕과 가족을 정착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상퀼로트, 아니 자코뱅파는 불편한 옛날 건물인 탕플 탑에 감옥을 마련하자고 강력히 주장하고, 왕을 빨리 죽이지 못했으므로 재판이라도 하자고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상퀼로트를 지지했을 때, 마라처럼 왕에게 가장 적대적인 자코뱅파는 거의 두 달 동안 국민공회 의원들이 판사 노릇을 할 재판을 조직했다. 거리에서 국민공회를 압박하는데도 확실한 평결을 내리지 못했다.
국민공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왕의 책임을 고소했다. 그러나 책략적이건, 아니면 외국 통치자들과 협상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건, 또는 사형을 거부하기 위해서건, 의원의 절반이 왕의 사형을 바라지 않았다. 모든 자코뱅파 의원과 수많은 평원파 의원에 30명 정도의 지롱드파 의원을 더한 나머지 반은 왕의 사형에 찬성했다. (40쪽)
혁명의 역사에서 전쟁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은 혁명을 촉진하고 급진화하고 변화시켜 국민의 운명과 같이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 덕에 프랑스인은 나폴레옹 원정을 준비할 수 있었고, 먼 훗날 제3공화국이 1914년에 1794년의 추억을 동원할 수 있었다. 사실 전쟁과 혁명은 더 깊이 연결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은 아메리카 독립전쟁으로 갈등을 빚으며 혼란스러웠는데, 당시 프랑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89년 직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고, 1787년에 네덜란드에서 혁명을 저지한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를 나눠 가졌다. (중략)
전쟁 초기 불확실하고 급변하는 상황을 겪었지만, 혁명이 유럽의 열강들을 상대로 승리했다. 특히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원정에 성공한 덕택이었다. 보나파르트는 이집트 원정을 시도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1799년 프랑스 군대는 서부와 남서부의 왕당파까지 가세한 유럽 동맹과 싸워 다시 승리했고, 혁명으로 탄생한 군대를 중심으로 국민통합을 이루었다. (72쪽)
19세기 초, 클라우제비츠Clausewitz는 혁명전쟁으로 불거진 단절을 강조하면서 ‘절대적 전쟁’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모호하고 이념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므로 마구 써서는 안 된다. 몇십 년 동안 혁명기 10년간에 일어난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잔인’과 ‘전면전’의 개념을 적용했다. 한편 1930년대 이후에는 혁명의 군대를 소련 군대의 선구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중략) 혁명전쟁은 전에 없이 강도가 높았다는 이유보다는 전에 볼 수 없을 만큼 이념적인 성격이 짙기 때문에 최초의 전면전이라 할 수 있다. 공화국은 유럽에 공화국 원리를 강요하고 무력으로 그 체제를 심기만을 원했으며, 그 이유만으로 유럽과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78쪽)
로베스피에르, 공포정, 단두대(또는 기요틴)는 혁명의 성격을 말해주는 세 요소다. 그러나 목을 치는 기계, 정치적 폭력, 본보기가 될 만한 혁명가의 모습으로 혁명을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차라리 우리는 단두대의 발명을 시대적 맥락에 놓고, 혁명가들의 정치적 적대관계가 어떻게 전국에서, 특히 파리에서 탄압을 시작하게 만들고 그 위험성을 극대화했는지, 또 로베스피에르가 어떻게 ‘공포정’을 발명한 괴물이 되었는지 설명해주는 사실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82쪽)
프랑스 혁명사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을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막강한 인간을 어떻게 아침에 고소하고, 저녁에 옥에 가두고, 이튿날 처형할 수 있었을까? 1794년 7월 27일, 공화력 2년 테르미도르 9일에 적대진영이 분명히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원들은 막연히 맞서다가 우연히 전환점을 맞이했다. 한 달 뒤부터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을 실시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고, 모든 역사는 그것을 받아 적었으며, 그렇게 해서 공포정치가 로베스피에르의 암울한 전설이 생겼다. 당시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에 ‘공포정’을 실시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그의 적들, 이른바 ‘테르미도르 반동파’는 로베스피에르를 괴물로 만들면서 보르도·리옹·마르세유 같은 곳에서 자행한 학살의 책임을 벗어버렸다. 게다가 우리는 로베스피에르가 추진한 정책이 이러한 상황을 허용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정책은 의도를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발전했다. 그는 상퀼로트와 당통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역할을 맡았고, 그와 친구들이 권력을 손아귀에 넣으면서 사람들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주었다. 국민공회의 다수 의원들은 로베스피에르의 야망과 목표 때문에 더 큰 원한과 두려움을 키웠다. 그래서 그들은 에베르와 당통을 제거했듯이 로베스피에르도 제거했다. 탈리엥은 로베스피에르가 1792~1974년 공포정의 원흉이라고 비난했고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도 추가해야 한다. 우리는 줄곧 이러한 유산에 기대어 살고 있다. (86쪽)
21세기에도 방데의 전쟁을 둘러싼 논쟁은 그칠 줄 모른다. 자료의 신빙성 문제와 함께 증거도 불충분하기 때문에 사실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1793년 3월부터 공화국은 방데의 위협과 공화파의 승리를 과장해서 선전했고, 1795년 이후에는 로베스피에르와 상퀼로트에게 모든 탄압의 책임을 씌웠다. 게다가 당시에도 방데는 유럽 전역에서 유명해졌고, 정치가·소설가·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1815년 이후 왕정복고와 함께 왕당파는 수많은 기념건축물·그림·책·소책자는 물론 종교행사·기념식·스테인드글라스를 이용해서 방데의 희생을 선전하기 바빴다. 더욱이 공화파와 왕당파 저자들은 연구와 사회운동의 성격을 동시에 표현하는 저작을 수만 쪽 이상 발간했다. 방데는 다른 모습의 프랑스 역사를 구현했다. 20세기에 방데를 옹호하는 역사가 경쟁상대를 대체했다. ‘퓌 뒤 푸Puy du Fou’[역사공원]의 성공과 혁명 200주년의 논쟁으로 항상 프랑스 국민성의 핵심에 남아 있는, 결코 잊지 못하는 기억을 둘러싼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92쪽)
혁명기 10년의 역사에서 반혁명의 자리는 작기만 하다. 1799년 보나파르트가 혁명을 슬쩍하기 전까지 혁명에 반대하는 시도는 사실상 실패했다. 1814년에 반혁명이 승리했다 해도 1830년경에 사라질 때까지 언제 뒤집힐지 몰랐다. 그것은 1788년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권층’이 모든 개혁을 막고 왕에게 전국신분회 선거에서 제3신분과 하위직 종교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하도록 이끌면서 1789년 봄의 위기를 불렀기 때문이다. 1790년 말, ‘반혁명가’라는 말이 ‘혁명가’라는 말보다 먼저 생겼다. 물론 정확한 뜻을 갖지는 못했지만, 궤도를 이탈해서 혁명가들의 정치투쟁에도 등장했다. 그것은 상징인가? 1789년부터 청색·백색·적색은 ‘혁명’을 나타냈고, 혁명의 적들은 반혁명을 절대군주정의 백색이나 아르투아 백작의 녹색뿐 아니라 흑색과도 연결 지었다. 망명객들의 활동, 반혁명의 불확실한 성격, 투쟁의 패배는 우리가 추적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단계다. (100쪽)
반혁명을 지칭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1789년부터 망명한 사람들은 1790년과 1791년에 프랑스에서 나온 모든 조치를 인정했다는 이유로 프로방스 백작처럼 1791년 여름의 바렌 사건 이후에 도착한 망명자들을 환대하지 않았다. 1792년부터 1794년까지 ‘반혁명’은 프랑스의 모든 정치집단이 적의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쓰는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지롱드파를 가면을 쓴 반혁명 집단으로 생각하는 측과 온건한 혁명가로 생각하는 측이 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지롱드파가 1789년부터 1792년까지 자코뱅파였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102쪽)
혁명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모범이며 진보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는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고 비판했다.
1789년 바스티유 요새 정복을 기뻐한 독일의 사상가 두 명의 반응은 유명하다.
먼저 헤겔의 말이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인간은 머리로 걷는다.”
혁명은 사상을 맨 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거꾸로 말했다.
그리고 헤겔은 ‘공포정’을 세계사에 필수적인 ‘부정성négativité’으로 이해했다. 횔덜린은 혁명을 마치 별들이 두 개의 중심을 도는 타원궤도를 회전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두 중심은 반드시 필요하고 떼어놓을 수 없다. 하나는 부정négation이며, 다른 하나도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시간에 따라 번갈아 중심 노릇을 한다. (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