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를 위해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첫 출근을 하는 날 결심한 게 있다. '공직에 나가 있는 3년 동안 내가 경험하는 일들을 모두 기록할 것이다. 내 경험을 그저 개인의 기억 속에 두지 않을 것이다. 기록하고 또 기록해 내 경험을 역사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 고위 공직에 출사하는 사람의 태도다.' 나는 이 결심을 임기 내내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가끔 피곤하고 지겨울 때도 있었지만 이 기록만큼은 일상 습관으로 확고히 만들었다. 집으로 퇴근하면 첫 번째 일은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늦게 귀가하면 다음날 새벽 어제 있었던 일을 반추하면서 기록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3년 1개월 동안 200자 원고지 6,000장 정도를 썼다. 실로 방대한 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면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다. 쓴 사람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난 3년간 나는 인권위의 사관(史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록 속에는 3년간 내 경험이 모두 담겨 있다. 내가 직접 다룬 사건의 내막, 내가 쓴 결정문 중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들의 내용, 인권위 내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에피소드, 인권위 사람들에 대한 평가 등등. 후일 이 기록은 분명 그 자체만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있는 문서로 평가받을 것이다. 만일 내가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다면 인권위의 공적 기록물은 남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에 대한 그 이면 이야기는 인권위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변함없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_「책을 열며」, 5~6쪽
어제는 종일 피로한 하루였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내가 존경하는 고 박원순 시장의 비위를 판단하는 시간. 수개월 간 이어졌던 이 사건의 특조단 조사가 끝나고 지난해 말 차별시정위에서 1차 심의를 마친 안건이 전원위에서 최종 논의된 것이다. 이 안건 논의를 위해 몇 날 며칠을 생각했다. 어떤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어떤 결론을 내야 하는가? 나는 회의 모두에 이런 말을 했다.
“박원순은 누구나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회운동가, 인권변호사 출신의 4선 서울시장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고인이 되어 우리 앞에서 오늘 판단을 받습니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순간, 인권위의 사명과 역할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인권위는 인권신장을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으로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대상이 어떤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 있다고 해도 공정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고인의 공적과 과오의 구별은 엄격해야 합니다. 공이 과를 가릴 수 없고, 과 또한 공을 가리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국민들의 인권위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고자 합니다.” _「2장 인권침해 피해자의 절규에 응답하다」, 32쪽
내 임기 중 가장 중요한 정책 사안은 「차별금지법」, 곧 「평등법」 의견표명이었다고 생각한다.인권위는 2006년 처음으로 포괄적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평등법」 제정을 관련 기관에 권고했다. 이 권고는 다른 법률 권고와 달리 인권위가 오랜 기간 연구를 통해 법안의 초안을 만들어서 권고(의견표명)하는 것이라 인권위 입장에서는 많은 공력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비록 2006년의 권고가 바로 효과를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에 대해 우리 사회에 화두를 던진 것은 분명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국회에 법안이 제출되었는데 모두 인권위 권고에 토대를 두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2006년의 작업은 내가 실무책임자로 일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상임위원으로 들어가자마자 이 일을 다시 한번 하게 됐다. 2006년 당시 나와 함께 일했던 최영애 상임위원을 이제는 위원장으로 만났던 터라 인권위에 출근하고 나서 며칠 후 최 위원장은 「차별금지법」 시즌2를 시작한다고 하면서 거기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 그렇게 해서 차별 분야 업무를 맡고 있는 정문자 위원과 함께 준비팀에 참여했다. _「3장 인권보호를 위한 그물망」, 111~112쪽
나는 군인권보호관 준비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평소 나와 위원장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두 사람이 갈등한다는 것은 정말 원치 않는 일이었다. 나는 송 위원장을 오랜 기간 법조 선배로 존경해왔고, 인권을 대하는 방향성에서도 큰 차이가 없다고 믿어 왔다. 때문에 내 임기 동안 위원장과 좋은 팀워크를 만들어 그 어떤 시기보다 진보적인 인권위를 만들어 나가야겠다고 결심해온 터다.
그런데 군인권보호관 출범을 준비하면서 위원장과 나 사이에 의견이 자꾸 엇갈리는 것 같아 심적 부담이 커져만 갔다. 내 신념은 비록 합의제 기구인 인권위에 군인권보호관이 들어왔지만 입법 취지에 맞춰 기민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내부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군인권보호국을 군인권보호관이 직접 지휘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위원장과 사무처는 기존 위원장의 사무처 지휘권에 예외를 인정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좋은 운영 체제를 만들려 했지만 아쉽게도 위원장과 사무처 간부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_「4장 군대에 간 젊은이들을 위하여」, 177~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