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이다. 오래 품어온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했다. 내가 겪은 일들이 감히 나 혼자서만 간직할 수 있는 사유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공의 영역에서 경험한 나의 일들은 모두가 알고,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의 공공재였다. (중략) 글과 말이 사라진 공간에 편리한 망각과 구태의 실수가 반복되는 일상을 막기 위해 써 내려간 반성문이다. (중략) 정치인 안희정은 나의 우상이었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줄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기록들을 찾아 모으고, 활자화했다. 먼지를 털어내고 꺼내 든 기록 속에는 안희정과 함께 어떤 세상을 꿈꾸었는지, 왜 우리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담겨 있었다. ‘간절히 소망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요즘 문상철 씨가 써주는 보고서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상철 씨! 고생해줘서 고맙습니다.” 짧은 소개였지만, 안 지사가 공개적인 신뢰를 내게 보이자 다른 정무직 선배들 역시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정무직들의 커뮤니티 밴드에 처음 초대되었다. 입사 후 수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밴드에는 안 지사의 평소 고민을 담은 글도 있었고, 다양한 모임의 공지성 글들도 많았다. 그들만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들어가며 드디어 내부자가 되었다. 권력은 결국 권력자와의 가까운 거리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 1장 〈정치의 시작: 정치 초보, 꿈에 뛰어들다〉 중에서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자 새롭게 접한 안희정 조직의 문화들이 많았다. 도청에 출입하는 기자들은 안 지사 참모 그룹의 특징을 보며 80년대 동아리 조직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학생운동과 선거로 철저하게 검증된 친분 관계, 술로 매일매일 서로를 확인하는 음주 문화, 그리고 조직 구성원의 문제는 철저히 감싸주고 외부에는 배타적인 문화들이 가장 대표적인 모습들이었다. ― 1장 〈정치의 시작: 정치 초보, 꿈에 뛰어들다〉 중에서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나와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나의 진짜 동지가 될 거야!”라는 말이 계속 뇌리를 떠돌았다. 그 공부를 내가 한번 기획해보고 싶었다. 참여정부의 지난 정책을 복기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배움이라니, 너무나 설레게 다가왔다. ‘대통령을 만드는 공부’라고 생각했다. 그 후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공부 계획을 홀로 세우기 시작했다. 참여정부의 장·차관, 비서관, 자문위원 명단을 구해 분야별로 나눠 그중 설화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골라냈다. 더불어 주요 일간지에 좋은 칼럼을 기고하는 전문가들을 찾아 이름과 소속, 전공을 적어 내려갔다. 이런 작업을 두 달에 걸쳐 하자 200여 명 가까운 강사 리스트가 준비되었다. 2012년 4월 4일, 공부할 분야와 세부 주제, 강사가 포함된 공부 계획안을 안 지사에게 보고했다. 안 지사는 매우 기뻐했다. ― 2장 〈정치의 본질: 함께 배우고 성장하다〉 중에서
안 지사가 도정 운영과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여론조사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도정에 대한 조사 결과는 도청 각 부서에 공유했지만, 정치 현안 또는 안 지사 개인 이미지에 대한 것들은 조사 회사에서 로데이터(raw data) 결과를 받는 즉시 추가로 분석해서 안 지사에게만 직접 보고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없었다. 정치권에는 ‘정치 컨설턴트’라는 명함으로 대통령을 만들어드리겠다며, 수시로 이런저런 제안을 해오는 컨설턴트들도 많았지만, 안 지사는 이미 수치화된 조사 결과를 조직 내부에서 받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다양한 제안에도 흔들림 없이 일관성 있는 메시지와 스탠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 2장 〈정치의 본질: 함께 배우고 성장하다〉 중에서
안 지사는 각 부서의 실·국장들이 행사나 정책을 지사의 의중과 다르게 잘못 진행했을 경우에도 직접적 질책보다 자신이 불편해하고 있다는 모습을 표정과 말투 등으로 수행비서에게 드러냈다. 수행비서가 대신 알아서 조치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중략) 지시는 미세하면서도 복잡했다. 결론적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걸 사전에 검토해서 정치인으로서는 더 돋보이고, 인간으로서는 더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지시였다. 단 티가 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었다. 더 많은 관심과 긴장이 요구됐다. (중략) 극도로 예민한 상태로 준비하는 일들은 대부분 잘 마무리되었고, 안 지사도 그런 업무 방식에 만족해했다. 안 지사 대신 화를 내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자신은 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렇듯 의전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서서히 병들어갔다. ― 3장 〈정치의 현실: 서서히 침식되다〉 중에서
안 지사는 시사에 약한 탓에 2016년 11월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농단 사태가 공론화되었을 때 사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국민들이 시위하는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했다. 따라서 추상적인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가 분노에 편승하면 안 된다’는 말만을 되뇌었다. (중략) 4년간의 치열한 국정 공부를 통해 큰 정책적 흐름을 파악했다고 믿은 안 지사에게 날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의 작은 일들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중략) 오랜 시간 지속된 대통령 공부는 안 지사에게 미래를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교만의 씨앗을 제공하였다. ― 4장 〈정치의 변질: 잠식되다〉 중에서
믿을 수 없었다. 안 지사에게 평소 여성 편력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성폭행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절규 섞인 목소리를 듣고 잠시 머뭇거리다 정신을 차렸다. (중략) 안희정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지난 7년여의 여정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나는 피해자보다 가해자와 더 가까운 사이였다. 평창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심장은 터져나갈 듯 요동쳤다. ― 5장 〈정치의 몰락: 마침내 붕괴되다〉 중에서
정치의 몰락으로 안희정이 꿈꾸던 세상은 사라졌다. 어쩌면 안희정의 몰락으로 정치가 망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안희정은 정치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가 시도했던 도전의 여정과 그리고 몰락의 과정에 대해 우리는 관심 가져야 한다. 그래야 부조리의 반복을 막고, 정치의 회생을 기대할 수 있다. 가해자 한 명의 잘못으로만 여겨서는 막을 수 없다. 왜 우상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정치의 몰락이 시작됐는지, 그리고 왜 이 사건을 접하고도 피해자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는지에 대해 함께 논의해야 한다. 구조적인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2, 제3의 안희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