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中
머문다는 건 그 모든 목적의 첫 걸음지다. 그곳을 떠올리면 그곳에 있지 않아도 잠시 고요해져 좋다. 오늘 당신의 사유 역시 그러했으면 좋겠다. -박상준
떠나면 떠날수록 익숙한 장소와 낯선 곳의 간극이 좁혀졌다. 오감과 감성이 동시에 깨어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송윤경
내가 겪었던 상황별 처방 장소이다. 내 일상이 아름답고 특별한 영감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오늘도 떠나본다. 조정희
17p
한참 만에 소요헌을 나와서는 맞은편 숲속 소대(巢臺)를 보며 걸었다. 소대는 산중에 비쭉 솟은 20.5m 높이의 기울어진 전망탑이다. 이 또한 알바로 시자의 작품이다. 기울어진 탑을 오르는 느낌은 꽤나 기묘해서, 동서남북의 풍경이 높아지며 나타날 때마다 계단참에서 걸음을 멈춘다. 소대는 새 둥지를 뜻하는 말이다. 그 속에서 나는 부화를 앞둔 작은 새알이 된다. 그러고 보니 소요헌으로 제비가 날아드는 것도, 제비집을 본 듯도 하다. 비워야 할 것은 무엇이고 품어 키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제 막 사유원의 첫 번째 공간을 보았을 뿐인데 두루뭉술한 생각의 질문이 소대처럼 집을 짓는다.
63p
바다 건너를 뒷산 가듯 산책하는 동네 주민도 있으니 그보다는 소담하고 다정하며 한가한 섬이다. 무턱대고 찾은 길이었다. 다행히 ‘안 잠김’ 시간이었고, 안 잠기는 시간 또한 넉넉하게 주어져 오늘 하루 제법 운이 좋구나 싶었다. 그래도 두 번 운 때를 시험하고 싶지는 않기에, 다음에는 물때를 맞춰 찾아야지. 진섬다리 콘크리트 바닥 위에 서서 ‘잠김 시간’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서서히 물이 차고 어느 시점을 지나면 내 뜻과 무관하게 ‘잠수’라는 걸 하게 되겠지? 가끔 ‘잠수 타고’ 싶을 때가 있다. 일과 관계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 세상에서 잠시만 잊히고 싶은 거. 길게는 말고 딱 회복할 수 있을 만큼의 침잠과 단절. 그러고 보니 물속에 ‘잠김’과 문이 ‘잠김’은 같은 단어다. 또한 잠금이 아닌 잠김이라서. 내 의지로는 좀체 실행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 역시.
p90
카페 바깥에 작은 정원과 야외 테이블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사람으로 넘치거나 지나치게 붐비지 않는다. 커피는 드리퍼나 모카 포트로 내리니 주문 후에는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그것을 불편함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너무 편리에 치우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편지가 그렇다. 굳이 펜을 쥐고 손끝에 힘을 주어 한 글자씩 적어 나아가야 하는 행위. 생각보다 느리게 펼쳐지는 말과 단어들, 한 문장을 쓰고 펜을 멈추고, 다시 떠올린 말들을 써나가는 그 막간의 틈새. 편지는 상대를 향해 쓰지만 끊임없이 내 감정을 멈춰 세우고는 속도를 조율해야 한다. 그러다 고개를 들면 창밖의 풍경 소리가 들린다.
118p
느슨해진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건물 옥상 계단에 앉았다. 소금 결정 같은 정육면체 구조물은 성인의 순교 정신인 ‘녹는 소금’을 상징한다. 녹는 소금이라…. 어른이 되기 전부터 돈을 벌어야 했던 내 삶은 녹지 않는 소금 같았다. 기계적으로 일하느라 늘 입 안에서는 짠맛이 나는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모든 것에 지친 날이면 상처 주는 말을 뱉었다가 담지 못해 후회하기도 했다. 계단에서 일어나 콘크리트 소금 모서리를 가만 만져봤다. 어느 것은 뾰족하고, 어느 것은 무뎠다. 너무도 견고해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콘크리트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뭉툭해졌다. 건축가가 생각한 녹는 소금은 실제로 녹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을 날카롭게 긁어 대던 소금 결정 위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146p
버튼은 많은데 설명문은 없어 담당자가 아니고선 조종하기 어려워 보인다. 문득 내 의지도 버튼 하나로 작동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음식 조절 버튼, 저건 좌절 금지 버튼, 요건 웃음 버튼. 작동 버튼 하나하나에 이름을 달아주다가 아날로그 방식이 떠올랐다. 스크린에 복잡한 수치와 그래프로 조건 값을 입력하고 적용하는 디지털 시대에, 딸깍, 하나의 기능을 가진 버튼 하나로 원하는 것을 작동시킬 수 있는 단순한 시대가 그리웠다. 크레인 조종실도 그렇다. 쓰레기가 타고 남은 재를 퍼서 매립장으로 반출하는 크레인이 있다. 조이스틱과 버튼 몇 개로 움직이는 동체가 허술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다. 삶도 너무 많은 수를 생각해서 어려운 건 아닐까. 가끔은 단순하게, 하나에 하나만 생각해도 살아가진다.
183p
주민들은 왜 반대하지 않았을까, 나는 궁금했다. 6·25전쟁 이후 유신 정권이 자리한 대한민국에서 일개 주민이 감히 나랏일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터였다. 살던 고향을 버리고 외지로 나갈 수 없는 경제 상황도 한몫했으리라. 소음이 우울증을 유발하고 우울은 결국 목숨을 스스로 내놓게 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건 요즘에나 통하는 상식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견디는 중인지도 모른 채 꾸역꾸역 견디고 있었을 테다. 50여 년이나 지난 후에야 참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중요한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참아 삼켰던 목소리를 정확한 곳에 내뱉었다. 2005년, 결국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폭격장을 폐쇄했다. 마침내 고요를 되찾았다.
193p
투박하고 거친 돌이 아름다운 경치가 되었듯이 투박한 일상과 거친 능력을 자꾸 다듬고 어루만지다 보면 내 삶도 하나의 조각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건강을 되찾아 업무에 복귀하신 엄마는 종종 일상 사진을 내게 보낸다. 더 열심히 약국 콘텐츠를 만들라는 뜻이다. 나의 사소함이 엄마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사소했던 나의 돌들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뿌듯함이 생긴다. 초라하지도 미약하지도 않다. 더 이상 그런 생각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기로 한다. 나의 사소함은 하나씩 모여들어 하나의 가치가 될 것이다.
231p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작품은 시대를 관통하는 화두를 던져준다.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에는 공간과 시간을 관통하는 사유의 틈이 있다. 채우고 채운 것들 사이의 틈이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다시 채우며 사유의 틈을 발견한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기능은 충실하게 지키면서, 미술관 사위의 자연이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 생각의 틈을 깨운다. 절제된 아름다움의 채움과 비움, 자연과의 조화로움은 빽빽하게만 채우는 것이 아닌 채움과 채움 사이의 틈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267p
아이들이 편안하게 신발 벗고 누워서 책을 읽고, 만지는 광경이 자연스럽다. 찾아오는 길이 아무리 까다로워도 이런 평온한 장면들이 그리워 이따금 이곳을 찾게 된다. 때로 시를 읽으며 공감하고, 시에게 위로받으며, 내 일상의 어둠을 조금씩 걷어내고는 했다. 이제 엄마는 건강을 회복했고, 다시 예전처럼 내게 농담을 건네신다. 가족의안녕에 마음속 조명이 켜진다. 이제 더 이상 어두운 감정을 달래기 위해 시를 찾지 않아도 괜찮다. 시가 주는 언어와 공간이 전하는 사유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떠난다. 어느 날은 나만의 쉼터, 또 어느 날은 아름다움을 탐닉하게 해주는 공간에서 오늘도 시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