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에서
내가 무언가를 기억할 만큼 자랐을 때 지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모래뿐이다. 초록별이었던 지구는 모래로 뒤덮인 황색별이 되어 버렸다.
_12쪽
모래 감기는 모래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생긴 병이다. 처음에는 감기 같지만, 어느 순간 고열이 올라오고 몸은 미라처럼 말라갔다. 마지막 숨을 뱉고 나면 몸은 모래처럼 부서져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남지 않았다. 우리 할머니도 바다의 엄마도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많은 사람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었다. _21쪽
“노아는 지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마지막으로 발사하는 우주선이다. 지구에 사는 동식물 표본을 옮기는 가장 거대한 구조선이지. 노아가 지구를 떠났다는 것은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구가 고칠 수 없을 만큼 엉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멸망이라니. 머릿속이 울렸다. 주변이 고요해진 가운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고 방송만이 소리를 질렀다. _29쪽
지구는 마녀의 수프처럼 끓다가 검게 타들어 갔다. 검은 별이 된 지구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에 가려진 것인지 아주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안아 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울어 버렸을 것이다.
2084년, 지구는 그렇게 멸망했다. _35쪽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달은 운석이 부딪친 구멍까지 숨김없이 내보였다. 옛날 사람들 눈에는 달 표면의 무늬가 토끼나 두꺼비처럼 보였다지만 내 눈에는 꼭 거인의 찡그린 얼굴처럼 보였다. _40쪽
환영 인사가 적힌 거대한 표지판 아래 입국 심사대가 있었다. 표지판에 그려진 달 토끼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밑에 서 있는 경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경찰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구인을 노려보았다. 지구인은 하나같이 여권과 복잡한 서류를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고 있었다. _49쪽
정식 비자를 받을 때까지 우리는 난민촌 안에서만 머무를 수 있었다. 난민을 가득 태운 셔틀이 하얀 고층 빌딩이 모여 있는 도시를 지나 한참을 더 달렸다. 크레이터라고 불리는 거대한 구덩이 사이로 밀입국을 시도하다 레이저 빔을 맞고 추락한 우주선들이 보였다. _55쪽
제1지구로 들어서자 곧 난민촌 입구가 나타났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난민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지구 난민을 받지 말라며 시위하는 수많은 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원래 부랑자나 도망자가 살던 구역이었다. 지금도 셔틀 승강장 오른편에 월인이 살고 있었고 왼편에는 난민촌이 있었다. 월인은 지구인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난민촌이 지어지면서 쫓겨난 사람도 있었고, 얼마 되지 않는 구호품마저 난민과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_56쪽
1년처럼 길게 느껴지던 한 달이 지나고 우리는 마침내 화성에 도착했다. 붉고 고요한 별처럼 보였는데 대기를 뚫고 들어가자 모래 폭풍이 불어왔다. 검은 별이 된 지구보다야 낫겠지만 썩 살기 좋은 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_87쪽
한참을 따라가니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동물 우리 같은 곳에 각양각색의 외계인이 가득했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외계인도 있고 오징어나 벌레처럼 생긴 외계인도 있었다. 창살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 대는 외계인도 있고 울고 있는 외계인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표식을 착용하고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스로 원해서 이곳에 온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 도마뱀은 시장에라도 온 것처럼 감옥 같은 우리 앞을 지나다니며 구경하고 가격을 흥정했다.
“엄마, 꼭 동물원 같아.” _108쪽
우리는 밖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창밖으로만 도시를 살펴볼 수 있었다. 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외출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비암은 핸드는 노예가 아니라고 했지만, 자유가 없다는 것도 돈으로 거래된다는 점도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_114쪽
주인은 내 머리를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는 나에게 마법의 차를 권하지 않았다. 나 역시 차를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차를 마시고 나면 행복한 기분은 잠시였고 쓸쓸한 기분은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_125쪽
하지만 냄새보다 더 괴로운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추위였다. 성에서 멀어질수록 점차 기온이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땀이 흘렀는데 이제는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왔다. 몸이 오들오들 떨려 왔다. 가방에서 옷을 전부 꺼내 입었는데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달에서 겪었던 추위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도마뱀족이 왜 죽음의 땅 근처에 가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_150쪽
어쩌면 우리가 꿈에서 본 풍경은 어느 다른 별이 아니라 되살아난 지구의 바다일지도 모른다고, 할아버지가 끝맺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맺었다. _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