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깊은 산속 외딴 마을의 빨강 여우 잔혹사!
초등학교 중·고학년 어린이들에게 문학의 향기를 일깨워주는 창작동화시리즈 ‘청개구리문고’의 45번째 작품인 『빨강 여우』가 출간되었다. 동화작가이자 아동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태봉 작가의 신작 장편동화다. 작가는 그동안 다양한 환상 기법을 활용해 소외된 아이의 일상이나 아동 학대 등 아이들을 둘러싼 현실 문제를 주로 담아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켜 왔다. 이번에 내놓은 『빨강 여우』는 깊은 산속 마을에서 여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동물 학대와 폭력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 나아가 동물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장편동화다. 한마디로 동물의 생존권과 아울러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라 하겠다.
■ 인간과 동물,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
이 장편동화는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과거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무렵의 깊은 산속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여우 사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이 흥미진지하게 전개되고 있다. 아울러 옛이야기의 여우 변신 모티프를 차용함으로써 여우와 인간이 함께 어우러진 삶을 구현해 보여준다. 곧 산속 마을에서 함께 살게 된 여우와 만주 할매 이야기가 중심서사를 이루고 있다.
만주 할매네 집에서 살고 있는 누렁이가 바로 둔갑한 여우다. 누렁이는 엄마 여우를 잃고 산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만주 할매를 만나 누렁개로 변신해 숨어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난이와 만주 할매를 통해 여우골에서 오래전에 벌어진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다. 바로 사라진 엄마 여우의 죽음과 그 죽음을 불러온 총잡이 아저씨의 비밀을 눈치 챈 것이다.
엄마 여우와 동생들이 총잡이 아저씨에 의해 무참히 목숨을 잃었고, 누렁이가 만주 할매와 함께 살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누렁이와 총잡이 아저씨 사이의 대결과 복수전이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화가 난 누렁이가 온갖 방법으로 총잡이 아저씨를 괴롭히며 엄마에 대한 복수를 벌이는 것이다.
여기서 누렁이가 멸종 위기에 처한 마지막 붉은여우라는 설정은 이 이야기에 좀더 깊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곳 산속 마을에서는 빨강여우로 불린다. 털이 유난히 붉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인간들에 의해 마녀화되고 무참히 희생되는 무고한 생명을 상징하고 있다. 난이 아빠 역시 사냥을 반대하다가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인간들은 여우 사냥을 벌여 이득을 취하지만 아무 죄 없는 여우는 생명을 잃고 만다. 그리고 여우는 멸종되기에 이르렀다. 누렁이네 가족이 그 증거인 셈이다. 이 동화에서 빨강 여우는 그러한 자연의 희생을 대변하는 동시에 잘못된 인간의 행태를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인 것이다. 총잡이 아저씨에 대한 누렁이의 분노는 개발이라는 명분하에 벌어진 자연 파괴와 동물 학대, 나아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경종인지도 모른다.
■ 빨강 여우, 폭력에 대한 은유들
이 동화는 우리 삶 속에서 되풀이되어 온 폭력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총잡이 아저씨는 사냥이라는 명분 아래 힘없는 생명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역시 호랑이를 잡던 포수로서 호랑이를 잡아 일본인에게 바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심지어 총잡이 아저씨는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에 가담한 전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우리 안에서 되풀이되어 온 폭력의 대물림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폭력의 대상은 비단 동물만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 역시 그러한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기 마련이다. 바로 만주 할매의 삶이 여실히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 조국을 떠나 가족을 잃고 만주에서 떠돌며 온갖 고생을 해야 했던 ‘나라잃은 백성으로서의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강인한 여성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성성은 이 동화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하는 듯하다. 만주 할매에서 난이로, 그리고 누렁이로 이어지는 여성성의 강한 연대가 총잡이 아저씨의 폭력에 맞서고 끝내는 패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총잡이 아저씨가 누렁이의 복수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다가 스스로 마을을 떠나게 되는 것은 타당한 귀결로 보인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눈밭을 헤치고 찾아온 손님은 여성적 연대가 이루어낸 평온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순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이 서로의 구역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연의 상태. 이는 죽음과 폭력이 아닌 생명과 살림을 위한 공존과 연대의 상징이자 여성성의 본질에 해당한다. 난이의 손녀인 연우와 마찬가지로 누렁이의 증손녀쯤으로 여겨지는 꼬마 여우들과의 조우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성과 여성성에 대한 강한 기대와 희망은 아닌지 자꾸 되새기게 된다.
생명을 지닌 다양한 존재들이 인간과 함께 이 지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살아왔다. 하지만 인간 중심의 문명은 지구 생태계를 훼손하면서 다른 비인간 존재들의 무차별적인 희생을 불러오고 말았다. 이 동화는 ‘빨강 여우’라는 은유적 상징을 통해 자연 생태계를 파괴해 온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이를 통해 생명에 대한 존중과 함께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많은 어린이들에게 재미와 깊은 감동을 줄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