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기 번영 이룬 서구와 달리, 참혹한 ‘열전’ 치른 아시아
아시아의 탈식민화 과정에서 2천만 명 희생시킨 전쟁·폭력의 기원과 궤적 세밀하게 그려
동아시아, 동남·서아시아, 중동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전체 아우르는 현대사로서 유일한 책
희귀 사진, 도판, 지도 다수 수록되어 읽는 재미와 편의 더해
중국 내전(250만 명), 한국 전쟁(300만 명), 프랑스-인도차이나 전쟁(29만 명), 베트남 전쟁(400만 명), 캄보디아 제노사이드(167만 명),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50만 명), 방글라데시 해방전쟁(100만 명),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00만 명), 이란-이라크 전쟁(68만 명), 레바논 전쟁(15만 명)…. 이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90년까지 45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동남·서아시아를 거쳐 중동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과 폭력의 현장, 그리고 희생된 이들의 수를 가리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기, 역설적이게도 서구가 ‘장기 평화The Long Peace’의 시간을 누리는 동안, 아시아는 왜 이토록 참혹한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을까? 이 책이 출간되는 2023년 현재에도 아시아의 서쪽 끝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은 또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 책은 아시아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폭넓게 재구성하며 비극이 왜 일어났고, 오늘날 이 문제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날카롭게 풀어낸다.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현대사’로서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책이기도 하다.
냉전 시대 폭력의 지리학
이 책은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중국 공산당의 내전(중국 혁명), 미·소 한반도 분할 점령의 비극과 학살, 그리고 한국 전쟁으로 시작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책은 “동쪽으로는 만주 평원, 남쪽으로는 인도차이나반도의 우거진 열대우림, 그리고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및 중동의 건조한 고원에 이르기까지” “냉전 시대 가장 치명적인 군사 현장에 관한 역사서다.”(5쪽)
1945년부터 1990년까지, 탈식민화 과정을 겪는 포스트식민지국가(권력)를 둘러싸고 초강대국들, 새로 등장한 통치 세력들, 야심찬 혁명가들이 한데 얽혀 냉전의 또 다른 전선을 형성했다. 새롭게 형성된 이 아시아의 전선을 따라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45년 동안 전체 대외 원조의 80%를 쏟아 부었으며, 미군 전사자의 99.9%, 소련군 전사자의 95%를 희생시켰다. 민간인도 2,000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는 매일 약 1,2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망했음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는 대체로 대규모 전쟁을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장기 평화’의 냉전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879쪽)라는 서구의 역사적 시선이 아시아에 관한 한 완전히 잘못된 평가임을 책은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책의 저자 체임벌린은 ‘장기 평화’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만 국한되었을 뿐, 동일한 시기 아시아에서는 내전, 해방전쟁, 초강대국들의 대리전 등으로 끔찍한 ‘열전’이 지속되었음을 방대한 연구를 통해 증명한다. ‘냉전 국제사 프로젝트Cold War International Project’와 ‘국가안보 문서보관소National Security Archive’가 기밀 해제한 미국, 소련 및 중국의 문서, CIA 문서를 비롯해 비정부기구와 인권단체의 자료, 구술, 목격담, 언론인 인터뷰 등을 통해 당시 역사적 현장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기도 한다.
아시아에 드리운 세 전선
책은 총 3부 1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부는 ‘세 전선’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첫 전선(1부, 1945년~1954년)은 동아시아에서 대두한 공산주의 공세를 다룬다. 5년간의 내전을 통해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의 혁명이 성공하자 포스트식민주의 세계의 혁명 전사들은 크게 고무 받았다.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을 긴장시켰으며 아시아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한국과 인도차이나에서 각각 ‘대리전’과 ‘해방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럽을 동서로 분할하던 냉전의 지도가 새롭게 수정되었다. 미국은 ‘공산주의 팽창’의 봉쇄 전략을 위해 서둘러 자국의 군대를 전개했으며, 소련은 ‘자본주의 포위’를 깨뜨리려 들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 둘 다 “힘과 영향력을 포스트식민주의 사회들에 투입함으로써 그들의 전신인 제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다.”(15쪽) 이로써 아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지정학적 충돌의 격전지가 되었다.
두 번째 전선(2부, 1964년~1979년)은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미국의 후원을 받는 남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형성되었다. 북베트남의 하노이가 전면에 나서자 공산주의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소련과 중국 사이의 경쟁과 균열은 더욱더 커져갔다. 워싱턴·모스크바·베이징 사이의 3자 투쟁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지는 데 일조했다. 중국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하려던 미국은 ‘중국 중재자’ 파키스탄의 방글라데시 침공을 돕거나 방조했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전쟁도 불사했으며, 미국은 노골적으로 인도를 못마땅해 했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허우적댔던 미국은 베트남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여 캄보디아의 끔찍한 독재자인 폴 포트를 돕게 했다. 이는 결국 ‘킬링필드’로 악명 높은 크메르 루주(붉은 크메르)의 민간인 대학살로 이어졌다. 한때는 강력한 후원자였지만, 더 이상 하노이를 통제할 수 없던 중국은 베트남에 의해 폴 포트가 축출되자 베트남을 공격했다. 미국의 공산주의 봉쇄에 맞선 소위 ‘제3세계 공산주의 프로젝트’는 이렇듯 갈가리 찢겨졌다. 두 번째 전선에서도 결국, 미국·소련·중국의 지정학적 경쟁 때문에 민간인들만 무참히 희생되거나 학살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세 번째 전선(3부, 1975년~1990년)은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등에서 “죽은 자들을 땅에 묻고 있는 사이에, 새로운 무리의 혁명 세력이 서쪽에서, 즉 이란고원 위에서,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가로질러, 그리고 지중해 해안을 따라 등장했다.”(555쪽)
책은 세 번째 전선의 가장 큰 특징을 “자본주의 근대화와 사회주의 근대화가 약속한 미래를 모두 철저히 거부하는 ‘대종파 반란’”으로 꼽는다. 반란을 주도한 새로운 세대의 전사들은 이제 이념이 아니라 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걸었다.
1979년 이란에서 신정(神政) 혁명이 성공하고 친미 정권이 몰락하자 미국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이스라엘은 미국의 ‘경비견’답게 이 지역의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레바논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수많은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스라엘의 우방국 중 하나인 영국조차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작전을 두고 “역겨운 야만 행위”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과 소련은 손익을 계산하며 골머리를 앓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자헤딘(전사)이 소련을 몰아내고 있었는데, 이들의 강력한 후원자는 당연히도 미국이었다. 심지어 CIA가 직접 개입했는데 끝내 자신의 창조주를 파멸시키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을 길러내는 짓이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훗날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이들을 상대했으나 결국 과거 소련처럼 아프가니스탄을 포기해야 했다.)
누가 시민이 될 자격이 있는가?
책은 세 전선의 역사적 분석을 통해 아시아의 투사들이 초강대국의 단순한 앞잡이가 아니었으며, 초강대국의 정치적 이념을 방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싸웠다는 점도 강조한다. 초강대국의 대리전으로만 단순히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탈식민지화의 뒤를 이어 이전의 식민지 백성은 시민으로 탈바꿈되어야 했는데, 이는 바로 ‘누가 포함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정치 이념, 인종, 종교적 소속이 포스트식민지주의 사회를 관통하면서 다가올 많은 충돌의 근거가 되었다.”(25쪽)
미국도서관저널 또한 이 책을 두고 “1945년부터 1990년까지 냉전이 결코 차갑지 않았으며, 미국과 소련 사이의 대립만도 아니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역사학자들과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여러 생각을 던져주는 의미심장한 저작”라고 평가하며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