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풍란과 풍란의 주인과 바람
소설가 류재만
풍란이 고스란히 자신의 주인이었던 때는 숨 막히는 까만 비닐봉지 싸여서 누군가가 소유를 주장하기 이전까지이다. 풍란이 오롯이 주인이었던 이유는 햇빛과 비와 심심함을 달래주는 바람 외에는 사는 데 더는 소용될 게 없었고 내리쬐든 쏟아지든 불어닥치든 적절히 취하는 것 말고는 주변 모두 그렇게 사니, 걱정하고 고민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대신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소유한 자는 풍란이 알고 있는 세계의 족속과는 달랐다. 타자의 자유를 뺏어 얻은 제압의 쾌감이나 드문드문 즐길 뿐이었고 새로운 대상에 관심이 생기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소유로 인식하고 있었다.
정원을 야생이라고 여기고 싶었지만, 야생을 빼앗긴 데야 야생일 수 있을까. 빼앗긴 자 소유된 자들과의 연대는 불가피한 것이고 살아가는 법을 공유하고 공생의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풍란의 비와 물을 가리고 제한하는 장소가 유대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연대와 공생의 대화의 끝은 장소와, 장소와 자신과의 관계와 체험일 수밖에 없다.
풍란이 바람을 본 적 있는가, 묻는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게 바람 아닌가. 게다가 질문한 바람은 중의적이다. 바람이 어디에서 어디로 불고 솜털을 간질이는 바람인지 뿌리를 뽑고도 남을 태풍인지 물리적 바람을 묻는다. 또 하나는 여기와 거기를 비교하며 꿈꾸는 바람이다.
질문의 대상은 풍란 주변의 직박구리 말고는 관음죽 나비란 부추 등 부동의 식물이다. 직박구리는 바람과 바람의 속성인 자유를 염두에 둔 기제로 여겨진다. 꿈꾸는 바람 속에 들어있는 바람, 자유에 대해서는 대상의 속성으로 질문을 가름하고 있다.
작가의 고향 동해의 바람을 공유한 적 있다. 작가가 사는 곳도 바다에 붙어있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땅에서 빛이 솟는다는, 책갈피에 갯내가 배어있는 바닷가 발한, 발한도서관에서 시화전을 하던 햇빛이 구름 위에 머문 컴컴한 날이었다.
아랫구름은 북으로 가고 윗구름은 남으로 흐르며 사이가 조금 벌어졌다. 사이로 햇언나 오줌처럼 햇빛이 쪼로롱 떨어지다가, 참고 참아선지 위로 오르는 듯 보였다. 구멍이 우물 만하게 구멍이 벌어지고 소낙비 줄기처럼 쏟아졌다. 해변을 지나 둔덕을 오르고 있었다. 곧 닿겠구나, 만져볼 수 있겠구나, 했는데 갑자기 들이 분 해연풍에 얹힌 해무에 가려 스러졌다. 해무로 코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해무의 목숨은 해연풍에 달려 있었다. 날리고 부서지고 모래밭에 쑤셔박히면서도 매달려 있었다. 저게 바람이구나 싶었다.
해무에 해연풍이 방울졌다. 해연풍이 해무와 둔덕에 앉아, 달래는가 싶더니, 나쁜 놈, 음침한 솔밭 사이로 끌고 들어갔다. 해무가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다. 구름에 구멍을 내고 다시 쏟아졌다. 솔방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바람을 본 적 있는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고 있지, 싶다.
옥계 금진 봄 밤바다 미역 말리는 모래밭에서였다.
모래가 미역을 머리에 얹고 불가사리에 잡아먹혀 구멍 난 조개껍데기에게 말했다.
미역은 내가 다 말렸어. 오늘 볕이 아주 좋았어. 좋을 때 모아 둬야 해. 한 뼘 속까지 달구려면 거죽은 반은 죽어야 해. 우리 엄마 산후병에 모래미역 밖에 듣는 게 없어서야. 날 저물고 해 뜰 때까지 미역에 조금씩 덜어 데워줄 거야.
어제는 내부는 바람이 심상찮은 거야. 폴폴 모래 이는 거 봤지? 내가 올라타고 바람을 붙잡고 있었던 거야. 바람이 거세지고 파도까지 끌고 들어오는 거야. 문풍지를 두드려 깨우려다 말았지. 한낮의 수고를 알잖아. 산발이 된 파도도 내 앞에선 고개를 숙이는 이유야. 바람이 파도에 섞여서 자기를 감추더라니까. 니는 뭐 했나?
조개껍데기가 모래에다 불가사리 가래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저께 빗방울이 떠는 데도 잠만 잘 자더라. 빗방울에 파이고 괴는데도 참 잘 자더라. 비 맞으면 미역이 뭐가 되나? 곤죽 되는 거 모르냐? 빗방울에 얼굴을 들이댔단 말이다. 빗소리를 잡아먹기나 하는 모래 니는 흉내도 못 내. 조개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도 듣고 화들짝 깨는 엄마야. 엄마가 비를 맞으며 걷어 들이며 나보고 참 고맙다고 그러더라. 뭔 말인지 모르지? 빗방울 소리는 부딪쳐야 나는 거야. 빗방울을 내 얼굴로 맞받아 낸 소리란 말이야. 니 혼자 미역 말렸냐?
모래와 조개껍데기는 그날도 지지고 볶고 그러면서도 뒤섞여 붙어있었다.
민물고기 똥꼬 낚시로 시간을 붙잡으려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엄마와 똥꼬의 배를 열어 살피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에게서, 그날 들리지 않았던 모래와 조개의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듣는 거였다. 살아도 살 비비고 살고 있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러면 돼? 묻지, 싶었다.
작가의 고향에서는 똥꼬는 물곰치나 아귀처럼 잡히면 버리는 민물고기였다. 흔해서이기도 하고 맛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특히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해졌다. 작가가 아버지의 삶을 다시 반추하는 것처럼, 아버지가 똥꼬의 배를 열어 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래전에는 아픈 사람이 이렇게도 많았나 병원에 갈 때마다 항상 놀랐지만, 지금은 놀라지 않는다. 여기 나으면 저기 덧나고 거죽이 아물면 속이 쓰리니 병도 병도 참도 많고 많다 놀란다. 소화제만 먹어도 트림을 내뱉었는데 속을 열고 들어내도 며칠뿐이니 다른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누구나 그 정도의 경험은 있을 것이나 보는 것은 다르다. 일시적 방문자가 아니라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 시간과 체험으로 체화된 눈이어야 보일 것이다. 머언먼 앞날까지 염두에 두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보고 말면 그 또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타자와 자신이 똑같다는 성찰을 바탕으로 타자를 위한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다. 타자의 삶을 위한 나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것이다. 작가는 보고 느끼고 관심과 연민을 작품으로 실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려 아파하고 있다.
서점 주인과 대화 없는 대화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녀를 통해 나를 보고 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 속에서도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갈등은 갈증에 기인한다는 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갈등과 갈증으로 우리는 살아가는가, 질문도 한다. 벗어나려는 가능치도 않은 시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면 하는 저의를 본다. 오히려 동행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다. 의도하든 피하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다.
모래미역은 모래가 말렸다 해주자. 빗방울 소리는 조개껍데기에 부딪혀 나는 소리라고 해주자. 해는 햇빛이 언급되지 않더라도 아무 말 않을 것이다. 작가는 그러고 있는 것이다.
『동안』을 통해 만나 오래 자주 만나진 않았지만, 작가는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안팎이 거의 비슷한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분이지 싶다. 옆에 계신 시인도 마찬가지고.
작가는 누워 잠들어서도 천장에 도배된 사방연속무늬 꼬리를 잡고 밤새도록 머리를 좇는 열정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보이는 세계와 더불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으려 밤에도 눈을 뜨고 자는 것 같다. 사람이 듣지 못할 뿐인, 들리지 않는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작가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