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내게 필요했던 건 사람의 손이었다. 잠깐이라도 화장실에 갈 수 있게 아이를 안아 줄 수 있는 손, 흠뻑 젖은 기저귀를 갈아 줄 손, 잠투정하는 아이를 토닥여 주는 손, “제발 잠 좀 자라” 하고 신경질적으로 아이를 타이르는 나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줄 손.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우울증은 천진난만하게 나를 덮쳤다.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4시가 가까워졌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남긴 명대사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는 내게로 와서 이렇게 바뀌었다.
“네가 4시에 하원한다면, 나는 3시부터 우울해질 거야.”
주요 우울장애의 평생 유병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이는 서구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울증 대표서라 불리는 《한낮의 우울》의 저자 앤드류 솔로몬은 그 이유를 여성이 남성에 비해 가난해지기도,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도 쉬우며, 결혼 후 남편에게 종속되기 쉬워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지위를 잃을 확률이 커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국의 심리학자 조지 브라운은 여성의 우울증이 자식에 대한 걱정과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제외하면 남녀 우울증 발병률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우울증 발병률의 성별 차이는 상당 부분 역할 차이의 결과라고 말한다.
나는 원고를 의뢰한 사람이 두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을 듣고 반가웠다. 양육자라는 공감대 때문이었다. 나도 세 아이의 엄마임을 밝히자,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에이, 그럼 글 쓸 시간도 없겠네.”
‘엄마’라는 사실을 밝힌 순간 나는 전문성 있는 작가에서 ‘애 엄마’가 됐다. 그의 무례함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곧장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아빠라는 사실은 내게 책임감 있고 의젓한 어른이라는 의미였지만, 내가 엄마라는 사실은 그에게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장애 요소에 불과했다.
노동, 젠더, 여성을 탐구하는 창원대학교 허은 교수는 2017년까지 창원 여성들의 일자리를 연구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제조업 중심 도시인 창원과 울산 지역은 ‘부유한 노동자의 도시’라는 타이틀과 반대로 여성의 연봉이 전국 평균을 밑돈다. 좋은 일자리로 통하는 제조업은 대부분 남성 노동자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여성은 거의 없으며, 제조업 부문 월평균 임금은 남성과 여성이 100만 원 이상 차이가 났다. ‘부유한 노동자의 아내’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부유한 노동자’가 되는 것보다 현명한 선택으로 인식된다는 씁쓸한 결론이다.
우살롱이 대면 모임이라는 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우울한 엄마들이 ‘있다’라는 사실을 직접 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살롱의 가장 큰 존재 이유였다. 어떤 참여자는 우살롱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서 “진짜 우울한 엄마들이 있나 궁금해서 왔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이 사는 진주, 창원, 부산 등지에 우울한 엄마들이 있다는 걸 알면 살아가기가 좀 덜 외롭지 않을까. 혼자 모임 장소에 들어설 때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덜 쓸쓸하지 않을까.
의사인 은선에게 자조모임이 우울증에 실제 효과가 있는지 물었다. 전문 상담가가 부재하고, 1인 맞춤형 상담이 힘들다는 게 자조모임의 단점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장점이 존재했다. 은선은 자조모임을 영어로 peer support(동료 지지)라고 부른다고 알려 주며, 전문가 없이 동료끼리 모여서 하는 동료 지지에 대한 임상시험을 분석한 결과, 일반적인 치료만 하는 것보다 동료 지지 활동을 같이하는 것이 우울증 증상 감소에 도움이 됐다는 자료를 보내 주었다.
아이를 낳은 게 원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떻게 이렇게 오염되고, 폭력적인 세상에 아이를 세 명이나 낳았어, 너조차 책임지기 버거워하는 인간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기분이 들 때면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물러 빠졌다고, 약한 인간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패배일까. 이런 나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까 내 노트에 적어 둔 메시지 말이야. 혹시 엄마가 우울증이라 걱정돼서 그렇게 적은 거야?”
어둠 속에서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말했다.
“있잖아. 세상에 눈 아픈 사람, 다리나 팔을 다친 사람도 많잖아. 너도 안경을 쓰고 있고. 마산 할머니랑 구포 할머니도 관절이 안 좋아서 수술했고.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장애가 있어. 엄마의 우울증도 그런 거야. 좋아지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