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에게 ‘해로운 교제’에 관해 언제 알려줘야 할까?
양육자를 위한 범죄 피해 예방서를 쓴 현직 경찰분과 담소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갓 성인이 된 청년이 내는 자동차 사고 건수가 의외로 많다고 들었다. 차 사고로 불구가 되거나, 혹은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전과자가 되는 이십 대 초반 청년의 처지를 생각하면 무척 안타깝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운전의 위험한 면은 운전면허를 따기 전 청소년기에 하는 게 맞겠구나 싶었다.
이 소설의 주제도 위 이야기와 맥락이 같다. 성인이 되기 전 청소년기에 ‘해로운 교제’에 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가 자신을 무방비한 상태로 이끌기도 한다. 이는 이 세대에 처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 내내 있었던 전형적인 일이다.
질문자) ‘해로운 교제’에 관한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저자) 주제가 주는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단지 독자가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을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해로운 교제’는 사회 문제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복잡성에 깊은 뿌리를 둔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알프레도 고메즈 세르다’ 저자 인터뷰 중에서, 아나야 출판사 제공〉
‘아나야 아동 청소년 문학상’ 외에도 다수의 국제 문학상을 받은 이 작품은 청소년기의 ‘해로운 교제’를 생생하게 다룬다. 십 대 소녀인 마리나는 이제는 끝난 ‘자신의 사랑’을 되짚어가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마리나는 여름방학 직전부터 같은 반 에우헤니오와 사귄다. 마리나는 에우헤니오가 자신의 모든 친구를 싫어하자 당황한다. 에우헤니오는 자신이 그녀의 유일한 사회적 통로이길 바란다. 그는 계속 마리나를 조종하려 든다.
에우헤니오는 왜 내 모든 비밀번호를 알면서 자기 것은 안 알려 주지? 내 친구한테 나 대신 답 문자를 하고, 왜 내 곁에 아무도 없기를 바라지? 내 메시지를 읽고도 왜 답하지 않지? 특히 제일 답답한 건 이러고도 왜 늘 내가 사과하지?
마리나는 자신의 사랑이 찬란할 거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에우헤니오를 사귀는 동안 마리나는 어두운 미로에 갇힌 기분이 된다. 며칠은 괜찮고 며칠은 나쁜 남자 친구들 둔 마리나는 악몽에 시달린다.
악몽에서 마리나는 님프(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연물에 깃든 요정. 젊고 아름다운 여자 모습)로 그려진다. 님프가 된 마리나는 꿈에서 파우누스(로마 신화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숲, 사냥, 목축을 맡아보는 신.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이고 다리와 꼬리는 염소 모양이며 이마에 뿔이 있음)를 만난다. 마리나가 처한 현실이 재해석되는 신화풍의 장면은 철저히 혼돈 가운데 있는 소녀의 내면을 암시한다.
사랑으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던 마리나는 심연 같은 절망감에 허우적거린다. 마리나는 자신을 부서진 님프처럼 느끼고, 그것이 누가 봐도 정답인 양 확언한다.
뱀에게 잡아먹힌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시간은 아무것도 치유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망가뜨릴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의 초조함은 끝날 수 있을까?
작품에 등장하는 마리나, 에우헤니오 두 사람은 – 본인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 자신들이 익히 아는 패턴으로 사랑한다. 자신들의 부모를 따라 하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에게 부모의 태도를 기대한다.
마리나는 자신의 부모가 그러하듯 에우헤니오와 소통하길 원하고 친구들과 함께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지내기를 원한다. 반면 에우헤니오는 친구를 무익하다 여기고 마리나가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의 명령에 군말 없이 따르기 바란다.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명령에 그러하듯.
이 책의 저자는 안 좋은 패턴으로 짜인 가족을 둔 사람은(인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사랑할 때 물레에서 기존에 천을 걷어낸 뒤 새로운 옷감을 다시 짜듯 한올 한올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해로운 교제”는 있다. 나에게 독이 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 관계에 오랫동안 잠식된다면 저자의 말대로 뉴스에서나 보는 먼 곳의 사회문제가 아니라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는 불행이 될 것이다.
나르키소스의 호수에 청소년이 다가간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호수에 비친 것은 타인이었다. 오롯이 자신을 응시하는 자신을 기대했던 호수에서 자신이 아닌 전혀 모르는 존재가 비쳐 두려워하는 청소년에게 이 책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직시하게 할 목소리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청소년이 부디 해로운 교제가 주는 아픔을 겪지 않길, 겪더라도 조금은 덜 아프게 통과하길. 이것이 청소년 소설이 품은 미덕 중 하나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