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나이를 항상 ‘먹는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음식도 아닌데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한국어에만 있는 이 독특한 표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우리는 ‘마음을 먹는다’고 한다. (…) 나아가 ‘앙심을 먹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욕을 먹는다’는 표현도 있다. (…) ‘꾸지람’ ‘핀잔’도 먹는다. 또한 우리는 ‘겁’도 먹는다고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공포의 심리가 체화되는 것이니 말을 할 수가 없는 그 상황이 더욱 실감 난다. 때로는 ‘충격’도 먹는다. 한편 ‘더위’를 먹는다고도 하고, ‘이자’나 ‘이문’을 먹는다고도 하며, 부당한 방식으로 수익 따위를 가로채거나 차지할 때 ‘돈’을 먹거나 ‘뇌물’을 먹는다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수수료를 ‘꿀꺽 삼킨다’라는 표현도 쓴다. (17~18쪽)
‘성탄절’(聖誕節)로 번역되는 ‘크리스마스’(Christmas)는 무슨 뜻일까?
영어의 Christmas는 (…)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cristes에 ‘미사’를 뜻하는 mæsse가 합성하여 이루어진 어휘이다. 흔히 X-mas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X는 Christ의 그리스어 Christós, 즉 Χριστός의 머리글자이다. (50쪽)
한편 ‘크리스마스’는 영어권을 벗어나 로망스어권으로 가면 전혀 다른 단어가 된다. (…) 스페인어에서는 navidad(나비닷), 프랑스어에서는 Noël(노엘)이다. ‘즐거운 성탄’도 프랑스어 ‘Joyeux Noël’(주아외 노엘), 스페인어 ‘Feliz Navidad’(펠리츠 나비닷)이다. 이들 언어의 크리스마스는 모두 ‘탄생’을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natalis(나탈리스)로부터 파생된 어휘들이다. 여기서 ‘탄생’이란 다름 아닌 ‘예수의 탄생’을 의미한다. (52쪽)
‘Good bye’(굿바이)는 ‘God be with ye’, 즉 신이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기원한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의 ye는 you의 고어형이다. 1570년대의 문헌에 Godbwye가 나타나는데, 뒷부분은 ‘be with ye’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그리고 본래는 God(神)이었는데, 이후 관용적으로 쓰이면서 본래의 의미가 약화되고 ‘Good-day’나 ‘Good evening’과 같은 표현에 영향을 받아서 Good으로 바뀌었다. (58쪽)
우리가 ‘해’가 바뀌었다, ‘해’를 넘긴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한다, 새로운 ‘해’를 맞는다 등과 같이 표현할 때의 ‘해’는 ‘연’(年, year)을 뜻하는 말이다. (…) 이 ‘해’는 우리말에서 많은 어휘를 파생시켰다. 첫째, 흰색을 나타내는 형용사 ‘희다’(白)가 ‘해’에서 온 말이다. (…) 앞이 탁 트여 넓고 시원하다는 뜻의 ‘훤하다’도 ‘해’에서 나온 말이다. ‘밖이 훤하다. 앞길이 훤하다’와 같이 쓰는데, 태양처럼 밝은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생각해 보면 적절한 비유라 아니할 수 없다. 막힘없이 깨끗하고 시원스럽다는 뜻의 ‘훤칠하다’도 ‘해’에서 왔다. 머리카락이나 수염 따위의 털이 희어진다는 뜻의 ‘(머리가) 세다’도 ‘해’가 ‘새-/세-’로 구개음화된 것이다. 물론 ‘새치’도 마찬가지이다. (60~61쪽)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투표가 자신의 정치적인 의사를 표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다. 투표란, 집단에서 공통의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이다. 동양어권에서 투표(投票)는 단지 표를 던진다는 뜻이지만, 서양어권에서는 ‘소망’이라는 뜻이다. 영어와 프랑스어의 vote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의 voto는 모두 소망을 뜻하는 라틴어 votum에서 기원하는 단어들이다. (91쪽)
프랑스어의 경우 매우 가까운 친구를 뜻하는 말로 ‘copain’(코팽)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함께’를 뜻하는 co와 ‘빵’을 뜻하는 pain이 합쳐진 말로서 ‘빵을 함께 먹는 사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영어
의 company(컴퍼니)와도 역사를 같이하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는 ‘함께하는 사람’이나 ‘(집에 찾아온) 손님’과 같이 친밀감이 있는 사람들, 혹은 ‘회사’나 ‘중대’ ‘극단’ 등과 같이 공동의 목적으로 함께 일하는 단체를 가리킨다. 이 company는 12세기 중엽에 고대프랑스어의 compagnie(콩파니)로부터 유입된 말로 이는 라틴어 ‘함께’를 뜻하는 com과 ‘빵’을 뜻하는 panis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96쪽)
‘갤러리’라는 말은 우리말에서 ‘화랑’을 뜻하는 말로 주로 쓰이며, 골프에서는 ‘관중’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 외래어이다. 왜 이렇게 서로 닮지도 않은 두 뜻이 하나의 단어에 담기게 되었을까? 영어 단어 gallery는 중세 라틴어 galeria에서 온 말이다. 이는 교회 안의 작은 기도실 혹은 현관(church porch)을 뜻하는 galilaea에서 왔다. (…) 이로부터 14세기경에 벽을 따라 난 좁은 통로나 기다란 복도를 뜻하는 고대프랑스어 galerie가 나왔다. 그러다가 이것이 15세기에 영어로 편입되어 gallery가 탄생되었다. (114쪽)
팬덤(fandom)은 킹덤(kingdom)처럼 ‘팬들의 관할구역, 영토’ 혹은 ‘팬들의 집단’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이러다 보니 팬덤은 특히 킹덤의 영향으로 인해, ‘팬들의 왕국’이라는 어감을 얻게 된다. 실제로 팬덤을 사전에 따라서는 ‘열광적 팬의 왕국[영역]’(the realm of avid enthusiasts)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팬덤은 단순히 팬클럽이 아니다. 단순히 동호인들의 모임인 ‘클럽’이 아니라, 규정, 법규가 지배하는, 그리하여 체계를 갖춘 팬들의 집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팬클럽이라는 용어는 맞지 않게 되어 이러한 체계성을 갖춘 집단이라는 의미를 더욱 잘 전달하는 ‘팬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