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10대 20대 청춘들에겐 나이 지긋한 어른으로 취급 받고 노년에 접어든 어르신들에겐 한창 쌩쌩한 젊은이로 인식되는 낀 세대이자 애매한 나이대가 바로 중년이다. 그래서일까. 서점에 빽빽하게 꽂힌 책들 가운데서도 중년을 주제로 한 책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세대에 비해 중년은 스스로를 ‘이렇다’라고 정의내리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모호한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년의 삶은 늘 변수투성이에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마다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하지만 눈앞에 놓인 여러 갈림길 중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시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프롤로그」중에서
그들에게 타인의 시선은 자신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누군가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져 왜곡되고 변질된 모습으로 삶을 덧칠했다. 하지만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은 ‘일상화된 환상’이었다. 아이러니한 기준에 턱없이 부족한 자신의 결점과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절망하고, 결점을 메우기 위해 또다시 소비를 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60만 원을 쓰던 날」중에서
어쩌면 권리보다 책임을 더 많이 부여 받는 우리네 중년은 압박감과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맡고 가장 왕성하게 살아가는 세대가 중년 세대다. 그럼에도 ‘허리’의 자리는 늘 말없이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수행하는 것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긴다. 아직 마음은 채 준비가 되지 못했는데, 내려놓아야 할 집착과, 받아들여야 할 변화들이 너무나 많은 이시기에 찾아오는 심적 변화를 ‘상실감’이라는 말이 대표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조연이 되어가는 걸까」중에서
이전보다 훨씬 좁아진 집에 들어서면서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었을 때와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 말하면 소리가 울릴 만큼 넓었던 예전의 집보다 이사 온 집은 훨씬 아늑했으며, 좁아졌음에도 많은 것을 덜어내어 보다 단순해진 집은 더 차분 해져 있었다. 일부러 베란다를 확장하지 않은 집, 대신 햇볕이 잘 드는 집을 골라 이사를 했다. 토요일 이른 아침이면 마당쇠처럼 빗자루로 베란다 바닥을 쓸고, 볕 좋은 날이면 야채며 그릇을 말리는 즐거움을 새로이 발견하던 때였기에, ‘느리고 번거로워 인간다운 집’이라는 말에도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가난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집」중에서
엄마도 결국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사람이다. ‘굿 윌 헌팅’의 대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보편적 기준이나 일정한 틀에 맞춰진 완벽한 모습을 지향하기보다는, 각자 불완전한 존재로 서로를 끌어안고 다독이고 의지하면서 빈 공간,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어쩌면 엄마로서 ‘충분히 좋은’ 역할이 아닐까 싶다. 결국 육아에서도 꽉 채운 완벽함보다는 비우고 단순하여 그 자체로 충분한 삶의 방식을 아이는 훨씬 더 행복하게 받아들인다. 빈 공간을 스스로 채우며 더 많은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좋은 엄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