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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론


  • ISBN-13
    978-89-6365-528-4 (93120)
  • 출판사 / 임프린트
    종합출판 범우㈜ / 종합출판 범우㈜
  • 정가
    38,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3-08-25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박호성
  • 번역
    -
  • 메인주제어
    철학, 종교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철학, 종교 #박호성, 인간이란, 인간과자연
  • 도서유형
    종이책, 반양장/소프트커버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53 * 225 mm, 754 Page

책소개

〈평등론〉〈공동체론〉의 저자- 박호성 교수가 밝히는 인간론!

 

수천 년 동안 자연과 함께 해온 인간,

‘인간 없는 자연’은 문제될 게 없으나 ‘자연 없는 인간’은 생존불능이다. 

이제 생태계의 주도적 양심세력으로 인간은 자연에 헌신해야 마땅하다.

 

저자는 ‘인간의 본성’을 한마디로 ‘고독’과 ‘욕망’으로 규정하며, 그 자세한 의미와 특성을 다각도로 해부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고독과 욕망이 결국엔 사회적 ‘인연’(因緣)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인연의 굴레 안에서 다양한 사회적 상호관계의 쳇바퀴를 굴리며 생명활동을 전개해왔고, 또 전개해나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 역설한다. 이를테면 ‘인연’을 한마디로 인간관계의 기본토대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인간이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에 공포심을 지닐 수밖에 없고, 또 욕망으로 가득 찬 존재인 탓에 이해관계를 본능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음을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로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이 공포심과 이해관계, 즉 ‘인’(因)은 주어진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을 서로 결집토록 해 공동체를 구성토록 이끄는 자연적 추동력, 즉 ‘연’(緣)과 결합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본성적으로 ‘인연’(因緣)의 직접적 창조자이자 동시에 산물이기도 하다는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저자는 무엇보다 ‘인연’ 개념에 입각해, 인간의 존재, 인간관계, 인간의 역사, 인간과 자연 등의 주요 주제들을 투시한다. 나아가 역사를 바라보는 ‘인연사관’이라는 독특한 시각까지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연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결론에 값하고 있다.

  

목차

| 차 례 |

 

◇ 말문을 열며  5

◇ 여는 글  29

 ― 왜 쓰는가? ·29

 ― 무엇을 쓰는가? ·36

 ― 어떻게 쓰는가? ·42

 

1장 인간 본성과 ‘인연론’ ………… 55

 1―1 인간이란 무엇인가?·57

 1) 고독과 욕망의 생태구조·65

 ① ‘공포심’과 ‘이해관계’·81

 ② ‘공생·공존 활동’·97

 ③ 행동적 니힐리즘 : ‘불구하고의 철학’·101

 2) 연대론·111

 ① 연대 이념의 연혁·111

 3) 왜 연대가 필요한가·122

 ① 사익과 공익·127

 4) 사례 점검 : ‘코로나 연대’, 연대 소환운동·141

 1―2 사회적 ‘인연론’의 본질·177

 1―3 인간의 생존공간·199

 1) 인간과 자연·201

 2) 개념 교통정리 : 환경, 생태계, 그리고 자연·208

 ① 대안개념 : ‘생태환경’·220

 3) 자연의 휴머니즘·247

 4) 인간과 지구·273

 ① 인간의 몸·273

 ② 자연과 지구, 그리고 생명·282

 

2장 인간과 인간, 그리고 공동체 ………… 301

 2―1 인간본성과 공동체·303

 2―2 공동체란 무엇인가 : ‘전통적’ 공동체와 ‘인위적’ 공동체·305

 2―3 나를 위한 공동체, 공동체를 위한 나·322

 2―4 공동체의 생활철학 : 이상주의와 현실주의·337

 

3장 인간과 역사 : ‘인연 공동체’ ………… 353

 3―1 ‘인연사관’·355

 3―2 ‘인연 공동체’의 역사적 전개과정·368

 1) 가족 공동체·369

 2) 종족 공동체·374

 3) 신분 공동체·377

 ① 교회, 악덕 토지귀족·379

 4) 민족 공동체·388

 3―3 앞으로의 세계 : ‘생명 공동체’·397

 1) 현대인의 본성 : ‘영혼 없는 기계’·404

 2) 현대인의 실존양식 : 엘리베이터 안의 고독·443

 3) ‘원시성’과 ‘야만성’, 그리고 21세기의 ‘원시인’·455

 4) ‘생명 공동체’의 정신적 토대 : ‘현대 원시주의’ 생태론 및 ‘생태·환경 민주주의’·484

 ① 3개의 민주주의·490

 ② ‘맹종’(盲從)과 ‘순종’(順從), ‘방종’(放縱)과 ‘추종’(追從)·501

 ③ 홍익인간(弘益人間), 홍손인간(弘損人間)·509

 

4장 휴머니즘의 길 ………… 521

 4―1 휴머니즘 개념의 정신사·523

 1)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의 시대·523

 2)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본질·529

 4―2 인권(Human Rights)이념의 본질과 그 전개과정·544

 1) 인권개념의 성립과 그 발자취·545

 2) 프랑스 대혁명과 인권이념의 특성 : 자유와 평등을 중심으로·565

 3) 전망·586

 4―3 사례점검 : 우리 한국인은 과연 인도적인가?·595

 

5장 ‘인연 휴머니즘’ ………… 609

 5―1 무엇을 ‘인간적’이라 하는가·611

 1) 인간, 화장하는 동물·611

 2) 과연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가·623

 ① ‘인간적인 인간’이란?·657

 5―2 인연 휴머니즘·659

 1) ‘자연살이’ 소고·671

 2) 인연 휴머니즘의 정치학·677

 ① ‘3공주의’(三共主義)·677

 ② ‘3생정치론’(三生政治論)·680

 

◇ 닫는 글 ………… 687

 ― 인간본성론·688

 ― 사회적 인연론·692

 ― 삶의 방정식·697

 ― 인간적인 인간·702

 ― 〈시민참여와 국민복지 확대로 민족통일을!〉·710

 ― 새로운 민주주의·714

 ― 에필로그·721

 

◇ 참고 문헌 ………… 727

본문인용

-

서평

| 서문 – 말문을 열며 |

 

무릇 자연은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체의 본질’이다.

온갖 생명의 원천인 바로 이 자연을 통해 천지간 삼라만상이 갖가지 유형의 ‘인연’으로 서로 굳게 결속해 있을 수밖에 없음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이다. 인연이란 연인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이 이 자연 속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보다 우리 인간에게 삶을 허여하는 주체인 자연에 대해 대저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물음을 던지고 그에 대한 응분의 해답을 찾기 위해 분투 노력하는 태도 역시 지극히 합당하고도 자연스러운 소임이라 할 수 있으리라.

실은 여태껏 나의 개인적인 학문의 발자취 역시 이러한 노력에 나름 동참해보리라는 숨가쁜 안간힘으로 점점이 이어져 내려오지 않았나 조심스레 환기해보곤 한다. 이윽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흐르던 여러 줄기의 실개천 같은 나의 기존 연구결과물들을 대하(大河)와도 같은 큰 흐름에 한데 담아 내보려는 저돌적인 만용에 휘말려, 자신의 재능을 돌아보지도 않고 오랫동안 끙끙거린 게 결국 이 졸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병주의 대하장편소설 《산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엿보인다. “철학이 신념을 주지 못하는 미망에 불과하다면, 촌부의 미신만도 못하다.” ‘도둑이 제발 저리듯’, 한동안 오금이 저려왔다.

하지만 공자님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괴력을 지니신 분 같다. 단 한 순간의 장풍으로 나를 졸지에 ‘애젊은이’로 만들어버리셨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공자께서는 《논어》에서 “15살에 학문에 뜻을 두고(志學), 서른 살에 그 뜻을 확고히 하였으며(而立), 마흔 살에 미혹하지 아니하고(不惑), 쉰 살에 하늘의 명을 깨달았으며(知天命), 칠십이 되니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고 술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러한 공자님 말씀을 따른다면, 나는 아직도 ‘하늘의 명’을 깨닫기는커녕 ‘미혹’에 빠지기 일쑤이니, 여태 40줄에조차도 들어서지 못한 신세인 셈이다. 덕분에 아직도 30여 년이나 젊게 싱싱하게 살아도 좋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가르침인가. 나는 공자님의 이러한 준엄한 격려에 힘입어, 기꺼이 ‘젊은이’로 환생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내 이런 젊은 기백을 원군 삼아, 나는 정년퇴임을 마무리짓자 이내 나의 학문적 삶을 연말정산이라도 하리라는 속셈으로 가족도 뒤로한 채 외따로 표표히 강화도로 흘러들 수 있었다. 아마도 가출적 속성을 띤, 출가와도 흡사한 행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국엔 스스로 ‘자기귀양’을 결행한 셈이 되었다. 

지금 이 글을 강화도 한 모퉁이에서 쓸 수 있게 된 것도, 하기야 공자님이 축복해주신 ‘젊음’의 새파란 혈기 덕분이 아닐까 여겨진다. 주위 지인들의 다정한 힐난을 빌리면, 그야말로 ‘꼴값’하듯이 이른바 ‘젊은 노구’를 이끌고 어쩌다가 홀로 강화도로 흘러 들어온 지 벌써 10여 년이나 흘렀다.

 

( 중 략 )

 

이 글을 쓰는 내내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자신의 주목할 만한 저서, 《인간의 품격》(The Road to Character) 한 모퉁이에 겸허하게 덧붙인 다음과 같은 말 한 마디가 나를 있는 그대로 명쾌하게 직시하는 듯해, 종내 뇌리를 떠나지 않으며 내 심금을 뒤흔들어놓기도 했다. 

 

“나는 얄팍한 성향을 타고났다. 현재 일종의 전문가이자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자기애에 빠진 떠버리가 되어 내 생각들을 마구 쏟아내는 일로 돈을 번다. 그 생각들에 대해 내가 실제로 느끼는 것보다 더 자신감 있는 척하고, 실제보다 더 영리한 척하고, 실제보다 더 권위 있는 척하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으스대기 좋아하는 얄팍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나도 막연한 도덕적 염원을 가지고 살아왔다. 막연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막연히 뭔가 더 커다란 목표를 위해 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도덕 개념이 부족하고, 풍요로운 내적 삶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며, 심지어 어떻게 해야 인격을 연마하고 내면 깊은 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9~10쪽). 

 

인간으로서 인간 자신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랴 싶어 무풍지대로 들어가는 기분으로 시작했다가, 줄곧 몰아치는 돌풍에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른바 양극화현상 등으로 심하게 몸살을 앓아온 데다, 더욱이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통증이 더욱더 악화하여 보다 힘겹게 시달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우리 사회가 종내 나를 몰아붙였다.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세계 최저”, “세계 최악” 타이틀을 이미 여러 개씩이나 쟁취했다는 사실까지 나를 부대끼게 만들었다. 예컨대 부유한 나라 중에서 비정규직 근로자(전체 임금 근로자의 약 37%)가 가장 많고, 노인 빈곤율(37.6%)이 가장 높은 나라도 한국이다. 합계출산율(2021년 기준, 0.78) 또한 세계 최하위에 머물러 있으나, 자살율은 인구 10만 명 당 23.5 명으로 OECD 국가 중 최악을 기록할 정도다. 우리 사회에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은유하는 화법이 난무한 지도 이미 오래다. 근래에는 새로운 용어가 바람을 잡고 있다. 흔히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젊은이를 ‘3포 세대’라 하고, 여기에다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5포 세대’가 추가될 뿐만 아니라,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7포 세대’, 급기야는 모든 것을 무한대로 모조리 다 포기한다는 ‘N포 세대’까지 출현하는 암담한 현실이다.

어쨌든 한반도는 지금 남쪽에서는 ‘자유롭게’ 억눌리고, 북쪽에서는 ‘평등하게’ 굶주리는 중인 것만 같다. 이처럼 소외당하고 굶주리면서, 목이 쉬도록 ‘통일’만은 외치고 있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어떠한 통일’일까? 아무 말도 없다, 다만 야단법석만 되풀이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터전이자 최후의 피난처이기도 한 자연이 처한 심각한 당면위기에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다. ‘환경을 보호하자’, ‘지구를 살리자’ 등등의 구호가 난무하는 현실이 그러한 기하급수적인 자연의 수탈상황을 극명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 한국인의 일상생활과도 결코 거리가 멀지 않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이른바 ‘4대강 정비사업’처럼, 이전 세대가 정성껏 간직해오다가 고이 물려준 자연유산을 눈앞의 당면욕구를 충족키 위해 마구잡이로 망가뜨리는 참상이 가까이서 태연히 자행되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후안무치(厚顔無恥) 그 자체다. 

하지만 가공할 정도로 안타까운 것은 자연이 심각하게 피폐해져감에 따라, 인간의 ‘자연’(Nature), 요컨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 그 자체가 더욱 더 극심하게 날로 황폐해져간다는 사실이다. 모름지기 우리 인간은 태양과 물과 나무처럼, 우리에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무상으로 다 내어 주는 자연에 대해 철면피하게도 “매춘행위”를 자행하는 부도덕한 ‘패륜아’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인 것이다. 무엇보다 생태계 전체의 존속 가능성 자체를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팎의 혼돈 탓인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사색’은 사라지고 ‘검색’만 활개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자연적 고난의 역정을 상습적으로 체험하면서, 이윽고 나 자신 역시 스스로 고난에 빠져들고 있음을 일상적으로 목도하게 되었다. 자문자답과 자기고문이 습관화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작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걸 차차 깨달아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노후한 일개 사회과학도에 지나지 않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이 속달우편처럼 거듭 날아들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비록 의사처럼 즉각적으로 수술용 메스를 갖다댈 수준은 결코 되지 못하지만, 최소한 소독용 알코올을 문지르는 소소한 동작 정도는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윽고 앙상한 팔이나마 걷어붙여야 하리라는 만용이 끊임없이 나를 부추겼다. 결국엔 범지구적 ‘인간위기’와 ‘자연위기’의 실체를 탐사해냄으로써, 그 해법을 ‘인간본성론’ 및 ‘사회적 인연론’에 기초해 나름 어쭙잖은 수준에서나마 심층적으로 탐색해보리라는 가당찮은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내친김에 ‘인간적인 인간’의 ‘인연 휴머니즘’을 촉구하며 장황한 논의를 두서 없이 끝맺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정녕 축복받은 나라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왜 그러한가?

세계적인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현상이 줄을 있는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삶의 발자취는 괄목할만한 기량을 뽐낼 만하다. 우리는 빼어나게 ‘자연 친화적인’ 공동체적 삶의 전통을 누리며 살아온 민족 아니던가. 집요하게 자연과 한 몸처럼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작업을 끝낸 지금은 “높고 튼튼한 제방도 개미와 땅강아지 구멍 때문에 무너진다”는 한비자의 말씀이 새로이 나의 뇌리를 파고든다. 혹시나 이 책 속에도 여기 저기 개미나 땅강아지 구멍 같은 것들이 숱하게 숨어 있어 아무 때라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까, 그저 노심초사할 따름이다. 

부디 나를 깨우쳐주신 모든 분들의 은공에 티끌만한 보답이라도 될 수 있는 책이 되어주기만을 기원할 따름이다. 마침내 주사위를 던진다.

혼자 걷고, 혼자 밥해먹고, 혼자 응시하며 이 책을 썼다. 

‘인간이란 도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로 심각한 고뇌에 잠기면서, 동시에 ‘오늘 저녁엔 무엇을 먹어야 하나’ 하는 생존의 과제로 쉴새없이 끙끙거린 일상이었다. 다만 이 책이 오직 앞으로의 더욱 깊이 있고 심화된 연구의 위태위태하지만, 그래도 눈곱만큼 쓸모가 있기라도 한 자그마한 디딤돌 정도나 될 수 있다면 하고 바랄 따름이다. 학문이란 아름다운 그림 속의 떡이 아니라, 직접 집어먹을 수 있는 쟁반 위의 떡을 마련해줄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러나 글을 마무리짓고 보니 그림도 없고 쟁반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안쓰럽기만 하다. 하지만 실천 없는 이론보다는 이론 없는 실천이 보다 탐탁하지 않으랴. 

그럼에도 자못 대해(大海)에 안착한 듯한 안도감이 나를 저녁안개처럼 잔잔히 감싸고 있음을 감추긴 힘들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갖가지 꼴의 ‘실개천’으로 부산하게 흐르던 기존의 내 하찮은 연구물들이 이러저러한 우여곡절과 심산유곡을 거친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론》의 넓은 ‘바다’에 가까스로 합류한 듯 여겨지기 때문이리라. 사실은 남모르게 감히 안도의 한숨을 슬그머니 내쉬고 있는 중이기도 함을 역시 숨기기 힘든 것 같다.

가령 늑대가 토끼를 뒤쫓는다 한들, 그 토끼를 잡을 가능성이 결코 커 보이지는 않을 수 있으리라. 늑대는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뛰지만, 토끼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전력질주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토끼를 더욱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이해력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실은 이 책을 쓴 크나큰 성과 아닐까 여겨질 정도다. 게다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집필할 수 있는 자유까지 만끽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었으랴. 하지만 개미에게는 접시 물도 망망대해이리라. 나는 그야말로 개미였고, 이 저술의 범주는 접시 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야말로 화살촉 같은 펜을 일단 내려놓고 고문실 같은 서재를 벗어나, 도종환 시인의 꿈과도 같이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적막이 들판처럼 펼쳐진 곳”으로 잠시 나가보아도 좋을 듯하다.

다만 증오 받더라도 경멸당하지는 말았으면 하고 꿈꿀 따름이다.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섬, 강화도 고려지(高麗池) 인근에서

‘산소호흡기 같은 이웃’이 되길 꿈꾸며, 

 

2023년 여름 가장 젊은 어느 날

— 글쓴이

 

 

| 여는 글 - 왜 쓰는가? |

 

 

오늘날 우리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가로지르는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거인주의’(巨人主義)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소산이고,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바로 개인주의며, 이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개인’(個人)은 곧 ‘거인’(巨人)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힘있는 자, 요컨대 ‘거인’ 같은 존재만이 자유주의의 근본인 ‘자유경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힘’의 역학관계에 뿌리박고 있다. 그런 탓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거인주의’로 안착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강자’의 신화를 돌에다 아로새긴 ‘정글 자본주의’가 결국 ‘거인 절대왕정’ 시대를 돈독히 확립할 수밖에 없음은 또한 자명한 이치다. 결과적으로 약육강식의 생활철학이 사회적으로도 높이 추앙받는 보편적 윤리규범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다. ‘힘센 자가 최고’인 것이다.

그 덕분에 오늘날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강인한 ‘호랑이의 자유’만을 만끽한다.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노라 하는 금석문 같은 명분을 내세우며, 결국에는 사회적 호랑이들만 한껏 활개치도록 만든 사회적 불평등 체계를 튼튼히 구축해버린 탓이다. 따라서 그러한 개인주의는 기회만 주어지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가면서까지 재빨리, 날렵한 이기주의로 손쉽게 변신할 수 있는 뛰어난 재능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이윽고 이기주의적 개인주의가 풍미하게 된 것이다.

하기야 벌써부터 ‘독주’의 자유만 있었지, ‘공생’의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지 않았던가. 

더구나 전 세계를 단일시장화 하는 ‘세계화’의 확산과 더불어 소비주의·물신주의가 더불어 세계화하였다. 국제적인 차원으로까지 비약하여, ‘거인’의 독주만 옹호하고 장려하는 본새인 것이다. 그런 탓에 도덕적 진보나 인간적 자아실현 등의 이상적 가치들이 비실용적이고 속절없고 무모한 짓거리로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다. 도처에 발가벗은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인형 인간’만 활보한다. 실상이 이러할진대, 이러한 황금만능주의자들이 과연 얼마나 ‘공익’에 대해 탐탁한 낌새를 보일는지 …?

그러나 ‘거인주의’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총아로 군림하게 되면서, 웃지 못할 모순이 동시에 번창하게 되었다. 요컨대 대다수 자유주의적 개인이 오히려 자유주의가 그토록 높이 기려마지 않는 개인주의의 희생물로 굴러 떨어지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 자유주의의 깃발 아래서는 오로지 ‘거인’만이 진정한 개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외면당하는 수많은 개인이 속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힘이 최고인 탓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사회적 조무래기’들은 도대체 어디서 설 곳을 찾을 수 있을까 …? 결국 구가되는 경제번영의 뒤안길에는, ‘개인 없는 개인주의’만이 음산하게 번져나갈 따름이다.

이처럼 세계화가 질주하는 대로를 따라, 자유경쟁과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까지 더불어 질주하는 형국이다. 한편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예찬하고 있으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소리 높이 절규하기도 하는 기묘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한다. 심오한 경쟁주의에 편승한 약육강식의 사회윤리가 일상화하면서, 결국 대다수의 약자들이 도움을 호소할 길을 찾지 못한 채 막무가내로 쓰러지고 있다. 어쩔 것인가. 

과연 어느 구석진 모퉁이에서 한 뼘의 인도주의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빈익빈·부익부 그리고 양극화 현상 등이 맹종할 수밖에 없는 초인적인 성령처럼 빛나고 있다. 자신의 개인적 결핍이나 결함을 종내 외부의 도움을 빌어 보완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힘없는 ‘조무래기’들은 도대체 어디로 발길을 옮겨야 할까 …? 팔짱을 끼고 그저 우두커니 예의주시만 해야 하는가. 우리는 휴머니즘을 분실해버렸다. 지금 우리는 휴머니즘의 실종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  중 략  )

 

우리의 공동체적 삶의 터전이자 최후의 피난처이기도 한 자연은 지금 과연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는가? 한마디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환경을 보호하자’, ‘지구를 살리자’ 등등의 구호가 난무하는 현실이 그러한 위기현상을 극명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 아니한가. 자연이 더욱 더 기하급수적으로 수탈당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들이 대체로 자신의 이기적인 행복과 쾌락만을 배타 독점적으로 향유하기 위해 생태계 윤리를 서슴없이 파괴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이 지구상의 다른 종(種)의 생명의 질서를 결정적으로 교란하고 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현상이 줄을 잇는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자연을 지키고 또 어떻게 자연과 교감을 나눌 것인가? 오죽하면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까지 나서서, “인류가 멸종을 피하려면 100년 안에 지구를 떠나야 한다”고 매섭게 경고하기까지 할 지경일까.

대내외적으로 이처럼 가공할 난제들이 우리를 포박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여느 때보다도 더욱 더 조신하게 인간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진작하고 진중한 탐구를 요구하는 절박한 상황에 봉착한 것은 아닐까. 급기야는 오죽하면 미미한 나까지 나서서 바람의 방향은 바꿀 수 없으나 항로는 바꿀 수 있지 않으랴 하는 우격다짐으로, ‘인간론’이란 주제를 시굴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게 되었을까.

 

현재 세계화하고 있는 첨단기술의 범람과 사이버 돌풍, 환경오염 및 자연파멸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더구나 전 인류의 고통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비치는 코로나19 팬데믹 발발로 인한 비극적인 두려움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나는 대단히 고무적인 역사발전의 한 단초를 눈여겨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여태껏 특히 공공의 영역에서는 별반 접하기 쉽지 않았던 ‘연대’니 ‘공동체’ 같은 용어들이 거의 일상적으로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심지어는 ‘지구공동체 시대’의 탄생을 맞아 국제사회의 연대와 협력을 촉구하는 움직임까지 감지될 정도다. 불우한 현실을 배경으로 웅자(雄姿)를 드러내는 놀랍고도 희망적인 역사적 메시지 아니겠는가. 아마도 코로나 극복을 위한 방책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와중에 고심 끝에 찾아낸 활로의 하나가 바로 이 ‘공동체적 연대’ 같은 개념이 아닐까 짐작된다. 

어쨌든 인성과 자연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판단되는 실로 난감한 상황에서, 나는 결국 이 저술작업으로 귀순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적 위기를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연과의 공동체적 교감이 필연적이라는, 때늦긴 했지만 가슴 저리는 각성에 이르게 된 탓이다. 나아가 어떻게 하면 사회적 권위주의와 위계질서를 극복하고, 우리 모두가 그야말로 ‘이웃사촌’처럼 손잡고 공생해나갈 수 있는 화합의 기반을 구축해낼수 있을까 하는 자기고문 식 번민이 가슴을 후벼팠음은 물론이다.

저자소개

저자 : 박호성
| 저자 박호성 |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 졸업, 이어서 독일 서베를린대학(FUB)에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공부하고, 정치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87년부터 2014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정치사상 전공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현재는 이 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1993∼94년에는 미국 버클리 대학, 2000∼2001년에는 캐나다 벤쿠버의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UBS), 그리고 2005∼06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각각 객원교수로 일한 바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교수협의회장과 사회과학대학장 및 공공정책대학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 〈학술단체협의회〉,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정치연구회〉 대표 등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
저서로는 서독에서 Sozialismus und Nationalismus로 출판된 박사학위 논문과, 이를 한국어로 번역·출간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서 시작하여, 《평등론: 자유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현실》, 논문 모음집인 《노동운동과 민족운동》 아울러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남북한 민족주의 비교연구: ‘한반도 민족주의’를 위하여》, 《휴머니즘론: 새로운 시대정신을 위하여》, 《공동체론: 화해와 통합의 사회·정치적 기초》, 생태론 연구서인 《자연의 인간, 인간의 자연》 등을 펴냈다.
특히 《평등론》으로 199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그리고 《공동체론〉으로 2010년 〈한국출판문화상〉 학술상을 각각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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