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도시를 관찰하는 방법으로 조망(鳥望)이란 것이 있다. 새(鳥)의 시선이 되어 내려다본 풍경이다. 하지만 내가 부산을 최초로 바라보게 된 것은 여느 내륙의 도시에서처럼 새의 눈으로 내려다본 것이 아니라 마도로스나 어부가 회항하는 시점(視点)이어서 유별나다. 그게 항구도시만의 매력임은 뒤에 알았고, 이후로 나는 타지의 여행객들에게 부산을 제대로 보려면 뱃전에서 바라보라고 자신 있게 권유한다. - 남항을 거닐며
모든 연륙교는 욕망의 출발점이다. 절영(絕影)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섬에 태고로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말을 키우며 물고기를 잡고 밭을 일구면서 무시로 뭍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반면 뭍의 사람들에게 섬은 환상과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서로의 욕망들은 연륙(連陸)을 이룸으로서 해소됨직하였을 터, 다리의 탄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하나의 소통을 얻고 다른 하나를 단절시키는 일이다. 같은 물살의 바다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큰 배는 섬의 뒤편을 돌아 더 큰 항구로 접안해야만 했으니 이른바 ‘북항’으로 자연스레 무역과 산업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반면 다리의 남쪽은 여전히 태고로부터 이어져온 고기잡이와 사람들의 잡다한 일상이 영위되는 어항으로 남았으니 단절임에 분명했다. - 영도다리
시간을 정지할 순 없을까? 불가능하지만 늘 아쉬운 바람이다. 흐르지 않는 시간은 어디에 존재할까? 내 마음속일까? 아니면 마음을 비운 후, 빈 가슴의 바깥에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광상사 앞 건널목을 건넜던 것 같다. 그래 맞아! 삶은 길과 같은 것이야. 건널목과 같이 가끔 멈추어야 하는 곳이 있고, 이내 또 바삐 걸어가야 해. - 건널목을 지나며
나는 세월이 흘러도 이 해변에서만큼은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곳의 변모는 마치 내가 나이가 들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속도에 맞추기라도 하듯 실로 천천히 이루어졌으며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나는 이 바다의 변모를 부정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여전히 친구같이 곁에 선 풍경으로서 사랑하고 자랑한다. - 광안리 풍경
시의 예산이 충분히 닿지 못한 탓이 더 클 테지만, 지나치게 세련된 공원으로 조성되었더라면 공원을 묘사하려는 나의 노력은 그저 세련미에 대한 공치사에 머물렀을 터이니, 그러한 수더분함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말하자면, 화장하지 않은 아낙이거나 둥근 뿔테 안경을 걸친 노인, 그렇지 않으면 실직의 고통에서 잠시 빠져나온 노총각의 운동복 차림의 어슬렁거림이 더욱 어울리는 그러한 장소이더란 것이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늘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초라한 모습의 연속이다. 구두에 광을 내고, 잘 다림질된 외출복을 차려입고 선글라스라도 걸칠 수 있는 날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면 진정한 휴식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가 분명해진다. 거칠고 정리되지 않았다 하여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 수영사적공원, 그 푸근한 손길로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조개와 장어를 실컷 구워 먹을 수 있는 곳이 더러 있었으면 한다. 가족이 대부분인 손님들 사이에서 소주 한잔 들이켜며 오랜만에 호기를 부리는 중년의 모습이 백열등 불빛 사이로 간간이 비쳤으면 한다.
나는 이 마을이 좀 덜 세련된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길 바란다. 오래된 작은 집들이 조금씩 수선되어 불편하지 않았으면 하고, 길이 깨끗해지고 불이 더 밝았으면 하는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차츰 받아들여지는 그런 마을이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이곳 사람들이 바다를 등지고 고개 너머로 이사 가는 일은 더더욱 없었으면 좋겠다. - 청사포에 부는 바람
“엄마, 우리 동네가 못 사는 동네야?” 벽화가 그려지던 마을에 사는 한 아이의 질문이다. 참 인상적인 말이다. 나는 이 질문에 벽화마을의 본질적인 문제점 모두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민이 사는 곳이 아니라 객이 보러가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데에 대하여 아이가 불편을 토로한 것이다. 마치 치부를 들켜버릴 듯한 아슬아슬함이 매일 존재한다면 어른들이라 고 하여 다를까? 그게 살기 좋은 동네인가?
“벽의 반대편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삶이 살펴지기는 하는가?” 이질문이 더욱 중요하다. 벽화마을의 본모습이 마을 가꾸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을 숨기기의 수단이라는 역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업으로 인하여 실제로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보면 가꾸기와 숨기기의 진실이 밝혀질 테지만, 더욱이 주민의 삶을 볼모로 홍보와 관광을 구상하였다면 문화의 탈을 쓴 정치적인 행위는 아무리 보아도 해악으로도 읽힌다. - 벽화 마을에서
스케치북을 열고 오래된 도시를 그린다. 어차피 이 시대가 프로메테우스의 치열한 의지를 망각하고 있을 바에는, 새롭다는 것이 오히려 진부하다고 여긴 이후 뜬금없이 낡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연모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
나의 건축 또한 서서히 고치고 넓히고 하는, 작은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리라. 그래! 삶의 스토리를 만들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던 경험과 흔적, 잊힌 그것들이 주는 신선한 역설이 아닌가. - 오래된 것들을 향한 연모
집이란 무엇인가? 좀 더 철학적으로 말하여, “집은 하찮은 벽돌과 나무 둥치에서 시작해 하나의 작은 우주가 형성된 것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우주란 내 눈과 가슴과 상상 속에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니 크기가 더 큰 집을 일컬어 작은 우주라 한 것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리라.
모든 사람의 희로애락이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일생의 대부분을 그것의 획득과 유지와 발전에 쏟고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까? 건축은 그런 집을 만드는 행위이다. 그래서 “새롭고 현대적인 것만이 건축인가?”라는 의문은 다소 빗나간 것이다. - 매축지 마을에서
역사는 길다. 그렇지만 나는 한 시점의 장면을 기록하려 한다. 내가 그러한 지점에 존재하였다는 개인적 확인이다. 다시 말하여 ‘매축지 마을’이 없어지던 역사의 어느 시점에 내 두 발로 서서 “사라지는 것은 모두 슬프다.”라고 진혼곡이라도 불러주려 했던 것이다. - 어떤 진혼곡
나는 산과 바다에서 이 도시를 바라볼 때마다 카프카의 벌레와 쥬만지의 코끼리를 발견하게 된다. 질식할 만큼 꽉 차버린 집들과 줄어드는 도시의 인구. 용적의 욕심에 건물은 도로에 큰 그늘을 만들고, 좁은 틈으로 건물 사이 바람은 드세어졌다.
사람들은 높은 집과 좁은 방에 갇혀 버렸고, 밖으로 나오면 길을 잃는다. 재개발 열풍이 도시의 질서와 사람의 삶을 흩트려 놓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 도시에 대한 동물적 상상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곳이 지켜온 이미지와 스토리, 역사와 장소로서의 도시적 맥락에 집중하여야 한다. 하물며 난전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머~언 미생물 시절의 그리움에 빠져드는 한 생명체의 본능도 보살필 수 있어야 한다.
도시는 생명체가 이루어낸 또 하나의 생명체이며, 그 근원은 개개 시민의 가슴에 닿아 있다. 도시의 끝은 그 출발점이며 생장점이다. 끝이면서 끝이 될 수 없는 그 지점, 거기를 틀어막고 숨통을 조여서 어떤 도시로 만들려는 것일까? - 바다의 끝
물론 건축은 주인인 소유자가 있고 구축에 조력하는 건축가가 있으므로 개별로 평가되고 다루어져야 함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이는 건축이 하나의 창작품, 나아가서는 예술활동의 일환으로 다루어지며 가치평가되어도 무리가 없다는 말이 되며, 대다수의 건축가는 이런 태도에 강한 집착과 애정을 보인다.
하지만 건축은 사람의 삶을 다루는 것이며, 그 삶이란 사회가 조직화될수록 개별의 삶에 국한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물건으로서의 건축은 언제든지 그 주인을 바꿀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적 관점에서 불특정 다수의 삶이 이런저런 경로로 관여되기 때문에 개별로서의 가치 외에 사회적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 도시의 집을 내려다보다
빈집의 원인은 단순하다. 쓸 만한 집이 있음에도 그 집을 밀어내고 너도나도 새집을 지었던 것의 결과다. 그 배경에 신도시, 재개발, 재건축과 같은 화려한 수사가 있었다. 더 깊은 곳에는 자본의 음험한 미소와 편리한 삶에 대한 무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사회문화적 오류, 그에 올라탄 정부의 정책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목표로 하던 ‘1가구 1주택’의 문제가 벌써 해소되었음에도 집 생산의 브레이크는 작동하지 않은 데에 있다. 민간은 지구단위계획을 계속 시도하고 정부나 지자체는 지속해서 신도시 정책을 발표한다. 임시방편이 목적이 아닌지 의심되는 가운데에 시민들은 여전히 부동산 불패를 철석같이 믿고, 양측의 상승작용으로 집의 생산은 좀체 멈추지 않을 것 같다. - 빈집에 대한 생각
아침 산책길을 폐선부지에 덩그러니 남은 해운대역사 쪽으로 정했다. 내일은 송정역사 쪽으로 걸어볼까? 이 도시에도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도시재생의 장소들이 많다.
이번 지방선거의 쟁점 중에도 도시재생이 있었다. 부디 그것들이 대단위 토목, 건축 사업을 의미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들이 깔깔거리고 어른들이 그것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소박한 장소로 환생하였으면……. 영리한 건축가들의 빛나는 활약을 기대한다. - 아름다운 재생
건축의 높이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뽐냄과 독점이다. 뽐냄이라 하면 남의 눈에 잘 드러남으로써 돋보이려는 행위이다. 때론 기술과 결합하여 시각적 표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 욕망은 일차원적이다. 높이를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려는 행위만큼 단순한 발상이 어디 있을까? 일견 천박하고 비예술적이다.
독점의 문제는 좀더 심각하다. 대체로 고립적 영역을 만들고 풍경을 사유화(私有化)하려는 이기심에서 출발한다. 때론 욕망이 지나쳐서 자신 외의 다른 이들의 처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적 문제를 야기하기 일쑤이며, 늘 사회적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욕망은 지극히 독선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민주적이다. - 욕망이라는 이름의 높이
가리왕산 숲을 베고 들어선 동계올림픽 시설물은 곧 텅 빌 것이며, 단장되었다고 주장하는 강은 계속 썩어갈 것이다. 1년에 한 번 행사를 치르는 전당은 여전히 시민의 주머니를 털 것이며, 한 도시에 세 개나 되는 야구장이 또 어떠한 부를 가져다줄지 의문이다. 역사를 허물어 구획해 놓은 재개발이란 투기의 바다에는 어떤 변종의 물고기가 입질할 것인가?
그럼에도 정부는 개발을 전제로 한 경기부양책을 또 준비할 모양이다. 의문에 앞서 가슴이 아프다. - ‘작은 건축’에 대한 생각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나 보다. 사진, 건축, 그림에서의 내 관심은 여전히 그림자다. 특히 내 건축에 충분히 변주되지 못했던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생각해 보니 수필에서 썼듯이 빛과 그림자가 동체였음은 사실이었다. 그림자는 유형의 실체를 만들지만, 빛은 좀체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을 뿐. 하지만 그림자가 빛의 존재를 낱낱이 폭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 아쉬움의 실체. 내 욕망이 빛이었다면 그림자는 내가 이룬 건축이 아니었는가. 좀체 버리지 못하는 나의 미련 속에 건축이란 그림자는 여전히 짙다. - 그림자 놀이
그 책 이후에 일어난 이미지에 대한 내 생각의 진보였는지는 모를 일이나 나는 결국 무겁게 들고 간 카메라 가방을 열지 않기로 하였다. 셔터의 순간이 ‘찰나의 동결’이라 비하되고, 찰나의 결과물로 집적된 오랜 앨범들의 부피와 그 무거운 이미지가 조종하던 내 연필의 무게가 떠올랐다는 것은 지난 시절의 내가 찰나의 노예였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숙소에 가서 둔한 필기구로 그림 몇 장을 상상으로 스케치했고, 집으로 돌아와서 선으로 잡은 윤곽 속에다 물감을 채움으로써 대가의 건축은 겨우 기록되었다. 이미지 포착에 관한 전략의 변화가 분명했다. - 동결되지 않기
아무리 보아도 지금까지 우리의 태도는 과했다. 우리가 다루었던 땅, 건축, 인테리어, 생활도구. 그 모두 우리가 조금 더 앞을 예측할 수 있었다면 절제하고 조절할 수 있었던 바였다. 그게 먼저 지녔어야 할 가치가 아니었을까?
생산자인 우리가 사용자에게 ‘더 높게, 더 넓게, 더 화려하게’라고 말하기에 앞서 이런 말들이 먼저 우리 입에서 나왔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집이 필요 이상 클 필요가 뭐 있어요? 오손도손 모여사는 게 가족입니다.”
“추우면 옷을 좀 더 입으면 되지요.”
“윗집 소음이 심각하면 잠시 밖에 가나서 산책이라도 하시지. 허허~.”
- 위기의 지구와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