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마침 유리창 밖에서는 크레인에 또 다른 간판 글자와 인부가 실려 다시금 공중으로 오르는 중이었다. 연주는 잠시 눈을 감고 날아오르는 상상을 했다. 코끝에 따스한 바람이 닿는 듯했다.
“저기요, 잠깐 나와보세요!”
인부 한 사람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연주는 눈을 떴다. 그가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어느새 크레인은 기다란 팔을 접은 채 갓길에 주차돼 있었다. 그녀가 건물 밖으로 나서자,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낮인데도 LED라 그런지 환하게 빛을 발했다. 어닝에는 이원시의 심볼과 미류동 주민센터라는 문구도 새겨져 있었다.
연주는 이제 막 글자를 깨치기 시작한 아이처럼 소리 내 간판의 글자를 하나씩 읽어갔다.
“카. 페. 네. 버. 랜. 드.”
창세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연주는 그 엿샛날의 조물주 심정으로, 카페 네버랜드의 외관을 시작으로 내부를 찬찬히 훑었다. 자신이 일궈낸 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계획대로 될 줄만 알았다.
- p.29-30
― “여기 카페 네버랜드 실무 책임을 맡은 한연주 주무관입니다. 인사드리려고 데려왔습니다.”
옆에 앉은 송 과장이 연주의 무릎 근처를 툭툭 치며 신호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 생각에 취해 있었다. 또다시 송 과장이 입을 열어야 했다.
“동장님 딸과 동갑일 겁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올해로 임용된 지 10년 차고 실력도 출중합니다. 본인이 기획한 만큼 수행도 누구보다 잘 해낼 겁니다.”
한번 열린 생각의 문은 쉽게 닫히지 않았다. 그 안으로 연주를 계속 끌어당겼다. 그녀는 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생각했다. 저런 사람을 아버지로 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 딸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으며, 살아가겠지.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떤 걸 갈망할까.
동장은 송 과장에게 대뜸 물었다.
“프랑스에 있는 우리 주희? 아니면 일본 나가 있는 우리 서희?”
역시 그들의 삶은 자신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들은 부모에게 학비를 지원받아 외국으로 나가 필요 이상의 공부를 할 것이다. 자신처럼 대학을 자퇴할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 그들은 낭만으로 가득 찬 삶을 누릴 테니 본인처럼 무언가로 채우려 부단히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연주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앞니로 혀끝을 씹어대며 생각을 그만 멈추려 노력했다. 안 그래도 미운 아버지가 더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차녀 서희요.”
송 과장의 대답에 동장은 연주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마치 자기 딸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그러더니 대뜸 해바라기씨를 한 움큼 집어 연주에게 내밀었다. 송 과장은 또다시 그녀의 무릎을 쳤다. 그녀도 이번만큼은 그 뜻을 알아차렸다. 두 손을 가지런히 펼쳐 그걸 받아들었다. 동장이 말했다.
“잘했어. 앞으로도 잘하라고 주는 거야.”
연주는 손바닥 위에 놓인 그 어이없는 하사품을 바라봤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중국산 해바라기씨. 우글거리는 벌레처럼 보여 얼른 손을 오므려버렸다.
- p.43-44
― “뭔 다단계 총수여 뭐여. 이거 면접이여요, 교육이여요?”
여기 다른 노인네들과 일렬로 앉을 때부터 만영은 만사가 거슬렸다. 면접관은 계속 다단계 사업장 총수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교육조로 지껄여댔다. 카페 네버랜드? 가게 이름도 도통 입에 붙지 않고 어색했다. 소파는 딱딱하기만 하고 벽면에는 제주도도 아닌, 그렇다고 울릉도도 아닌 처음 보는 섬과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가장 질색인 건, 옆에 앉은 노인들과 자신이 같은 부류에 속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만영을 주시하던 연주는 불만 가득한 그 노인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이력서 파일을 뒤적였다. 이력서는 세 사람의 것뿐이었다.
“선생님, 성함이?”
“오만영! 나 이력서 안 냈는디. 오늘 연락 받아가꼬 그냥 왔어요. 뭐, 필요하믄 이따 써주고 갈게요.”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석재가 나섰다. 그는 대기업 입사 면접이라도 온 사람처럼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었다. 그는 기복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다. 교직에 종사했던 이였다.
“이분 말입니다. 큰 소리로 말해달라는 게 아니라 본인 청력이 좋지 않다는 말 같네요.”
석재는 제가 한 번역에 동의를 구하는 눈길로 기복을 바라봤다. 연주는 그제야 그의 불편한 사항을 눈치챘다. 기복은 이때다 싶어 노인성 난청이 있다고 정확하게 고백했다. 사춘기 중학생처럼 껄렁한 노인, 잘 못 듣는 사오정 노인, 어디 왔는지 상황 파악 안 되는 노인……. 이쯤 되자 연주에게 피곤이 급속도로 밀어닥쳤다. 그녀는 이력서 파일을 덮어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가운데 앉은
준섭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앞머리 사이로 보기 흉한 흉터가 드러났다.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냥 한 분씩 자기 이름과 나이, 그리고 이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소개해주시겠어요?”
연주가 후다닥 말했다.
- p.57-59
“그렇다면 3개월 뒤에 인건비나 운영비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해결책을 말씀해보세요!”
박 주무관의 총에 총알을 장전해준 건 다름 아닌 연주 자신이었다.
“네, 저는 해결할 생각이 없습니다.”
또다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박 주무관은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고 연주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자신이 공무 수행 중이라는 걸 잊었습니까. 무턱대고 국비를 그렇게 끌어와서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상대가 흥분할수록 연주는 도리어 여유로워졌다. 분노의 사막을 거닐다 우연히 마주한 오아시스. 그곳에서 목을 축이고 평온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연주는 발음에 조금 더 정확을 기하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시각에도, 그들은 스스로 해결책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이상의 경험이 있으며 적응하는 대신 새로운 환경을 창조해 낼 거라 믿습니다.”
사실 연주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절대!
“사업이 본래의 목적을 잃은 건 아니고요?”
적군들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연주를 압박했다.
“70대 그 이상의 노령자도 얼마든지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고 이에 적응하는 데 뒤처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것, 그게 이 사업의 목적이고 취지입니다. 단순히 매출이나 실적을 올리자는 게 아닙니다. 저는 카페 네버랜드를 통해 그걸 여러분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연주는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을 따라잡지 못했다. 오기에 취한 망언인지, 위기에서 비롯된 생존 본능이었는지 자신도 알 길이 없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시킨 건 그들의 젊음입니다. 젊음을 소실했다 하여 그들의 한계를 단정 짓지 말아주십시오. 그들은 카페 네버랜드 안에서 또다시,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을, 새롭고, 견고히,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누군가 짝, 손뼉을 쳤다. 그리고 짝짝 소리가 더 이어졌다. 연주는 곧 그 소리의 발원지가 이원시의 일 번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윽고 박수는 전파됐고 그 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매출도 상승하는 추세이니 3개월 정도면 분명 안정기에 접어들 겁니다. 그 후의 일은 그때 걱정하겠습니다.”
시장이 물었다.
“그들도 이 일에 만족합니까?”
연주는 그 질문만큼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 p.117-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