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만든다. 하지만 이 초예술은 초예술가가 초예술이라고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만든다. 따라서 초예술에는 어시스턴트는 있어도 작가는 없다. 그저 거기에 초예술을 발견하는 자만 존재할 뿐이다.
「거리의 초예술을 찾아라」, 27쪽
토머슨은 침묵의 존재다. 그 침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때린다. 깊은 울림을 준다. 일본에 있던 토머슨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무표정으로 끈기 있게 헛스윙을 이어가던 그 침묵, 우리는 거기에서 깊은 울림을 받았다. 그리고 침묵의 야구방망이가 가슴을 크게 때렸다.
「토머슨을 쫓아라」, 34–35쪽
초예술 물건은 모두 아슬아슬하다. 그 구조가 조금만 빗나가도 평범한 쓰레기, 평범한 장식, 평범한 예술 등 평범하고 당연한 세계에 속하게 되는데 아주 작은 부분이 이유가 되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초예술로 존재하게 된다.
「하늘을 나는 부인」, 89쪽
사실 초예술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그 물체를 앞에 두었을 때 가슴이 떨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고찰해 가면서 어떤 도구도, 부동산도, 예술도 아니어서 결국 초예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되어야 제대로 된 방식이다.
「버섯 모양 원폭 타입」, 199쪽
한 가지 당부할 말은 토머슨을 감상할 때는 토머슨 물건의 환경을 해치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물건을 넌지시 보는 것이다. 그 집에 사는 주민에게 “이거 뭔가요?” 하고 경솔하게 묻는 일만큼은 피하자. 그 물건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인에게 안겨주면 귀중한 토머슨 물건이 철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혹은 반대로 주인이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해 사람들이 더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저속한 가공을 한 나머지 결국 단순한 장식 물건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화려한 파울 대특집」, 298–299쪽
토머슨은 끊임없이 발견만 하는 일인데 발견에도 재능이 있고 개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려한 파울 대특집」, 309쪽
토머슨이라는 건 거의 섬뜩하다. 대부분 세상의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으므로 토머슨을 발견하는 일은 사체를 발굴하는 일과 같다. 가끔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유는 거기에 영적인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건물의 영혼이랄까, 공간의 영혼이다. … 우리가 토머슨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도 이 죽음에 대한 흥미일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분산되어 옅어지면서 공포가 흥미로 바뀌어 간다.
「조용히 숨 쉬는 시체」, 320–321쪽
토머슨이라고 하긴 했지만, 도시 안에서 찰나의 뒤틀림을 본 것일 뿐이다. 뒤틀린 빛은 다음 찰나에 도시 여기저기에 가라앉는다. 도시는 그 안쪽에 쌓이는 뒤틀린 토머슨을 끌어안는다.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대자연 안으로 질퍽질퍽 빠져들어 간다. 도시라는 물건은 대자연에 인류가 발생시킨 일시적 현상이며, 언젠가는 붕괴해 다시 대자연 속에 묻힌다.
「토머슨, 대자연으로 가라앉다」, 371쪽
이번 달은 중국의 토머슨을 소개한다. 그렇다고 만리장성을 능가할 만한 것은 아니다.
「중국 토머슨 폭탄의 실태」, 461쪽
우리는 자연이 부여해 준 호기심에 몸을 맡기고 물건을 발견해 왔다.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호기심 표출을 꺼리며 아무것도 접하지 않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는 어차피 자연 앞에 반드시 무릎을 꿇을 텐데. 그렇게 될 바에는 자연을 꾀어내 함께 시시덕거리는 게 더 재미있다. 유쾌하다.
「사랑의 도깨비기와」, 518쪽
지금까지 세상은 인류가 돌덩이를 쥐고 도구로 사용해 온 이래 물건은 도움이 되는 것과 도움이 되지 않는 것, 두 종류밖에 없다고 굳건하게 믿어왔다. 도움이 되는 것은 방망이나 계단이나 담이나 전신주 등 반드시 이름이 있었다. 그것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게 되면 이름은 사라지고 싸잡아서 쓰레기로 취급되었다. 즉 세상은 유용한 것과 쓰레기, 2대 진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 분명 토머슨 물건은 유용의 진영에서 버려졌지만, 쓰레기의 진영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그 중간 지대를 떠돌았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다.
후지모리 데루노부, 「겐페이 옹과 토머슨의 위업을 기리며」, 544–5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