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원리로 내면의 원기를 회복한 후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라!
“격정으로부터 해방된 당신의 내면은 난공불락의 장소가 된다.”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간결하게 적어 내려간
삶의 근본 원리들
‘로마 평화’(Pax Romana) 시기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그가 즉위한 이래 로마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인구의 절반이 감소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북쪽 이민족의 침입 또한 끊이지 않았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한 마르쿠스는 서기 180년 3월 17일 판노니아에 있는 시르미움(지금의 오스트리아 빈) 가까이에 있는 군 병영에서 죽음을 맞았다. 평범한 인간들이 겪는 인생의 기쁨도, 황제로서의 외적 부귀영화도 별로 누리지 못하는 고단한 삶 속에서,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마르쿠스는 틈틈이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남긴 『강의』의 구절들을 떠올리며 ‘자기 내면의 정신적 활동’을 기록해 나갔다.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를 소크라테스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헬라스어로 쓴 이 글의 제목은 ‘자기 자신으로 향한 것들’로 ‘명상록’이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자연재해, 전염병, 계속되는 이민족의 침입과 내란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평온과 안식, 자유를 원했을 황제 마르쿠스는 명예나 권력 같은 외적 조건에 매달리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통찰함으로써 스토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철학자로서 살고자 하였다. 12권 488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ta eis heauton; ad se ipsum)은 애초에 출판을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었다. 마르쿠스 자신의 ‘자아 계발’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의 기록, 즉 ‘철학적 일기’다. 그렇기에 그는 글 속에서 지난날을 회고하며 자신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떠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밝힌 후 그들의 훌륭한 점을 모방하도록 자기 자신을 북돋우고 있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말을 곳곳에서 상기하며 적어 내려간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을 통해 우리는 삶의 중요한 근본 원칙을 찾을 수 있다.
철학적 원리로 재무장하여 원기를 회복한 후
세상에 돌아와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라!
19세기의 시인이자 문화 비평가 매튜 아놀드는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를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세네카의 문장은 지성을 자극한다. 에픽테토스의 문장은 성격을 강화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문장은 영혼에 이르는 길을 찾게 한다.” 마르쿠스는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을 통하여 자신의 자아 속으로 깊이 침잠(沈潛)한다. 그는 어지럽고 타락한 세상에서 불안과 걱정을 잊기 위해 우리가 물러나 쉴 곳은 외부의 다른 어느 장소가 아니라 자기 내면이며, 정념을 바로잡고 파토스(충동)를 교정하고 이성적으로, 자연에 맞게 행동하여 튼튼하게 만든 나의 내면은 결국 누구도 부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채가 된다고 말한다.
푸코는 1~2세기 철학의 주요 특징이 ‘자신 안으로 물러남’ 혹은 ‘자아의 돌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내면으로의 이 물러남은 은둔이나 도망이 아니라 삶이라는 전장에 복귀하기 위한 일시적 물러남이다. 자신의 불안과 걱정을 잊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피정(避靜)을 떠나듯 철학자도 피정을 떠나지만, 철학자는 피정 장소를 외부에서 찾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는 말한다. 삶이 고달플 때는 잠시 내면으로 물러나서 철학적 원리로 재무장하라고. 그렇게 원기를 회복한 다음 세상으로 되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라고.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내면으로 물러나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때 준비해야 할 간결하고 근본적인 원칙들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의 곳곳에 펼쳐져 있다.
“세상의 사물은 영혼에 닿지 않고
걱정거리는 단지 마음의 판단에서 올 뿐이다.”
아크로폴리스(성채)는 스토아식 용어로 ‘마음’ 또는 ‘지도적 이성의 중심부’(지휘 사령부)를 가리킨다. 이 은유는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세네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현자를 지키는 저 성벽은 불꽃으로부터도 침략으로부터도 안전하다. 어떤 진입로도 허용하지 않는다. 높이 솟아 있고, 난공불락이며, 신들과 나란히 선다.”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우리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대비책은 나의 자아인 ‘폴리스’를 공고히 하여 난공불락으로 만드는 것이며, ‘인간의 마음을 보전하는 것은 그 사람의 판단(생각) 외에는 없는 것이다’.
세상은 어지럽고, 분명히 타락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물러남은 전투에 복귀하기 위해 자신의 ‘근본 원리’를 고려함으로써 자신을 재충전하는 일시적인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 마르쿠스의 입장이다. 그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에 충실한 황제였다. 그가 권장하는 근본 원리를 참조하는 수행은 ‘불교식의 명상 수행’과는 다르다. 스토아적 물러남은 긍정적인 철학적 원리를 마음에 새겨 놓는 것을 지향한다. 자신의 철학적 믿음을 재차 확인하고, 다시 고쳐 쓰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철학적 원리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손 가까이에 준비해 두어야 한다.
“네가 어떤 외적인 것으로 괴로워한다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관한 너의 판단이다. 그런데 그 판단을 금세 없애 버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또 너를 괴롭히는 것이 너 자신의 성격에 있는 그 무엇이라면, 너의 믿음을 바로잡는 것을 누가 방해하겠는가?”(272쪽)
‘우주는 변화고, 인생은 믿음이다’라는 데모크리토스(데모크라테스)의 명제는 마르쿠스가 앞서 자신에게 내놓은 원리(원칙)들에 대한 간결한 요점 정리라고 할 수 있다. 마르쿠스는 손에 가지고 있어야 할 철학적 원리들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로의 물러남’의 기간이 지나면, 스토아의 자연학과 인식론에서 받아들인 ‘우주는 변화고, 인생은 믿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상생활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그의 윤리적 기획의 핵심이며, 인간의 죽음 문제와 삶의 일시적임(덧없음)이라는 주제를 움직이는 토대가 되고 있다. 마르쿠스가 이 ‘철학적 일기’에서 스스로 위안을 받기 위해 다루는 첫 번째 항목 주제는 ‘죽음’으로, 전체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철학이 죽음에 대한 준비라는 플라톤의 주장을 받아들였는데, 마르쿠스 역시 그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빌 클린턴이 1년에 두 번씩 탐독하는 책
‘명상록’이 유럽 세계에 나타난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수 세기 동안 그의 ‘철학적 일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존재 이유를 가져다주었고, 지구 곳곳에서 만들어진 여러 번역본을 통해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일 년에 두 번씩 탐독한다는 빌 클린턴을 비롯하여 세계 정상급 지도자, 석학들이 마르쿠스를 읽고 그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긴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쿠스는 오늘날에도 생생히 살아 있다’. 헬라스어 원전에 충실한 번역과 풍부한 주석, 연보와 찾아보기가 첨부된 불멸의 고전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을 읽어 나가다 보면, 마르쿠스와 더불어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