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랬구나>의 서평을 대신하여’
정경문화원 정항석 박사
이글은 저자의 자서전적 삶에 대한 회한을 비평적(Review)인 측면에서 필자가 다가가는 것임을 먼저 밝힌다. 우선 전제될 것은 이렇다. 독자의 자의적 느낌 혹은 냉철한 문학적 비판과 평론에 앞서 그러한 것에 대한 기준의 선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며 이 리뷰가 그러한 기능과 역할로 제시되기를 바란다.
삶이 그렇다. 어떻게 살아도 주관적 해석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그러한 것들을 문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본다는 건 막힌 길에서 멈추어 서성이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더러 누군가의 일생을 읽거나 들었을 때 무언가 해주고 싶으나 개개인의 삶을 다수의 것으로 풀어내기가 수월하지 않으며 대체로 그럴 수도 없으므로 섣불리 위로와 위안을 개입시킬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 시각에서 <그래. 그랬구나>에서 보이는 요소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먼저, 스스로 자위적 통로에 넣어 그동안 살아온 i)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반추하려 한다(tries to reflect on his/her life positively)는 것이다. 더불어 그것이 얼마나 앞으로의 삶에 효율적이며 효과적일지는 미지수이나 적어도 ii) 내일을 향한 심리적 통로는 밝은 빛을 발산할 희망을 안고 있다(hope). 그리고 iii) 지나온 삶의 자취가 넘치게 가지고 싶은 과욕에 부화가 걸려 오류가 있었든 혹은 그렇지 않든 앞날을 향한 걸음에는 ‘이로움으로 작용시킬 수 있다(worked advantageously)’는데 주목의 요소가 있다. 이 글은 이 세 가지에 기초하여 아래와 같이 나열한다.
필자는 클로버가 많은 곳에서 네 잎의 클로버를 못 찾았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리뷰를 출발시키고 싶다. 행운이 있어야 하는 삶이 과연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이미 행복이기 때문이다. <솜다리 사연>에서 저자가 가지는 일상의 평범함이 그렇다.
허물없이 사는 사람 몇이나 될까/
후회 같은 건 하지 말자/
우린 살아 있잖아/
그리고 넘치도록 채운 적도 없잖아/
들풀을 볼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린 알고 있잖아/
시샘 바람에 떨고 있는 맺은 꽃이 안 서러워/
차라리 빨리 피고 져버렸으면 좋겠다 싶어도/
우린 하늘을 원망한 적 없잖아/.../
우린 또 그렇게 그렇게 사랑할 테니/
이 작품에서 저자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슬쩍 엿보게 한다. 여성적 정체성을 꽃으로 나타내며 여성으로서 살아온 것에 순간적 원망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일상을 행복과 희망찬 날들로 점철하지는 않았어도 그러한 측면에서 서려는 것이 짙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삶이 아프지 않도록 스스로 다독인다. ‘우린...그렇게 사랑할 테니’라는 표현은 비유적이지 않으나 애틋하게 독자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주관적 토로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저자만의 것은 아니라는데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도 역시 존재한다. ‘어떻게 그리고 왜’ 라는 측면에서 특정의 일화는 누락되었으나 공감의 범주를 넓혀주며 한국의 근대화와 사회화 과정에서 여성들이 가지는 사회적 참여에 대한 제한이 <엄마라는 두 글자>에서 얼핏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참 먼 길 돌아왔어라/
또다시 엄마가 되어도/
웃어줄 이들 있음에 사랑이라 말하리라/
그것이 저자가 이르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라는 데 다수의 공감력을 획득하는데 실패했더라도 주관화에 대한 1인칭적 관심과 지지할 표시를 하는데 충분하리라 본다.
실상 늦게 핀 꽃의 향기가 더 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 마라톤에 비유되는 인생에서 완주한다는 건 분명 박수 받을 일이며 칭찬할 거리다. <휴식>이 그렇다. 하고 싶으나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며 쉬이 뜻으로만 살기 어렵다는 건 살아갈수록 더 다가온다. 다 아는 것이나 또 쉬이 마음에 새기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나이든 것과 무관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요소를 많은 작품에서 자주 누출하고 있다. 단지 쉬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갈 길을 재검점한다는 것도 함유하고 있다.
때로는 너무 앞선다/
푸른 목청으로 생떼를 써 봐도/
흙더미를 감싸고 눈을 감아주며/
꽃밭은 알고 있었다/
마음으로 가다듬으며/
거스를 수 없음이 있어/
절기를 이길 수 없고/
기다려야 올봄을 위해/
충분히 쉬어야 한다는 걸/
물론 우리는 안다. 이러한 표현은 사회를 향한 선언은 아니다. 저자 자신을 위한 다짐이다. 굳이 세월을 서둘러 맞을 것도 아니며 보낼 것도 아니라는 메시지다. 다만, 사회적 관념이나 통념을 들이밀지 않아도 바쁘게 서둘러도 때가 되어야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경험자가 일러준 것으로 보면 무방하다. 경험의 누적에서 오는 것이나 저저는 한 번 더 이를 짚어주기 때문이다. 가을에 열린 과실수를 봄에 쳐다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나이의 흔적이다. 또한, 언제 어느 때에 쉬어야하고 쉬지 않을 것임을 수용하고 있다. 삶의 긍정성이다.
반복되거니와 이 시집은 필자의 1인칭적 관점에서 투사된 감성의 모듬이다. 틀림없이 그렇다. 그렇다고 혼자만의 사색을 위한 것이라면 문학적 요소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언급된 i), ii) 그리고 iii)의 측면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의 동화를 뜻한다. 푸름과 청록의 수목이 같지는 않으나 닮아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 다음의 작품은 저자가 앞날에 대한 것을 온전히 긍정성으로 그리고 희망적으로 보는 것이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갈대꽃이여 안녕>에서 알리고 있다.
혼자 산다는 것은/ 물안개 너머로 오는/
풍요로움을 즐기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는 홀로 걸어가야 할 때/
은빛 갈대꽃 자유를 노래하고/
처마 끝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조용히 두 손 모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삶은 혼자가 엮어가는 예술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이러한 선언적 문구에 이율배반이 숨겨져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저자 역시 이를 은익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매우 자연스럽게 자연의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동시에 경험의 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연의 순응적 모습을 고이 드러낸다. ‘자유를 갈구’하면서도 처마 끝 물방울 소리에 ‘조용히 두 손 모으며’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얻어야 할 것을 위해서 ‘갈대꽃’처럼 변해가는 모습에도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위축되는 생활에도 이타성을 허물지 않기 위해 자신의 길을 조용히 추구하는 것이다.
예서 생각하자. 언어의 미학적 예술로써 시(詩 poem)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 허나, 그렇고도 회피할 건만은 아니다. 하여튼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같은 어휘, 낱말, 그리고 단어 등으로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그 차이로 나타내어 언어를 표현하는 예술의 한 양식으로 시가 인문학에 차지하는 것은 그 오랜 시간만큼 다양하다. 포괄적인 측면에서도 시학(詩學)이 언어와 문자 그리고 기호 등으로 예술성을 구현하기 위한 미학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한 범주에서 ‘어쩌면’ 그리고 ‘아마도’도 아니고 ‘부족하기’보다는 ‘담을 수도’ 또 ‘견주는 것도’ 할 수 없다. 분명 그렇다. 무엇이 미학적 요소로 어떻게 승화되는지도 누구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다만, 주관화의 개관적 투사를 굳이 어렵게 할 것인가 하는 투정에도 우리가 생각할 건은 적지 않다. 기존의 영역을 허물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름답고 고우며 관계의 응집력을 줄 수 있는 어휘들을 사용하므로 써 평범한 일상 속에서 순수의 주관화가 가지는 의미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사막의 한 송이 꽃에게도 그 의미는 남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흘러간 것에 대한 추억이 아름답건 그렇지 않건 가슴에만 간직하며 두고 싶지는 않을 건 많다. 그래서 가슴에만 간직하고픈 것이다. 아프기 때문이다. 그 아픈 곳을 치유하기 위한 대안으로 그럴듯하게 가리기 보다는 기억했던 것들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려한다면 지난 삶의 흔적들은 삶의 주요지표로 재조합 될 수 있다. 너무 아파서 잊지 못한 그리움도 사랑이라면 그렇지 않을까! <우리 둘>이 그렇다. 필자가 지난날에 저자의 느꼈던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사실 그럴 것도 없다. 독자의 하나로써 필자 역시 그리고 누가 들어도 저자의 온전한 삶을 이해했다는 건 납득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구름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아름답도록 그립다고 하면 그럴까!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며/
모자라서 오래 사랑할 수 있다면/
난 기꺼이 모자란 채로 살겠어/
지금 이 순간 살아 있고/
우리에게 사랑이 넘치게 있잖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언인가! 미학적 예술의 추구는 때로는 환희와 같은 환대를 갈망하는데 있다. 부족한데서 오는 상실감을 사랑으로 채우며 삶을 영위하겠다는 저자의 긍정성의 발로이다. 상실의 요소를 상쇄할 재료로 담아두는 지혜가 재확인된 셈이다. 단지 표현으로만 그쳤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만큼 실천적 요소를 확인하는 것은 저자의 몫으로 돌린다 하여도 ‘모자라서 오래 사랑할 수 있다면’은 물질적 충만이 정신적 혼돈으로 이어지는 요즈음에서 되풀이되어도 좋을 듯하다. 이러한 표현은 읽은 이로 하여금 자성적 시각을 준다. 이러한 풀이는 저자에게 해당할 것이나 <어머니의 손톱 I. II> 그리고 <어느 눈물에는>에서도 짙게 드러난다.
물론, <그래. 그랬구나>의 제목이 주는 뉘앙스는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걸을 다 받아주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하는 것인지는 저자만이 알 것이다. 긍정성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러한 대목을 짐작하게 하는 <노송 I.II>이다.
소나무는 말이 없고/
나는 잠시 그의 등을 빌린다/
실상 소나무는 저자의 정체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노송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본문에서는 소나무라고 하였다. ‘나이 들었다’라는 걸 감추려 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나타내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등을 빌린다’라는 현 시점에서 자신을 수용하려는 것으로 현재적 관점에서 보아 자신의 형편을 귀추(歸趨)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념의 응집은 <괜찮아>로 이어진다.
그래도 괜찮아/
혼자는 혼자가 아니야/
이렇게 내 마음 들여다보고 말 걸어주는/
달빛, 네가 있잖아/
살면서 한번쯤 아프지 않을 삶은 없다. 저자는 이를 넋두리하고 있다. 뭐 그렇듯이 푸념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은 듯하다. 꽃도 그렇고 빛을 쏟아내는 별도 그렇다. 각기 자기의 빛의 농도와 채도만큼 빛날 것이지만은 이를 바라보는 이들은 꽃과 별에 대하여 각기 자기가 받아들일 만큼 각자의 상념으로 포용할 것이다. 그리고 잊지 않을 것은 <지금처럼>과 곳에서 같은 앞서 언급했던 마음일 것이라고 필자의 상념이 머문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살아 있어라/
처음처럼은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안부를 묻는 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지금이 가장 아름다워라/
소중한 지금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존재하는 뉘라도/
지금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아름답도록 슬플까! 과연 이러한 감정이 가능할 것인가! 이 작품은 저자가 병상에 있을 때 가지던 느낌을 옮긴 것이다. 몹시 앓던 이들은 쉬이 공감할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일이나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희망의 속성은 아니라고 하여도 어휘들에서 비취는 2차적 해석을 건져야 한다. 삶에 대한 본능적 승화까지는 아니어도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위적 증발은 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데 다시 읽게 하고 있는 탓이다. <오래된 감나무> 역시 그렇다.
작년과 다르게/
나뭇가지는 기울어져도/
그 오래된 감나무에도 꽃은 핀다/
다만, 공감의 항목에 해당할 수 있는 있으나 표현의 감동을 동반한 공유의 경계에 이르지 못함이 아쉽다.
늘 그러하듯 얼마나 더 세월을 보낼지 알 수 없다. 여전히 그럴 것이나 자기 안에만 갇히지 않으려 한다면 이타성을 확보할 수는 있다. 옆에 있던 꽃들이 향기를 피우지 못했다면 같이하려는 마음을 보이려는 것만으로도 주변과의 어울림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늦게라도 알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은 ‘팔을 벌리고 상념에 행복해한다’라는 <흰머리 소녀>와 <아카시아 꽃>에서 드러나는 바, 지내온 날의 회한과 추억과의 회우를 그저 가두지 않고 노출하려는 자의적 풀이에 따른다. 필연, 저자의 인식론적 고백일 것이다. <익었다는 말> 역시 그렇다. 『그래. 그랬구나』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결론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필자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렀다. 정작 저자가 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그것도 온전히 내 것은 아니다/ .../
오늘 하루도 살아있음에 감사할 줄 알 때/
나이는 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걷다가 멈추는 날까지/
신발 끈 조이며 길을 나설 때만이/
나이를 넘어설 수 있다/
세상을 향한 포고는 아니다. 그저 소소하게 웅크리며 자신에게 하는 속삭임처럼 ‘그래. 이 나이에도 나는 할 거야’, ‘아니 할 수 있어’라는 자기 주문적 노출이다. 참으로 순수하다. 삶과 지내온 그 흔적들에서 더 아름답게 보듬고 다듬어야 할 것은 더 있다는 희망과 긍정성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거리를 주고 있다. 일상의 평범함이 주는 원동력으로 풀이된다. 굳이 난해하거나 풀이하기 쉽지 않은 사색의 늪과는 멀다. 저자의 그 생각이 이기적이지는 않다. 순수함은 나이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세월에 대한 미련이 없는 이는 없다. 어떻게 생각하든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변함이 없다. 다만, 세월은 독이 아니라 약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필자는 저자를 포함하여 독자에게 자신이 가지는 상상력에 정원을 꾸며보라고 권하고 싶다. 형편에 따라 이루고자 하는 의지의 결과가 늦게 나타날 수는 있어도 늦게 핀 꽃에도 향기는 분명 있다. 누구나 세월을 허투로 보내려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늦깍이로 글쟁이의 대열에 들어선 용기는 가상하고 그 뜻에 빛은 피어나리라고 이르고 싶다.
또한, 필자는 말하고 싶다. 지나간 세월과 그 흔적에 시로 인생을 엮는 일은 나름 의미가 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권하며, 그리고 수 세월에 걸쳐 무수한 이들이 읽는 작품은 훌륭하다. 비단 그렇지 않다고 해도 좋은 뜻으로 시작된 작품은 그것으로도 가치는 충분히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다. 커다란 이정표와 같은 돌은 아니더라고 큰 돌과 큰 돌 사이의 빈틈을 채우는 조약돌의 그 쓰임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면 된다고 이르고 싶다.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며 희망과 긍정성을 품고 사는 이들의 삶은 아름답게 익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시(詩)에 대한 관심을 뒤늦게 가지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글쓰기 관심에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기실 저자도 아는 것이나 노파심에 언급하자면 글쓰기의 완성은 기초에서 출발하고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을 새겼으면 한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듯이 익숙하지 않는 것은 시도할 시간이 짧음에서 오는 것일 뿐 끼적이고 여러 번 읽고 또 읽으면서 퇴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그만한 보상이 수반된다. 또한, 주관적 집념과 기호, 싱징, 그리고 어휘들의 나열 등 객관적 요소는 차별화되는 것이기에 차후 이의 거리를 좁히는데 관심을 둔다면 군데군데 보이는 문단과 행의 위치에서 보이는 부조화를 다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누구라도 그렇다. 젊은 날의 초상화처럼 마음에 부풀어진 상상력과 비구상의 아름다움을 기록물로 우려내고 싶을 것이다. 점점 세월을 보내고 그 흔적들이 부끄러운 것이어도 자신의 것이고 그것들 모두 소중한 삶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에 찬사를 보내며 『그래. 그랬구나』를 통해 지나온 세월에 대하여 반추해볼 기회는 저자만이 아니었다고 리뷰를 마치고 싶다. 시를 끼적이면서도 인문학이라는 거창한 범주에서 얼마나 멀리 그리고 가까이 있는지 보다는 『그래. 그랬구나』가 따스한 마음으로 내어주는 것에서 출발했다면 그것으로 언어의 미학적 예술로써‘시(詩 poem)란 무엇인가’에 대한 온전한 답이 되지 않아도 해답을 찾는데 도움은 될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는 말도 뺄 수 없다.
끝으로 나와 누군가를 포함하여 뉘라도 지나온 삶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지내온 세월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란 때론 아픔이고 때론 기쁨이지만 아픈 날보다 기쁜 날이 더 많을 것이다. 마음먹기에 달렸어도 그렇게 믿어야 산다. 주지하다시피 지금 이 순간은 늘 새로운 향기를 피울 수 있는 시간이다. 행복은 나이와 무관하며 뜻을 가지고 앞날의 희망에 긍정성을 더하는 곳에 행복이 있었다. 이를 새삼 알려준 『그래. 그랬구나』에 감사를 전하며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저자의 순수한 마음이 아름답게 전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