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부터 2015년까지 질곡의 근, 현대사를 헤쳐 온 아버지에게
막내딸 ‘최민희’가 글로써 말을 건네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는가. 같은 부모지만,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공유하는 쪽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다. 그렇기에 자녀에 대한 부모의 헌신적 사랑은 주로 모성애를 전제로 묘사되었다.
물론, 아버지 혹은 부성애에 주목한 다양한 책과 영화, 드라마 등이 등장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머니와는 다른, 조금은 낯설고 먼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다.
과연 그렇게 ‘아버지’라는 존재가 자녀들에게 낯설고 먼 존재인가. 그 시대의 여느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요일 저녁마다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통해 역사적 상식 혹은 세상사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던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막내 딸’이 과거의 추억들을 토대로 기록한 내용 속에서 만나는 아버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대중들에게 ‘촛불 국민 언니’로 널리 알려진 정치인 최민희는 2남 3녀의 막내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1924년에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무 것도 모를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가게 되었고 20살에 ‘귀환 동포’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로 고향에 돌아와서 2015년까지 역사의 아픔과 한 개인으로서의 실존적 삶, 가장으로서의 무게로 어깨가 처지고 등이 휠 것 같은 순간을 슬기롭게 헤쳐나왔다.
그녀가 떠올리는 어린 시절의 풍경에서 등장하는 것은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과 다양한 부업을 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삶을 꾸려가느라 동분서주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대학에 들어가서까지 아버지와 함께 살았음에도 막내딸이기에 자식과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에 대해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지내왔다.
그런 그녀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단도직입적이고 쿨한 분’으로 기억하던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뒤인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사면이 되지 않아 마음이 산란한 시점이었다.
마음이 산란하고, 버티기 힘들었던 시점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시작한 60대의 막내딸은 아버지의 유년시절부터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 전부를 하루하루 되짚어보며 그때는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운정과고운정이 뒤얽힌 아버지와의 추억을 돌이키면서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아버지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건넸다.
책 속에서 만나는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
‘나의 인생 에피소드’라는 부제가 붙은 《아버지》는 1924년에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무 것도 모를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가게 되었고 20살에 ‘귀환 동포’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로 고향에 돌아와서 2015년까지 역사의 아픔과 한 개인으로서의 삶과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2남 3녀의 자녀를 키운 어느 아버지와 그러한 아버지를 회고하는 막내딸과 가족들의 기억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책에서의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단도직입적이고 쿨한 이미지’로 대표되지만 살아남아서 자녀들을 건사하기 위해 정직하고자 애쓰며, 청렴하게 살아야 했던 모습,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자녀들의 일에 웃고 우는 여느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일요일 저녁마다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통해 역사적 상식 혹은 세상사에 대한 자녀들의 시야를 넓혀주던 ‘자상한 아버지’이자 고단한 삶을 함께 견뎌내는 아내 편을 드는 남편, 손자들에게는 ‘구두쇠 할아버지’로 기억되는 다양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버지이기 전에 ‘비상한 두뇌를 가진 남성이 공직에 몸을 담아 자녀들을 건사하기 위해 정직하고자 애쓰며 청렴하게 살아야 했던 모습’에서는 자녀들을 건사하기 위해 자신을 절제할 수밖에 없는 숱한 아버지들의 모습과 겹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단순하게 어느 가족과 아버지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물론 한 가정의 막내딸이 자신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이 책의 내용을 풀어내고 있지만 누군가의 기록은 자신만의 이야기로 보긴 어렵다. 좁게 보자면 그와 함께하는 가족 구성원 전부의 이야기고, 넓게 보자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또한 누군가의 인생사란 누구나의 인생사와 비슷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어서 누군가의 기록은 그 자신의 이야기일 뿐 만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의 것이 되기도 한다.
『아버지』 속 아버지는 정치인 최민희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면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볼 틈이 없었거나 혹은 아버지와 데면데면하다면 이 책은 드러나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면을 느끼는 가교 역할을 하는데 제격이다.
책 속에서 만나는 잊혀진 옛 시절의 풍경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아버지》가 담고 있는 시대는 1924년부터 2021년까지이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책 속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 소년의 이야기, ‘귀환 동포’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로 고향에 돌아와 한글을 독학하여 고위직 공무원이 된 남자의 입지전적인 이야기, 육성회비를 내던 1960,70년대의 사회상, 1971년 대통령 선거, 동아방송의 라디오 뉴스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던 당시의 모습,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운동권 학생들의 위장 취업, 해직기자들이 기반이 되어 창간되어 언론 민주화에 기여한 《말》지의 활동 등을 통해 저자는 역사를 기록하는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온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우리의 현재사와 당대사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 흥미로운 것은 대략 4~50년 전과 지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는 모습과 힘들게 입학한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을 고민하면서 면접을 보러다니고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책의 서두를시작할 때만 해도 어렸던 자녀들이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진학을 거쳐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는 과정들을 보고 있으면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다른 듯 같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울러 이 책은 막내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아버지를 통해 내밀하게 들여다본 자연인 ‘최민희’의 내면풍경, 촛불집회를 통해 대중들에게 ‘촛불 국민 언니’로 널리 알려진 정치인 최민희가 어떤 학창시절을 거쳐 오늘날의 그녀가 되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 논객으로서 맹활약을 펼치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팩트의 제왕’, ‘철의 여인’으로 기억되는 강한 이미지가 부각된 논객 최민희가 가진 의외의 면모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가 담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