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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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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이야기


  • ISBN-13
    979-11-89805-40-1 (03810)
  • 출판사 / 임프린트
    국제문학사 / 국제문학사
  • 정가
    20,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2-09-30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채길순
  • 번역
    -
  • 메인주제어
    소설 및 연관 상품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동학 #최제우 #최시형 #관덕정의 봄 #채길순 #조선의 봄 #민란 #소설 및 연관 상품
  • 도서유형
    종이책, 반양장/소프트커버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50 * 210 mm, 298 Page

책소개

최제우는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불안한 국제 정세와 탐관오리의 횡포로 민초의 삶이 극도로 황폐해져 ‘더는 살 수 없는’ 세상임을 진단하고, 대안으로 동학(東學)을 창도했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평등이었다. 1894년, 마침내 조선팔도를 뒤흔드는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어 10만여 민중이 희생됐다. 이렇게, 우리 민중은 스스로 세상을 변혁할 혁명적인 역량을 지녔고, 죽음으로써 고유의 ‘민주주의 제단(祭壇)’을 쌓은 위대한 역사가 있었다. 
2
나는 아주 오래전에 여러 마을을 떠돌았다. 지방 신문에 동학기행문을 연재했는데, 마을 경로당이나 팽나무 그늘에서 노인들로부터 아련한 동학 옛날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럴싸한 이야기 속에 더러는 터무니없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 역사기행이니 그럴싸한 큰 덩어리를 체로 걸러내고 났더니 조금은 터무니없어 보이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남았다.
이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흥미 있는 이야기를 반죽하여 새롭게 빚었으니 ‘설화소설’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일찍이 삼국유사는 야사(野史)이고, 삼국사기는 정사(正史)로 불렸는데, 뒷날 사람들은 야사가 더 재미있고 진솔하다고 말했다. 이슬람 세계 각지의 설화들이 반죽 되어 16세기경에 완성된 천일야화(千一夜話, 아라비안나이트)도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다.

목차

차 례

☐ 작가의 말 ………………………………………………………… 4

☐ 두 쌍의 혼례 …………………………………………………… 6
☐ 쌍무지개 뜨는 연못 ……………………………………………16
☐ 하늘 기운이 서린 영부 ……………………………………… 26
☐ 이 도를 양(養)할 자 누구인가 ……………………………… 35
☐ 지금 누가 베를 짜느냐 ……………………………………… 53
☐ 손응구가 짚신장수가 된 내력 ……………………………… 60
☐ 이필제, 신미년 동짓달에 서소문 밖에서 꿈을 접다… 69
☐ 잠실나루 사람들의 통곡 ……………………………………… 79
☐ 전봉준, 나주성 함정에서 살아나다 ………………………… 88
☐ 예산 홍의소년 이야기 ………………………………………… 97
☐ 백마의 여장군 이 소사 이야기 …………………………… 106
☐ 엄통령, 엄조이 이야기 ……………………………………… 115
☐ 당진 승전곡 전투 바우 이야기 …………………………… 124
☐ 동학 원귀, 이두황 이야기 ………………………………… 133
☐ 예천 소야리 최맹순 최한걸 부자 이야기 ……………… 151
☐ 보성 애기 접주 이관기 약전(略傳) ……………………… 162
☐ 글 잘한다 오중문, 쌈 잘한다 오중문 …………………… 173
☐ 부안 위도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복장이 이야기 ……… 184
☐ 귀신으로 사는 동학농민군 ………………………………… 195
☐ 어린 뱃사공 윤성도 이야기 ……………………………… 203
☐ 강령 탈춤 패와 동학농민군 ……………………………… 221
☐ 조선의 동학 거괴(巨魁) 재판 참관기 …………………… 231
☐ 진도 뱃노래 ………………………………………………… 244
☐ 불사조 조병갑 이야기……………………………………… 253
☐ 동학 두령 박학래 연명기 ………………………………… 265
☐ 갑년이의 환생을 기다리며 ………………………………… 288

본문인용

☐ 두 쌍의 혼례


문경 유곡리 주막의 새벽녘이다. 새벽 기운은 먼동이나 새벽닭 울음같이 아주 먼 곳에서 오기도 하지만 가까운 문살에 푸른빛이 걸리면서 잠들었던 세상의 사물들이 잠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중에 단연 두드러진 움직임이 새벽닭 울음이다. 한소끔 첫닭 울음이 지나가고 잠잠한 틈에 말 울음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환청인가 싶었는데 쩔렁 요령 소리에 이어 한 가닥 말 코푸레질 하는 소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최제우(1824-1864) 동학 장도주. 호는 수운(水雲), 아명은 복술(福述)이고 초명은 제선(濟宣)이다.
최제우는 명상에서 깨어나,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 같아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어둠 속에 흰수염 노인이 말고삐를 쥐고 서 있었다. 흰수염 노인도 하늘에서 막 내려온 사람 같았다. 그가 지상의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최복술(崔福述, 최제우의 아명) 선생이시오?”
“그렇소만, 뉘시오?”
“선생께서 이 말의 주인입니다.”
“뭐라고요?”
최제우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뉘신데 날 더러 말의 주인이라고 하시오? 나는 하룻밤 묵어가는 객일 뿐이오.”
“소인은 더 아는 게 없으니 묻지 마시오. 심부름을 마쳤으니 이만 가겠소.”
흰수염 노인이 최제우에게 말 고삐를 쥐어주고 새벽어둠 속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져버렸다. 최제우는 마치 꿈결인 듯 흰수염 노인이 사라진 어둠을 응시하는데, 손에 잡힌 말고삐와 눈앞에 서 있는 말 한 마리가 엄연한 현실이었다. 덩치가 큰 말이 보기보다 순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말이 히히힝- 울음을 터트리며 허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말고삐를 잡은 최제우의 몸이 기우뚱했다. 한차례 요동친 말이 곧 잠잠해졌다. 최제우가 난감해하고 서 있는 중에 주막집 내외가 놀라 문을 열고 나왔다.
“말이 생겼으니 좀 좋우? 정 성가시면 주막에 두고 가셔도 좋지요. 당연히 말값이야 쳐 드리지요.”
주막집 내외도 말이 최제우의 손에 든 과정을 지켜본 것이다. 주막집 바깥주인의 말을 이어 안주인이 말했다.
“애구머니! 정신이 없어 진지상도 못 차려드렸수. 잠시만 기다리시우.”

주막 안주인이 급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제저녁에 매몰차던 주막집 내외가 갑자기 생긴 말 한 마리 앞에 사근사근해졌다. 말 고삐를 잡고 선 최제우는 여전히 난감하여 서 있었다. 사내가 얼른 말고삐를 잡아 사립문 감나무에 매어놓았다.
아침이 되어 최제우가 길을 나서려고 짚신을 막 꿰려 할 때, 한 사내가 계집아이와 함께 주막집 사립문으로 들어섰다. 사내가 사람은 그만두고 감나무에 고삐가 묶인 말에 눈길을 주며 말을 향해 덕담했다.
“그 말 낯 한번 훤하오.”
최제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말 때문에 고심하는 중인데 무슨 말 치사요?”
“고심이라니요? 나는 계집종을 팔아서 말 한 마리를 사야 하는데, 그러면 내게 넘기시우.”
최제우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돈도 계집이 필요 없는 사람이오.”
“세상에 계집과 돈을 마대는 사람이 있소? 그러면, 말과 이 계집종을 바꾸면 어떻겠소? 내가 저 계집종 때문에 몇십 리를 걸어 예천장까지 가야 할 참인데, 서로 잘 됐지요.”
그제야 최제우는 사내 옆에서 작은 새처럼 떨고 선 계집에게 눈길이 멎었다. 갑자기 서글픈 감회가 밀려왔다. 오랫동안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면서 고심했던 세상 문제를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갑자기 환하게 세상이 밝아왔다. 그래! 세상 이대로는 안 된다. 다시 개벽(開闢)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합시다.”
최재우가 흔쾌히 대답했다. 사내가 얼른 품에서 종문서를 꺼내며 말했다.
“보아하니 문자 속이 밝은 선비양반 같은데, 문서나 하나 써 주시오.”
“알겠소. 그런데 무슨 사연이 있어서 계집종을 팔려 하오?”
“어디 사시는 나리인지 모르겠으나 올해같이 극심한 흉년에는 도지를 못 내는 가옥이 많아서 딸을 가진 집에서는 딸을 팔아서 한 해 흉년을 때우는 집들이 수두룩하지요. 계집종 몇 마리가 들어올 줄로 예상하고 미리 처분하는 셈이지요.”
사내가 거침없이 말하면서 힐끗힐끗 계집종을 바라보았다.
최제우가 봇짐을 풀어 먹과 벼루를 꺼내 먹을 갈아 종이를 펼쳐놓고 나서 물었다.
“종의 이름, 주인의 함자, 증인이 되는 댁의 함자가 어찌 되오?”
“이 계집은 안동 강부사댁 계집종 봉단입니다. 저는 김순명인데, 이래 봬도 뼈대 있는 안동 김가입니다.”
최제우가 서류 두 개를 만들어 김순명에게 들으라는 듯이 읽었다.
“안동 강부사댁 계집종 봉단이를 아무런 조건 없이 말 한 필과 바꿀 사, 경주 고을 최복술, 보증인 김순명. 되었소?”
“예, 내용도 맞고 필체도 왕휘지요!”
김순명이 들은 풍어리가 있어 아는체했다. 최제우가 문서 둘 중 하나는 김순명에게 내주고 나머지는 제품에 넣었다. 김순명이 문서를 받아 품에 넣고 나서 말했다.
“얘야, 넌 잠시 밖에 나가 있다가 소리하면 들어오너라.”
“예.”
계집종 봉단이가 조신하게 밖으로 나가자 김순명이 말소리를 낮춰 말했다.
“멀리 떨어진 경주 고을에 사신다니 안심은 되는데, 실은 저 계집종과 정분이 난 사내종이 있어서 팔아치웁지요. 아랫도리 정분이야 양반 상놈 가릴 거 없이 살인도 나는 법이니 도망치지 않게 단둘이 잘하시오. 원래 말씀드리지 않아도 좋을 말이지만 점잖은 양반이 괜스레 낭패를 보지 말라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른 건 아무 문제 없는 계집입니다.”
“알겠소!”
김순명이 밖을 향해 말했다.
“얘야. 들어오너라!”
김순명이 밖을 향해 기별하자 봉단이 쪼르르 방으로 들어왔다.
“지금부터 너는 저 어른네 종년이다. 어른 말씀 잘 받들어 모셔라.”
봉단이 잔뜩 겁에 질려 고개를 끄떡였고, 최제우가 측은한 눈으로 봉단이를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김순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립문 옆 감나무에 매어놓았던 말고삐를 풀어 말 여기저기를 살피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김순명이 재빨리 말 등으로 훌쩍 오르고 나서 말했다.
“나는 이만 가볼랍니다!”
김순명과 말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비로소 겁에 질려서 떨고 서 있는 봉단이가 최제우의 눈에 들어왔다.
“자, 가자.”
최제우가 봉단이를 앞세워 방을 나섰을 때 안방에서 주인 내외가 달려 나왔다.
“나리! 연신 수지맞으셨습니다요. 우리가 이 애를 딸 같이 데리고 살다가 좋은 혼처가 나오면 짝맞춰 살도록 합지요.”
옆에는 주막사내가 고개를 끄떡이며 아주 인자한 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어제는 볼 수 없던 인자한 낯빛이었다. 이때는 주막에 들었던 사내들이 모두 나와 둘러 서 있고 눈빛들이 빛나고 있다. 주막 사람들의 많은 눈이 봉단이를 향하고, 봉단이는 사내들의 눈총에 기가 질려 한 줌으로 오그라들어 떨고 서 있었다. 봉단이가 기어들어가는 말로 나지막이 말했다.
“나리! 저는 나리를 따라가고 싶어요.”
최제우는 갑자기 닥친 상황에 분노와 함께 서글픈 감정이 회오리처럼 일었다. 분노는 세상에 대한 분노였고, 슬픔은 가련한 백성에 대한 분노였다. 세상, 이대로는 안 된다!
“갑시다.”
최제우가 봉단이를 앞세워 길을 나섰다. 사람들은 나도 말이나 계집의 주인이 될 수 있었는데 놓쳤다는 듯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호젓한 산길로 들어서자 최제우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최제우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앞장섰다.
“세상, 이대로는 안 된다!”
내 말소리인지 아니면 먼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인지 분별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오니까?”
최제우가 먼 하늘을 향해 되물었지만 이번에는 어떤 말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해졌다.
“그러면 이 세상, 어찌해야 하오니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온 세상이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순간 몸이 허공으로 잠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아!”
최제우가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이때였다.
“나리!”
어둠 속에서 다급한 봉단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차츰 눈앞이 밝아 오면서 눈앞에 봉단이가 서 있고, 그 너머로는 천 길 낭떠러지가 아찔하게 내려다보였다.
“뉘시오?”
최제우가 봉단이를 향해 물었다.
“나리! 소녀는 주막에서 말 한 마리와 바꾼 종년 봉단입니다!”
“녜, 그렇군요.”
봉단이가 말끝에 갑자기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리께서 실성하신 듯 합니다. 하늘을 향해 중얼거리시면서 길을 벗어나 까딱하면 큰일 날뻔했습니다.”
“그랬군요.”
최제우가 그제야 한동안 섧게 울었던 자신을 떠올렸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리, 그런데 왜 저같이 천한 종년에게 하대를 하시는지요?”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하늘같이 귀합니다.”
“소녀는 하늘 아래 가장 천한 종년인걸요.”
최제우는 말없이 품에서 아까 챙겨 넣었던 종문서를 꺼내고, 봇짐을 풀어 부싯돌을 꺼냈다.
“나리, 지금 무엇을 하시려는지요?”
“종문서를 태워서 종에서 놓아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서를 태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제가 관에 잡혀 문서가 없으면 도망 종이고, 문서가 있으면 그나마 나리의 종입니다. 당분간 지니는 것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아하! 과연 소녀의 말이 옳습니다. 참 총명하오.”
최제우가 감탄하여 종문서를 봉단에게 건네주었다. 종문서를 받아든 봉단이 ‘흑’ 울음을 터트렸다. 최제우의 가슴으로 그 울음이 스며들었다. 이는 천하를 떠도는 동안 보아왔던 탐관오리들의‘가렴주구(苛斂誅求)’의 현실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아픔이었다. 봉단이의 한소끔 울음이 지나가자 최제우가 말했다.
“이제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시오. 조금 전에 천길 벼랑으로 떨어질 뻔한 나를 구원하였으니 필시 내 생명의 은인이오. 그러니 이제 마음의 빚도 없을 것이오.”
봉단이가 조금 전까지 지니고 있던 장난스러운 빛이 가셔지고 차게 굳어 있었다.
“나리. 또 궁금합니다. 저를 왜 종에서 풀어주시는지요?”
“아까 누구나 한울님처럼 귀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천하는 지금 괴질에 걸려 있어서 다시 개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귀한 것을 일깨워줬으니 그에 보답 한 것입니다.”
이 말에 봉단이의 얼굴에 밝은 웃음꽃이 피었다.
“이번에는 소녀가 나리께 청을 드려도 될런지요?”
“무엇이오?”
“제가 하루아침에 종에서 풀려나니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릅니다. 제가 인연을 맺을 때까지 나리께서 저를 거두어 주시면 안 될런지요?”
봉단이의 말에 이번에는 최제우가 껄껄 웃은 끝에 말했다.
“내 입으로 시집간다는 말을 하는 처녀는 세상 처음 보오.”
“이렇게 말씀드리지 않으면 평생 의지하겠다는 말로 들으실 테니 미리 바르게 말씀을 드려야지요.”
“안 그래도 경주 집에는 같은 처지로 묵는 처녀가 있으니 인연이 생길 때까지 같이 지내면 되겠소. 어서 길을 갑시다. 이제는 내가 길을 가다가 한눈을 팔 일은 없을 것이오.”

경주 용담골의 봄날 아침이다. 부신 햇살 아래 꽃과 나뭇잎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용담정에서 수련을 하던 최제우가 눈을 들어 부신 햇살에 눈을 줬다. 연분홍 살구꽃 잎이 지는 마당 가에 서서 가늘게 한숨을 몰아쉬는 봉단이를 보자 최제우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최제우가 마침 물동이를 이고 나가는 박 씨 부인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부인, 잠깐 들어와 보시오.”
박 씨 부인이 물동이를 내려놓고 용담정 뜨락으로 올라섰다.
“무슨 일이세요?”
“홍숙이와 봉단이를 경주장에 보내 독을 좀 들여오게 하시오.”
“뜬금없이 웬 독이오?”
최제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독이야 살림 밑천 아니오? 장 담글 절기이기도 하오. 다녀오게 하시오.”
“알았어요. 수련하시던 어른이 갑자기 독 타령인가 놀랐어요.”
“실은 나도 왜 내 머릿속에 독이 떠올랐는지 이상하긴 하오.”
봄날의 경주 장거리였다. 홍숙이와 봉단이 신기해하며 장 여기저기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홍숙이가 떠꺼머리총각의 옹기 지게 앞에 멈춰 섰다. 함께 온 봉단이가 좀 떨어진 방물 점방 앞에 기웃대고 있었다.
“봉단아, 이쪽으로 와. 여기 옹기장수가 있어.”
홍숙이 말에 봉단이 쫓아왔다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버렸다.
“바우야!”
놀라기는 옹기장이 떠꺼머리총각도 마찬가지였다.
“봉단아!”
두 사람은 더 말을 잊지 못했다.
“봉단이 네가 경주의 어느 나리를 따라갔다는 집사 김진명의 말을 듣고 도망 나와 내처 여기까지 왔지.”
“무사히 왔으니 다행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빨리 경주를 떠야 하네.”
봉단이와 바우가 서로 반겨 말을 나누고 나서 홍숙이와 인사를 나눴다.

봉단이와 홍숙이가 바우의 옹이지게를 앞세우고 용담골로 들어왔을 때는 날이 저물녘이었다. 그날 밤 횃불을 밝혀놓은 마당에서 행례가 치러졌다. 새신랑 최세정과 바우가 사모관대를 차려입고 섰고, 청수를 가운데 놓고 연지 곤지를 찍은 봉단이와 흥숙이 마주 섰다. 가까운 가정골에서 동학 도인들이 하객으로 올라와 있었다. 두 쌍의 맞절 예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제우가 봉단이와 바우를 불러 말했다.
“두 사람은 초례를 치를 겨를 없이 바로 길을 나서 부산 김진구를 찾아가시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볼 날이 있겠지요.”
“나리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박 씨 부인도 그간 정이 들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제 여기가 친정과 같을 것이니 가끔 들리게나.”
“녜, 그러겠습니다.”
봉단이와 흥숙이도 그동안 각별하게 정이 들었던 터라 부둥켜안고 눈물로 고별했다.
“그러면 만수무강 하세요.”
봉단이와 바우가 절을 하자 모두 맞절을 하게 되어 한꺼번에 마당에 엎드리게 되었다.
이렇게, “최제우는 데리고 있던 두 계집종 중 한 종은 며느리 삼고, 다른 계집종은 혼례를 시켜 내보냈다.”라는 기록의 진실이다. (*)
☐ 쌍무지개 뜨는 연못


1

봄 하늘은 마냥 푸르렀다. 온 누리가 포근한 아지랑이 속에 풀 나무들이 푸른 기운을 뿜어내고,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 벌 나비와 어우러졌다. 푸른 봄기운을 머금은 새들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임익서(林益瑞)는 아미산 마루에 앉아 보리밭 위를 짝지어 솟구쳐 오르는 종달새를 먼눈으로 쫒다가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이 좋은 봄날에 세상을 뜨시다니! 곁에 앉았던 아내 손 소저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옷고름을 가져다가 눈물을 닦았다.
“그만 갑시다.”
임익서가 먼저 일어서자 손 소저가 말없이 따라 일어섰다.
관덕당 마당으로 가는 길은 어제 내린 비로 땅이 흠뻑 젖어 있었고, 풀잎 위에 맺힌 구슬 같은 비이슬이 봄 햇살에 반짝였다.
대구 남문 밖 관덕당 앞 너른 마당에는 차일이 쳐졌고, 일찍 나온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웅성거리고 서있었다. 모두 낯익은 동학교도였지만 임익서와 손 소저 내외는 알은체 않고 사방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남문 쪽에서는 구경꾼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대부분 동학교도인 줄 알지만, 벙거지에 전복 입은 군졸들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꼿꼿이 서 있었다. 군졸들에게는 무기를 들지 않은 동학교도가 무섭기는커녕 재물자루로 여기고 있었다. 이제 바야흐로 동학 창도주 최제우의 참형이 시작되나보다 싶었다.
이때, 관덕당 아래 차일 쪽에서 한 노인이 걸어왔다.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었지만 행여 흙이 묻을까봐 두루마기 자락을 깡총하게 걷어 올려 묶었다. 노인이 임익서 내외를 향해 말했다.
“오늘 동학 두령 참형을 구경 나왔소?”
임익서가 잠시 머뭇거리자 노인이 냉큼 제가 말했다.
“헛걸음이오. 동학 두령 최복술(崔福述, 아명)이는 벌써 북수리가 되어 멀리 달아났다고 합니다.”
임익서가 깜짝 놀라 ‘그게 아니다’라고 말하려 할 때 노인이 빠르게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무슨 말인가?

2

지난해 12월 10일 새벽, 군졸 60여 명을 거느린 선전관 정운구가 용담정에 들이닥쳤다. 동학 교세가 들불처럼 번져가자 화들짝 놀란 조정에서 선전관 정운구에게 명하여 동학의 실태를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명을 내렸다. 정운구는 조사할 것도 없이 대뜸 ‘동학 수괴 최제우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죄목을 씌워 용담정에 들이닥쳐 최제우와 제자들을 굴비 엮듯 묶어서 대구감영으로 이송했다.
오래전부터 창도주 최제우의 동향을 보아오던 경상감사 서헌순은 선전관 정운구와 ‘동학교도 두릅’이 감영으로 들이닥치자 더럭 겁부터 났다. 소문에 최제우가 신이(神異)한 조화를 부린다고 했고, 주문이나 부적으로 온갖 병을 다스려 백성들 너도나도 동학교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동학 교세가 경상도를 넘어 강원 충청 전라도까지 빠르게 번져간다는 것이다. 서헌순이 근심 건더기를 두고 고심이 될 참인데 선전관 정운구가 먼저 말했다.
“최제우란 역적을 조정으로 올려서 다스려야겠소.”
정운구의 말에 서헌순은 근심 건더기를 치우게 되었으니 ‘옳거니!’ 싶었다.
“역시, 나리께서 잘 보셨소. 부디 사헌부에 올려 다스려 주시오.”
그렇지만 선전관 정운구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한양으로 압송하는 길에 창도주를 험하게 다스리면 동학교도의 돈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과연 정운구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대구 감영을 떠나 압송 행렬이 선산 구미를 지날 때 길가에 동학교도가 허옇게 몰려나와 읍하면서 “우예든지 우리 선상님 잘 모셔 주소!” 하면서 엽전꾸러미를 바치는 것이다. 눈치 빠른 군졸들이 동학교도가 볼 때 가마 살 틈으로 막대기를 쑤셔 넣어 최제우를 찔러대니 뒷돈이 더 많이 들어왔다.
임익서는 보따리를 꾸려 이들 뒤를 천천히 따르고 있었다. 임익서가 가마 살 틈으로 연신 막대기를 넣고 찔러대는 군졸을 보자니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렇다고 동학교도에게 돈을 바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호송 행렬의 발걸음은 자연 더딜 수밖에 없었다. 상주 보은 회인 청주를 지나는 동안 동학교도의 돈을 엄청나게 긁어모았고, 머무는 곳마다 돼지나 닭을 잡아 술을 내고 밥을 삶아내느라 이래저래 백성들 등골이 휘었다.
죄수 압송행렬이 청주를 벗어나면서 길 가에 동학교도가 없어지니 걸음이 자연 빨라졌다. 그제야 임익서는 무릎을 쳤다. 아예 연도에 동학교도가 나오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과천에 도착했을 때 파발이 달려와 ‘임금의 승하’ 소식을 전하면서 ‘죄인을 대구 감영에서 처리하라’ 하여 호송행렬은 발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충주 조령 길을 택했는데, 충주에 이르자 동학교도가 다시 연도에 늘어서기 시작했다. 문경새재에 이르러 수천 명의 동학교도가 몰려나와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뻔했다. 한밤중이었는데, 동학교도가 든 횃불로 대낮같이 밝았다. 이필제가 거느린 동학교도는 몸 안에 칼을 숨기고 있어서 여차하면 호송 군졸과 큰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새재 고갯마루에서 이필제가 가마를 가로막고 섰다.
“우리 스승님을 풀어주시오! 오만 년 후천개벽의 큰 도를 여신 창도주를 어찌 대역죄인 취급을 한단 말이오?”
이필제가 일갈하니 마침내 정운구가 칼을 뽑고, 군졸들이 한꺼번에 칼을 뽑아들었다. 일촉즉발의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수례 위 살 속에 갇힌 최제우가 나섰다.
“모두 물러나 길을 비키시오. 나는 천명을 믿고 따를 뿐이오. 내가 오늘 이 길을 걷은 것 역시 천명이니 여러분들은 아무 염려 말고 오직 도를 믿고 수도에 힘쓰시오.”
“스승님!”
그제야 이필제와 동학교도가 길 양쪽으로 물러나 길을 트고 엎드렸다.
최제우의 압송 행렬은 그해의 마지막 밤을 유곡동 원에서 묵고 새로운 육십 간지가 시작되는 갑자년 정월 초하룻날 대구 감영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임익서는 정운구 일행을 따라 과천까지 올라갔다가 경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며칠을 쉬면서 정월 대보름을 쇠었다.

3

임익서가 대구 남문 시장에서 약방을 하는 김진호 집을 찾아갔을 때는 정월 스무날이었다. 벌써 김진호가 옥졸을 돈으로 사놓아서 하루 이틀 새로 감영에서 벌어지는 일을 낱낱이 듣고 있었다.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온 최제우를 다시 맞아들인 경상감사 서헌순은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정의 서슬로는 마땅히 참형인데, 경상도 많은 백성이 동학교도이니 그렇게 되면 원망의 덤터기를 고스란히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헌순이 궁리해낸 것이 심문을 혼자 하지 않고 참사관을 많이 배석시켰다. 서헌순은 자신의 말을 잘 들을만한 상주목사 조영화, 지례현감 정기화, 산청현감 이기재를 급히 감영으로 불러들였다.
심문은 여러 고을 수령들이 도착한 정월 스무 하룻날부터 시작되었다. 임금이 승하한 예를 갖춰 북향 배례를 마치고나서 동학 창도주 최제우와 강원보 최자원 이내겸 이정화 박창욱 박응환 조상빈 조상식 정석교 백원수 신덕훈 성일규 등 12 제자에 대한 심문에 대해 의논했다. 국상 난 지 49일제가 며칠 뒤가 되니 “좌도난정률에 따라 엄한 참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결론이 단박에 났다.
최제우와 열 두 제자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이란 으레 가혹한 매질로 시작했다. 살을 에 듯 혹독한 추위에 벌겋게 옷을 벗겨놓고 언 살에 매질을 하면 살이 찢어져 피가 사방으로 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날마다 심문이 벌어지니 참사관으로 온 수령들은 비명을 들으면서 점심을 먹었다.
그날도 수령들은 점심 때 반주로 마신 낮술로 거나하게 취해 각기 제방으로 돌아갔다. 서헌순이 잠깐 자리에 누워 졸고 있는데 “우지끈”하고 뭐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 날이 어둑해서야 낮잠에서 깨어나니 밖에 기척이 있어서 ‘게 누구 없느냐?’고 물었다. 아전이 방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까 잠결에 무슨 소리가 그리 요란했더냐?”
“네, 동학 두령 최제우의 정강이가 부러지는 소리입니다.”
“뭐라고?”
서헌순은 ‘왜 그렇게 심한 형을 했느냐’고 나무라려다 입을 다물자 이방이 내처 말했다.
“뭐 그래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뼈가 부러져도 얼마 안 있어 뼈가 다시 붙고 찢어진 살도 금방 아물어버린께요.”
아직 잠이 덜 깨기는 했지만 서헌순은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주리를 틀어 정강이가 자끈둥 부러졌는데도 얼마 아니 되어 최제우는 멀쩡히 걸었고, 얼굴도 피를 닦아내니 금방 환한 얼굴이 되었습지요.”
“너, 그 말이 진정이더냐?”
“그렇다니까요? 소인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지요.”
“으음!”
서헌순은 그만 정신이 아뜩해졌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해 기운이 갑자기 가셔지고 어둠이 몰려왔고, 어둑시니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아서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누, 누구 없느냐?”
서헌순이 밖을 향해 말했다. 방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이방이 말했다.
“나리! 저 여기 있습니다요.”
“그렇구나. 내가 잠시 실성한 모양이로구나. 너 당최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라.”

4

하얀 봄 햇살이 흰 차일 위로 쏟아져 눈부시게 빛나고 난데없는 봄바람이 차일을 흔들고 지나갔다. 이때 둥! 둥! 북소리가 바람처럼 일어났다.
“훠어이! 비켰거라!”
전복에 벙거지를 쓴 군졸들이 벽제 소리를 치며 관덕당 앞에 쳐놓은 차일 안으로 들어섰다. 관덕당 마당을 가득 메우고 웅성대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임익서 내외는 바로 앞쪽에 서 있었다. 임익서는 아까 노인의 말대로 북수리가 되어 날아갔는지, 아니면 스승님께서 정말 끌려 나올지 궁금해졌다. 스승님께서는 천명을 따른다고 하셨으니 노인의 말은 헛소리가 자명했다.
“비켰거라! 죄인 들어온다.”
아니나 다를까 군졸의 말에 따라 무거운 칼을 쓴 죄수가 나졸 네 명에 옹위되어 마당으로 들어섰다. 최제우는 큰칼을 쓰고 뒷짐결박까지 지웠으나 꼿꼿하게 걸었다. 큰 칼에는 연 꼬리 같은 종이에 “동학 괴수 최제우”라 씌어 있었다.
“아! 스승님!”
임익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온갖 고문에 시달렸지만 여전히 얼굴은 맑게 빛나고 눈빛은 형형했다. 마당에 늘어섰던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납신 접거나 마당 진흙 바닥에 엎드렸다. 임익서 내외도 엎드렸다가 일어섰는데, 일어나보니 모두 옷자락에 흙이 묻어 태반이 동학교도인 줄 알았다.
이때 둥둥 북소리가 다시 나고 군졸이 소리쳤다.
“훠어이! 감사 나리 납신다.”
북소리 장단에 맞춰서 맨 앞에 경상감사 서헌순과 뒤로 참관 수령들이 위엄을 갖춰 들어섰다. 그렇지만 마당을 가득 메운 백성 어느 누구도 허리를 접거나 엎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이 서헌순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명을 내렸다.
“동학 괴수 최제우는 들어라. 너는 요망한 소리로 도당을 모아 사특한 말로 인심을 어지럽히고 혹세무민하였으니 좌도난정률로 참형에 처하노라.”
순간 ‘아!’ 하는 사람들의 탄성과 함께 어디선가 낮은 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참형을 시작하라!”
경상감사 서헌순의 호령이 여기까지는 기세등등했다. 명에 따라 둥! 둥! 북소리가 일어나고 벌겋게 웃통을 벗은 망나니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작두날 같이 큰 칼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타났다.
“훠어이!”
망나니가 괴성을 지르며 죄수의 머리 위로 칼을 날렸다. 사람들이 아! 하는 탄성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눈을 감았다. 북 장단이 다시 이어져 실눈을 뜨고 보니 다시 칼춤을 추며 죄수 주위를 돌았다.
“에이잇!”
이번에는 정확하게 목을 향해 칼을 내리쳤으나 죄수의 머리도 그대로 붙어 있고, 흰 칼날도 그대였다.
아! 이번에는 차일 속에 감사와 참사관, 군졸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서헌순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찌 된 일이냐?”
이방이 서헌순에게 급히 달려가 아뢰었다. 그동안 북소리가 멎고, 낯빛이 허옇게 가셔진 서헌순이 죄수를 향해 다가섰다. 서헌순이 최제우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그대의 참형은 나라님의 명이니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소. 어명이니 따라 주시오.”
최제우가 머리를 들어 말했다.
“나라님의 명이 중하다고 하나 어찌 하늘님의 명에 미치겠소. 동학의 거룩한 도를 위해 나는 하늘님의 명을 기꺼이 따르겠소. 죽기 전에 청수 한 그릇을 내어주시오.”
곁에 섰던 이방이 달려가 물 한 그릇을 소반에 받쳐 내어왔다. 최제우가 자리를 고쳐 앉아 정좌하여 동학 주문을 외었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이때 마당에 늘어선 사람들의 입에서도 일제히 동학주문이 흘러나와 관덕당 앞마당은 금세 동학주문이 넘실댔다.
이윽고 최제우의 입에서 동학주문이 멎자 관덕당 마당은 다시 고요해졌다. 최제우가 칼을 땅에 박고 선 망나니를 향해 말했다.
“이제 안심하고 내 목을 베시오!”
다시 북소리가 일어나고, 망나니의 춤이 시작되었다. 이윽고 “에이잇!” 하는 망나니의 외침과 함께 흰 칼이 허공을 갈랐다. 붉은 피가 한 길 위로 솟구쳐 오르고 목이 소반 위로 떨어져 청수를 피로 물들이고 땅위로 굴러 떨어졌다.
아! 사람들의 탄성도 잠깐, 갑자기 햇살을 뿜어 내리던 하늘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광풍이 일더니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스승님!”
마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일제히 엎드려 통곡했다.

5

최제우의 목은 사흘 동안 남문 밖 길거리에 효시되었다가 감영 옥에 갇혀 있던 박 씨 부인과 큰 아들을 풀어주고 시신을 인계했다. 임익서가 미리 준비해둔 관에 머리와 몸을 이어 담고 관 뚜껑을 덮으려다 문득 어떤 예감이 들어서 관 뚜껑을 덮지 않고 곁에 세웠다. 곁에 있던 김경필 김경숙 정용서 곽덕원 전덕원 등 제자 6명에 의해 경주 용담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운구 행렬이 자인현(慈仁懸) 서쪽 후연(後淵) 주막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 주모가 기다린 듯 달려 나와 물었다.
“어디서 오는 상차(喪次)요?”
“대구에서 오오.”
“그렇다면 용담 최 선생님 아니에요?”
“어떻게 아시오?”
“어젯밤 꿈에 귀한 손님이 들 거라고 해서 방을 치우고 종일 기다리던 참입니다.”
주막집 방 위목으로 관을 모시는데 관속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고, 차갑던 몸에 더운 기운이 감돌았다.
“스승님께서 살아나실 모양이오!”
행여 소생할까 싶어 사흘 동안 동학주문을 외며 주막에 머물렀다. 임익서가 이른 아침나절에 마당으로 내려서니 주막 앞 연못에 발을 담근 쌍무지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임익서가 놀라 소리쳤다.
“쌍무지개다! 스승님께서 떠나신다.”
마침 뒤따라 나온 제자들도 함께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느덧 무지개가 사라지고 방으로 돌아오자 윗목 시체에서 시즙(屍汁)이 흐르고 있었다.
임익서 일행은 관을 수습하여 용담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 하늘 기운이 서린 영부


1

10월 스무 여드레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금방이라도 별의 무게에 겨워 하늘이 찢어져 어두운 땅 위로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땅의 적막을 뚫고 귀뚜라미 소리가 청아하게 굴러갔다. 바야흐로 세상 모든 것들이 잠이 들었다. 최제선(崔濟宣)은 초조해졌다. 급히 여기를 떠나야 한다. 날이 새기 무섭게 빚쟁이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칠 거라고 했다.
조카 맹윤이 말을 전하면서 대책까지 내놓았다.
“작은아버지, 저도 빚쟁이들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야반도주밖에는 어떤 방책이 없습니다. 그것도 오늘 밤 당장에요.”
“오냐, 알겠다.”
최제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고,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제가 이따가 삽짝 밖에 소달구지 대놓고 군호로 쩔렁 풍경소리를 내겠습니다.”
그나마 맹윤이 아니면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었다.
“알았다.”
최제선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꼭 뭔가에 홀린 듯 했다.
과연 풍경 소리가 쩔렁! 울려서 밖으로 나가보니 어둠 속에 소달구지가 서 있었다. 달구지에는 아홉 살 여섯 살짜리 두 아이와 박 씨 부인이 앉아 있었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 눈물짓고 있을 것 같았다. 박 씨 부인의 가느다란 한숨이 최제선의 가슴을 벨 듯 아프게 스치고 지나갔다.
최제선이 뒤에 서자 소고삐를 쥔 맹윤이 천천히 소달구지를 끌어 길을 나섰다. 최제선이 달구지 뒤를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마을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 가까운데서 개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더니 마을의 뭇 개들이 짖어대어 출렁이기 시작했다. 당장 어둠 속 어디에서 도망치는 최제선을 뒤쫓아 올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핏기가 서려 있었다.
“내 돈 내놓아요! 그게 어떤 돈인데 우리한테는 목숨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그 돈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네.”
홀로 아이를 기르는 청상과부와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사는 노인의 하소연이 최제선의 귀를 찢었다. 모두 ‘목숨’으로 끌어댔는데, 왜 아니랴.
이태 전, 49일 기도를 작정하고 적멸굴로 길을 떠나기 전이었다.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장으로 책임감이 무겁게 다가왔다. 얼른 생각해낸 것이 철점 운영이었다. 천하를 주유하던 시절에 함경도 함흥 철점에서 한 스무날 묵으면서 쇠를 녹여 연장을 벼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논 6두락을 팔아 철점을 차려서 쇠를 제작하고 판매하여 이문 낼 계획을 세웠다. 막상 판을 벌이고보니 본디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최제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석을 캐내는 일에서 용광로에 녹여서 쇠를 뽑아내는 일까지 모두 품을 사야 했다. 예상과 달리 운영 자금이 계속 들어갔고, 여기 저기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려서 충당했다. 쇠를 팔아서 이문으로 나오는 돈이 없으니 갚아야 할 돈만 점점 늘어갔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이 집에 빚쟁이들이 모여 철점을 팔고 집을 팔아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나눠 가지는 빚잔치를 할 것이다.

2

밤새 걸어 구미산이 먼눈에 들어왔다. 구미산 머리에 자줏빛 기운이 얹혀 있어서 날이 밝아올 모양이었다. 아이들과 박 씨 부인은 덜흔들리는 달구지 위에서 자다 깨기를 반복하는지 가끔씩 머리를 들었다가 숙이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최제선은 차라리 졸음이라도 왔으면 그나마 근심을 덜련마는 정신이 매화같이 맑아서 더 고통스러웠다.
소달구지가 조카 맹윤이 사는 지동마을로 들어섰다.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어서 오시어요. 얘들아,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조카며느리가 사립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뼈 없이 잘 지은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시고 용담골은 내일에나 들어가시지요,”
“아니다. 좀 쉬었다가 오늘 저녁나절 쯤에 올라가자.”
“그러면 제가 먼저 올라가 고래에 불이라도 넣고 집을 수리하고 있을 게니 저녁나절에 올라오시지요.”
“그래 알았다.”
아침 끝에 한잠을 자고 점심 먹고 나서 이번에는 최제선이 손수 수레에 소 멍에를 달아 고삐를 쥐고 용담골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용담정으로 들어서자 맹윤이 몇 해 동안 비워진 집을 다스려 놓아서 제법 사람의 온기가 채워져 있었다.
“작은아버님 작은어머님, 전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았다. 내려가 쉬어라.”
그러고 보니 어제밤부터 지금까지 눈도 붙일 여가 없이 헌신해준 맹윤이 고맙기만 했다. 맹윤이 피곤한 기색이나 싫은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짐 같은 말을 냈다.
“작은아버님 이제 무엇을 하시렵니까?”
최제선의 머리를 후려치는 말이었다. 이제부터 뭘 할 것인가 궁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도 정하지 못했다. 최제선이 깊이 헤아릴 것 없이 불쑥 말했다.
“도를 얻을 것이다.”
“여태 도를 얻겠다고 오랫동안 수련을 하셨는데, 언제까지 수련하실 겁니까?”
맹윤의 이 말은 아까보다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말 언제까지 도를 얻을 것인가? 뜻밖에 최제선의 입에서 작정해 두지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돌아오는 봄까지는 필시 도를 얻겠다.”
최제선의 눈 앞에 복사꽃이 환하게 핀 봄날 풍경이 눈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맹윤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만일 그때까지 도를 얻지 못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맹윤의 물음에는 뼈가 들어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더 살아남지 않을 것이다.”
최제선은 자신이 말해놓고 자못 섬뜩했다. 어쩌면 내가 도를 얻지 못하면 이 세상에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맹윤이 용담골을 떠났다.
박 씨 부인은 당장 저녁밥을 지어야 했다. 솥에 밥을 안치고 고래에 불을 지펴야 한다. 아까 맹윤이 고래에 불을 넣어 열기가 찼을 법한데, 고래가 불기운을 빨아들이지 못하고 독한연기가 토해냈다. 매운 연기가 마당을 가득 메우고, 연기 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연기가 아니더라도 기막힌 처지에 눈물이 절로 흘렀을 것이다.
연기가 온 마당에, 온 골짜기를 채우고 한참 더 지나서야 저녁 밥상이 들어왔다. 밥 한 그릇에, 국 한 그릇이 놓인 밥상 앞에 앉으니 설운 심사가 와락 몰려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이제 가족을 위해 돈을 벌겠다고 나설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밭뙈기를 일궈낼 처지도 아니었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최제선의 그 고민은 계속되었다. 멀리서 구슬픈 밤새 울음이 들려왔다.
1859년 10월 스무아흐레, 5년 만에 돌아온 용담골의 밤이었다.

3

최제선은 “불출산외(不出山外)”라는 글을 써서 들고나는 곳에 붙였고, 제우(濟愚)로 개명했다.
최제우가 얻고자 한 도는 좀체 다가오지 않았다. 10여년의 주유천하 끝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고, 49일 기도와 수련을 했으나 득도하지 못했다. 전날, 어느 낮잠 끝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선승으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고나서 이듬해 양산 천성산 내원암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올릴 때 다가왔던 도의 기운도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그간 세속적인 철점 운영으로 속세에 때 묻은 심성 때문일까? 정신이 산란해져서 기가 모아지지 않았다. 정신이 사방으로 헝클어지자 몸도 찢어지는 듯 아프고 기력도 쇠잔해져서 몸을 가누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덧 절기는 가을이 가고 깊은 겨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용담 골짜기가 눈에 덮여서 바깥세상과 절연되었다. 급기야 최제우는 덜컥 몸져눕고 말았다.
“아이고! 여보! 어찌 된 일이오?”
최제우의 신음을 들었던지 박 씨 부인이 놀라 방안으로 들어왔다.
“걱정하지 마시오. 괜찮소. 다 마음에서 오는 병이니 스스로 다스려야지요.”
“아니에요. 앓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온 식구가 다 놀랐어요. 지금 아이들도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다고 근심이 되어 울고 있어요. 조카에게 말해서 경주부에 나가 의원이라도 모셔 와야 하는데 눈에 길이 막혔으니 어쩌면 좋아요.”
“어허! 괜찮대두요.”
이 말을 하는 중에 최제우의 입에서는 연신 신음이 흘러나왔다. 박 씨 부인이 무거운 근심을 안고 방을 나갔다.
최제우는 이 길로 영영 세상과 작별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여 엉금엉금 기어서 방문을 열고 눈에 덮인 밖을 내다보았다. 푸른 하늘 아래는 온통 눈 세상인데, 꿩 노루들이 마당을 점벙점벙 돌아다니고 있었다. 눈 속이라 저들도 먹을 것이 없었던 걸까.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처럼 맑아지고 시 한 구절이 스며들었다.

道氣長存邪不入(도기장존사불입)
世間衆人不同歸(세간중인부동귀)
도의 기운을 길이 보존함에 사악한 것이 들지 못하니
세상의 뭇사람과 같이 들어가지 않으리라.

최제우가 전날 맹윤에게 했던 말 같이 ‘이듬 해 입춘 날까지 도를 얻지 못하면 세상에 살아남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기가 든 결심이었다.
최제우는 몸을 추슬러 자리에 앉았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삿된 것이 끼어들지 않도록 수도에 전념했다.

4

용담골짜기에 겨울 장막이 걷히고 봄이 왔다. 눈과 얼음이 녹아내려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찼고, 산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넘나들며 우짖었다.
아직 새벽 기운은 싸늘했다. 최제우가 하늘 마당에 널린 하얀 별들을 가래질하여 별을 담았다. 이를 조리질하여 건져 올린 밝은 별을 그릇에 담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릇에 담긴 별 구슬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울컥, 까닭 모를 슬픈 감정이 솟아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 한울님, 감응하옵소서!”
청수에 빛나던 하얀 별빛이 아침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그릇에 담긴 황금빛 구슬이 천천히 일렁였다. 내 몸이 흔들려서일까, 아니면 하늘과 땅이 움직여서일까.
이른 아침, 맹윤이 제 생일잔치에 관복까지 지어서 올려 보내어 지동마을로 내려갔다.
“작은아버지 어서 오시지요.”
최제우가 방에 들어가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몸에 한기가 돌더니 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몸이 떨리면서 마음의 안정도 찾을 수가 없었다. 최제우는 맹윤의 집을 나와 용담정을 향해 걸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운 중에 한 발씩 발걸음을 옮겼다.
최제우가 용담정에 들어가 앉았다. 온몸에 뜨거운 불기운이 솟더니 알 수 없는 기운에 휘말려 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가 뒤로 자빠지고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이 세상인지 저세상인지 모를 황홀지경이었다. 이때 갑자기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스쳐가고 그 틈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
“누구시오니까?”
최제우는 처음 듣는 소리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상제(한울님)니라. 내가 너에게 무궁의 도를 내리노니 갈고 닦고 다듬어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법을 바르게 하여 세상에 덕을 널리 펴도록 하라.”
“세상에 덕을 펴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나의 영부(靈符)를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고치고, 나의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도록 하라.”
최제우가 마침내 갈망하던 하늘의 소리를 듣고 도를 얻게 된 것이다. “사람들 저마다 하늘을 마음에 모시고 있으니 사람이 곧 하늘이니라. 마음을 갈고 닦아서 저마다 하늘을 모시도록 하며, 사람을 하늘처럼 받들도록 하라.”
“영부란 무엇입니까?”
“한울님 기운의 약동을 보여주는 것이니라. 백지를 펴고 이 영부를 받아라.”
최제우는 가슴이 터질듯 한 벅찬 감동으로 백지를 펼쳤다. 백지 위에는 둥근 은빛 형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두렵기도, 신비하기도 했다.
종이를 한 겹 걷어내자 그 위에 다시 영부가 새겨졌다. 걷어내자 새로운 영부가 새겨졌다.
최제우가 감격하여 아내 박 씨를 불러 종이를 보여줬다.
“여보! 여기에 무엇이 보이오?”
그러나 박 씨는 최제우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종이에 무엇이 새겨져 있소?”
“멀쩡한 종이에 대체 뭐가 보인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세정이를 불러오시오.”
“아이고! 세정아. 네 아버지가 실성하셨구나! 전날 지동 네 사촌 생일날부터 이상하시더니 끝내 실성하셨구나!”
세정이가 제 어머니의 비명을 듣고 달려와 최제우가 든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박 씨 부인이 너무 기가 막혀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둘째 아들 세청이가 달려왔고, 사태를 알아차린 두 형제가 제 어미를 따라 울음을 터트렸다.
최제우는 세 사람의 통곡을 들으며 영부를 태워 재를 청수에 타서 마시고 나서 박씨 부인과 두 아이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갑자기 세 사람의 울음이 그치고 일제히 일어나 최제우를 향해 맞절을 올렸다. 최제우의 몸에서 둥근 광채가 무지개처럼 떠 있었다.
1860년 4월 5일이었다. 최제우 나이 37세였고, 주유천하 17년 만이고, 구도 수행 6년 만이었다. (*)
☐ 이 도를 양(養)할 자 누구인가


검등골 연초록빛 나무들이 차츰 짙어갔다. 멀고 가까운 산에서 산새들이 다투어 지저귀고, 먼 산 뻐꾹새 굵직한 울음이 섞여들었다. 세상의 문이 열리 듯, 갑자기 세상의 모든 소리가 최경상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조선 후기 종교지도자이자 사상가. 동학 제2대 교주. 경상(慶翔)은 초명이고 영해작변 이후인 1875년에 최시형으로 개명했다.
의 몸 안으로 빨려들어 왔다. 최경상이 몸이 들뜨는 기운에 휩싸여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둘러보았다.
“왔노라! 내가 왔노라!”
새소리에 섞인 하늘의 소리가 들렸다.
“아! 스승님!”
지난가을 홀연히 떠났던 스승께서 경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최경상이 사립문으로 달려들어 오면서 아이처럼 들떠 말했다.
“여보! 나 어디 좀 급히 다녀와야겠소.”
“스승님께서 돌아오셨군요.”
“당신이 어찌 아셨소? 대단하시오.”
“참, 당신도…멀리서 스승님 소식을 아신 당신이 대단하시지 경주 가시는 것을 짐작한 제가 대수겠어요?”
“내가 헛걸음을 할지 아직 모르지 않소?”
“당신의 짐작이 맞을 거예요. 그나저나 돌아오신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피곤하시지 않겠어요?”
손 씨 부인이 두루마기와 갓을 챙겨주며 말했다. 하기는 손 씨 부인에게 좀 미안하기도 했다.
최경상은 지난 정월 대보름을 쇠고 나서 포덕여행을 떠나 흥해 영덕 영양 울진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내가 역마살이 끼었을까. 최경상은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날 때 즐거웠다.
갓을 쓰고 길을 나서자 스승님을 뵙는다는 설렘으로 다시 들떴다. 경주부로 들어서면서 스승님이 계신 곳을 추측해 보았다. 관의 지목 때문에 용담정에 계실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정의 최맹윤, 서산 박대여, 산천리 백사길 박하선, 부하마을 이무중…여러 제자가 스쳐 가는데, 맨 앞이 수운의 조카 최맹윤의 집이었다.
“최 선생께서 여기는 웬일이오?”
최경상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당을 서성이던 최맹윤이 놀라 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스승님이 이곳에는 안 계시는구나 싶었다.
“혹시, 스승님께서 계신가 해서요.”
“스승님이라니? 검등골에 있는 최 선생께서 어떻게 아셨단 말이오?”
말투로 보아 스승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추측은 맞았다.
“지금 스승님께서는 어디 계시오?”

서평

이 이야기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수만 명의 민초(民草) 속에 듬성듬성 핀 풀꽃 같은 이야기다. 여기서는 ‘단편역사소설집’이다. 최제우 최시헝 동학사상을 통해 일어나는 민중들의 열기는 하늘을 찌르는 함성이었다. 조선팔도를 뒤흔들고 조정을 겁먹게 만들어 마침내 중국군과 일본군을 불러들이는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사를 피로 써내려간 조선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민족의 가슴에 피를 솟구치게 하고 있다.
조선의 정치가 민중의 피를 강으로 만들었던 교훈을 받아 오늘날 정치가들이 교훈을 받아야 하건만 그렇지 않음이 한탄스럽다.
변하지 않는 역사의 반복은 힘없는 백성들이 피해를 받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동학은 종교인지, 정치인지 묻는다면 그것은 민족의 정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천하게 여겼던 노비와 종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참 된 진리를 사랑하는 이 땅이 되어야 하건만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을지라도
오늘 다시 나 스스로 먼저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높이는 것을 말하려 한다.
관덕정은 죄수들을 벌주는 곳이었다. 최시헝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수많은 동학도들이 처형을 당했다.
세상이 새롭게 변하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세상이 열리길 간절히 바라면서 관덕정에 매화가 피고 개나리가 피는 봄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일어나라 백성들아!
하늘이여!
땅이여!
우주의 기운을 받은 백성들은 일어나 춤을 추어라.

저자소개

저자 : 채길순
소설가, 명지전문대학 명예교수

198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1995년 한국일보 광복50주년 기념 1억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흰옷이야기』당선. 장편소설『어둠의 세월』 상·하(도서출판 마루, 1993), 『흰옷이야기』①-③(한국문원, 1998),『동트는 산맥』①-⑦(신인간사, 2000),『조캡틴 정전』(화남, 2011),『웃방데기』(모시는사람들, 2014),『모든 이의 벗 최보따리』(국제문학사, 2018)가 있다.
그 외 『소설창작의 길라잡이』(모시는사람들, 2010),『소설창작 여행 떠나기』(모시는사람들, 2013),『동학기행1』(모시는사람들, 2013),『문학의 집에서 꾸는 꿈』(국제문학사, 2018),『독일 아리랑』(국제문학사, 2019),『동학기행2』(모시는사람들, 2021), 『동학기행3』(모시는사람들, 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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