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왜 우리는 사막으로 떠나야 하는가?”
- 사막으로 떠나야 하는 동기 찾기
“유리성과 바비 인형”
The Crystal Castle
and Barbie Doll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함이라” (창19:15)
유리성과 바비인형
The Crystal Castle & Barbie Doll
“소돔 고모라성은 멸망 당했습니다”
이 땅이 영원한 도성이 아니요 언젠가 심판주 앞에서 사라질 성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영원하길 그 성에서 안주하며 즐기며 만족해하며 그 성의 화려함과 평안함과 사치로움과 안락함과 맛있음에 동요되어 살던 이들은 대부분 그 성의 멸망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 성에 하나님을 안다던 사람들이 아브라함 롯의 가족뿐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저 하나님 믿어요. 저 교회 다녀요’ 라는 이들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들이 없었다는 사실이지요. 그것을 롯의 처가 증명해 줍니다. 같은 가족, 같은 공동체, 같은 멤버여도 어떤 이는 심판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즐겁기 때문이요 자신도 그곳에 동화되어 있고 즐기고 있고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소돔 고모라 성이 영원하고 영화로운 castle 이 되기를 소망했던 까닭입니다. 신 신학을 배우고 자랑하는 대부분 목회자들은 화려한 뉴욕이나 하와이, 미국 땅이 영원한 땅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동산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을 믿지 않거나 유보되기를 원합니다.
이 땅의 타락을 아파하며 눈물로 기도하되 이 땅이 영원한 천국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제게 보여주셨던 [유리성과 바비인형 the Crystal Castle & Barbie Doll]이 암시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잘 가꾸어진 몸매의 바비인형들이 남녀 구별 없이 화려하고 멋지고 불이 번쩍거리는 호화로운 유리성 안에서 쿵쾅거리는 락 음악에 맞춰 발광하듯 춤추며 서 있는 모습.
우리는 도적이 언제 오는 것을 압니다. 저녁 잠잘 때 오기보다 대낮 졸고 있거나 다른 일로 잊어버리거나, 다른 일에 몰입해 있을 때 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집에는 오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있어 주기를 마음으로 바랐던 구원받은 롯의 처도 불에 타 죽었고 지금도 그 기념비가 있습니다. 초라하게. 볼품없이 깎이며 소금기둥으로 남아서 저처럼 되지 마세요 라고 부끄러운 하소연을 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크리스챤들은 성경이 하시는 말씀을 깨닫는 지혜(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운)가 필요합니다.
유리성 속 바비 인형들의 현기증과 절규
몇 년 동안 저는 현기증과 함께 내 안에 무의식처럼 잠재된 크나큰 공포를 안고 다닙니다. 그것은 화려한 유리성이 폭발되어지는 무서운 환상이었습니다.
유리성, Crystal Castle
우리들의 낭만과 꿈과 이상이 집결된 거대한 유리성, 그 성안에서 우리들의 희망이 농축되어져 우리를 최고의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곳, 우리들의 정염과 분위기와 쾌락과 갈증을 최고도로 만족시켜 주는 이상향, 그 이상향의 도시가 거대한 불꽃 속에 녹아내리는 모습을 본 이후, 내가 진정 추구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대한 소돔성과 고모라 같던 휘황찬란한 불꽃의 도시 유리성이 순식간에 스스로 불타 내리는 환상을 본 이후 오랫동안 할 말을 잊어야 했었습니다. 저 또한 그 거대한 유리성 안에 들어가기를 꿈꾸고 갈망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부담감과 괴로움의 갈림길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었습니다.
십 년이 훨씬 넘은 어느 가을로 기억됩니다. 수 년여 만에 고국 방문길에 올랐습니다. 버스나 기차보다 쉽게 찾고 갈 수 있는 지하철이 내겐 가장 편했습니다. 지인들을 만날 때도 늘 지하철을 이용했습니다. 금요일 오후로 기억합니다. 강남에서 신도림 가는 지하철을 탄 나는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며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제가 삼 년여 만에 다시 찾은 고국, 그 고국의 땅, 그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형제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멀고 먼 거리감을 느낍니다. 대화가 잘 안되기도 하고 이해를 못하기도 합니다. 저들이 하는 말을 쉽게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마치 이방인의 거리를 걷는 느낌입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저들은 어떤 도시를 걷고 있는 것일까?
흔들리는 지하철을 타고 제 몸도 흔들어 주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내 머릿속에 펼쳐지는 거대한 몇 컷의 그림들이 너무나도 실제와 동일했습니다.
잠시 놀라 눈을 떴다 다시 감았습니다. 다시 펼쳐져 오는 그림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거대하고 화려하고 반짝반짝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빛에 둘러싸여 돌아가는 유리성이었습니다. 금새 나도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느끼며 번쩍번쩍 빛을내며 돌아가는 큰 유리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놀이공원에 있는 큰 유희의 성 같기도 하고 지구본의 모양 같기도 했습니다. 달걀 모양의 유리성이 현란한 빛을 내며 돌아갈 때 마다 빛에 금가는 소리들이 나왔습니다. 수백 수만의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어떤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디스코텍의 노래 소리 같기도 하고 운동장의 함성 같기도 하고 싸움을 하는 이들의 응원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절규 같기도 했습니다. 색으로 표현한다면 검붉은 색에 샛노란 빛이 돌아가며 부딪히고 섞여지고 따로 발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순간 거대한 공포와 호기심과 함께 흔들거리는 유리성을 보며 함께 현기증을 느끼며 자세히 유리성 안쪽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현란한 빛에 반사되어 유리성 안에는 잘빠진 바비인형들이 서 있었습니다. 서 있다기보다는 굼벵이처럼 느리게 혹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바비인형, 어린 여자 아이들이 모두 갖고 싶어하는 바비인형, 노란 생머리에 쭉 빠진 어깨 다리 무릎, 오똑한 코, 도톰하고 볼록한 입술, 무릎 위까지 덮어졌습니다. 드러나는 짧은 미니스커트, 스커트의 색깔들은 모두 달랐지만 화려하고 독특하고 빛나고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것들이었습니다. 유리성이 돌아가는 가운데 그 안을 지켜보던 나는 몇 가지 독특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비인형들은 분명, 남성과 여성이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옷차림은 모두 미니스커트와 힐을 신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스커트 안으로 살 색 혹은 붉은 색 스타킹을 신어서 남녀를 구별해 주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유리성 안에는 쭉쭉 빵빵 잘 빠진 섹시하고 호감을 주고 귀티 나는 수만의 바비인형들만 서서 빠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흔들어 대고 있었습니다.
내가 잠시 눈을 돌렸다가 유리성 안을 보았는데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바비인형들의 얼굴을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자지러질 뻔 했습니다. 그리 잘 빠지고 섹시하고 멋지고 볼품 있고 유행에 최첨단을 달리는 바비인형들의 얼굴은 거의 대부분 몹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밥을 못 먹었을까? 잠을 자지 못했을까? 만날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까? 만족을 채우지 못했을까?
한결같이 그들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불만과 원망과 고통에 시달리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왜일까 저리 멋진 곳에서?
유리성에서 사막으로의 탈출 위한 용단 필요
잠시 후, 전보다 더 빠르고 거센 하드락의 음악이 울리자 수많은 바비 인형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에 맞춰 흔들며 돌리며 앉았다 서고 무릎으로 어깨로 비비고, 온몸을 비틀며 흔들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 비춰지던 렌즈가 앞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광폭의 음악 소리에 묻혀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듣게 되자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울부짖는 소리, 목이 떠나도록 부르짖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거의 발작하듯 피 터져라 내 뱉으며 그 화려한 유리성에서 탈출하고 싶어 했습니다. 어떤 이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입을 쩍 벌린 채 큰 소리로 소리쳐 울부짖는데 “제발 날 좀 이곳에서 내 보내주세요!”라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거의 광기에 흡사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과 함께 유리성 주변으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 올라 성 전체를 뱀의 혀처럼 감싸며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올라오는 불길과 함께 바비인형들의 부르짖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내젖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떴습니다.
잠시 그 환상을 본 후, 저는 소스라쳐 놀라며 물었습니다.
“주여 이게 무슨 의미의 환상입니까?” 세미하게 제 가슴에 다가오는 소리.
“이게 바로 오늘 날 너희들의 영적 모습이란다. 바비인형처럼 잘 다듬고 가꾸고 깎아 화려한 유리성에 살지만, 그 유리성에서 탈출하고 싶은 아우성을 치며, 그 화려함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광기 어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단다.”
그 후 저는 화려한 유리성에서의 탈출을 열망해 보았습니다. 어찌하면 유리성의 도시를 떠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았습니다. 가끔, 자주 광야 같은 곳, 선교지에서 살아가며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속에 숨어있는 그분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 십 도가 넘는 선교지에서 땀 흘리며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그분의 뜻을 찾으려 하고, 성경 속의 인물들을 떠올리며 그들은 어떻게 사막과 같은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을까 묻고 대답해 보기도 했습니다.
광야의 의미, 예수님은 커다란 사역을 마치신 후 황급히 강을 건너 다른 곳으로 가시고, 산속 깊은 곳으로 가셔서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을 가지셨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유리성은 무엇이며 광야는 무엇인지 어떻게 광야 길을 떠나야 하는지 묻고 또 물으며 대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제 십 오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광야 길을 가는 이의 영성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때로 우리는 탈출을 준비해야 합니다
가끔씩 우리는 현상이라는 주소에서 탈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어진 곳에 살면 내 바른 주소를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갇힌 동굴, 그 동굴의 우상을 깨닫지 못하고 안주하고 더 안주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깨어짐의 상황을 통해 우리를 탈출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탈출도 그런 일부분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안주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내몰아 허허 벌판으로 가게 하신 하나님, 요셉을 내몰아 애굽으로 가게하신 하나님, 야곱을 내몰아 벌판으로 가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소돔 고모라 성에서 안주하려는 롯과 그 처에게 빨리 성을 떠나 탈출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래도 주저하자 천사들을 보내셔서 직접 손을 이끌고 나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끝까지 성에서의 탈출을 머뭇거리다가 큰 화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탈출은 때로 성도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벗어남, 의도적인 벗어남, 용단을 가지고 안주하려는 일상에서 벗어남, 그것은 일탈과는 다른 것입니다. 잘 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 일탈, 잘못입니다.
웰빙 속에 잘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탈출을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 너무 오래 안주하고 그분을 잊으려 하면!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창19:15)
광야는 우리의 완전한 항복을 필요로 합니다
항복(surrender)은 불명예스러운 것이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항복이란 적과 싸우다 내 힘이 부족한 걸 알았을 때 백기를 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기쁨으로 항복하면 쉬이 해결 될 수 있는 것들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고개를 들이밀 때 서로에게 힘이 들기도 합니다.
때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전 우주를 총괄 지휘 감독하시는 하나님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시면서 함께 할 동역 자를 찾으십니다. 그 동역자는 하나님의 시각을 최대한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은 내가 자라고 경험한 부분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길을 걷는 많은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섬김과 사랑으로 이끌 리더들을 만드실 때, 사용하시는 전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항복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항복(surrender)은 내게 속한 모든 것과 내 지위, 내 권력을 모두 내려놓는 것입니다. 더 크게는 내 경험, 내 생각, 내 사유, 내 지식 등과 과거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나를 사용하실 분의 권위 앞에 기쁨으로 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실 자아가 강한 사람, 과거의 경험이 화려한 사람일수록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별한 전략을 통해 특별한 상황을 만드셔서 항복하게 하십니다. 즉 내 모든 힘을 모조리 빼 버린 후에 손을 들게 만드십니다.
모세가 사십 년의 화려한 궁궐 생활을 자기 스스로 털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광야 숲속에서 사십 년을 살던 모세에게 하루는 하나님이 가시떨기 나무숲에서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네 신발을 벗으라”
이 말은 거룩함에의 초청도 있지만, 지나온 모든 과거를 다 버리고 맨발로 서라는 것입니다. 7, 80도가 넘는 돌짝과 가시인 산에서 맨발로 서는 것은 완전한 자기의 부정이요 포기이며 항복입니다.
누가 두 손 번쩍 들며 외칠 것인가?
오늘도 이런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 저 백기를 듭니다. 마음대로 사용해 주세요.”
사막에서는 잊혀지는 법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잊혀져 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고, 관심을 받고 싶고 타인의 박수갈채를 받는 중심에 서기를 원합니다.
사막의 길을 걷거나 사막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은 자주 타인으로 부터 잊혀 짐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화려한 조명을 받고 살아온 동일한 사십 년 동안 모세는 타인들에게 잊혀진 채 숲과 나무와 양들과 벌레 소리와 바람의 흐름소리와 별의 운행과 하늘이 말하는 소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어쩌면 타의에 의해 잊혀지는 훈련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때로, 누군가의 강력한 힘에 의해 내가 대다수의 타인들에게서 잊혀 짐을 당할 때, 그 잊혀짐을 괴로워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피하려 하지 않고 잊혀짐을 넘어선 또 다른 만남, 더 큰 형이상학적 만남이 예비 되어져 있음을 깨닫는 자들은 잊혀짐을 오히려 감사할 줄 압니다. 누군가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더 큰 소중한 만남, 여태 느끼지 못한 새로운 만남을 배울 수 있다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궁궐에서의 잊혀짐이 없었다면, 어쩌면 그는 호렙산 떨기나무 아래서, 창조주와의 만남이 없었을 것이며 오늘의 이스라엘은 없을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출2:15)
사막에서는 폭우도 햇살도 늘 반길 준비를 해야 합니다
피할 곳이 많은 도시를 떠나 텅 빈 사막지대를 걷고 또 걸으려면 어떠한 것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준비를 해야 합니다. 고운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데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원한 봄바람에 속삭이며, 꽃향기 맡으며 꽃노래 부르며 걸으라 하면 모두 신나서 가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예기치 못한 불청객들이 너무 많습니다. 갑자기 불어닥치는 모래 바람이 눈과 코 입으로 들어와 갈 길을 막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저녁 길을 막으며 혼을 빼 놓기도 합니다. 우박같은 폭우가 머리를 때리며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하고 외로움이 너무 커서 가던 길을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사막에서는 누군가, 무엇에인가 의존하는 것보다 홀로 서서 길을 걷는 법을 터득하는 곳입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져 지쳐 일어나기 힘들 때에도, 실패까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각오로 당당하게 팔을 벌리고 서면 실패도 언젠가는 친구가 되어 위로해 주고 쳐진 어깨를 도닥여 주고, 성공으로 가져다주는 좋은 벗이 될 것입니다.
하여, 사막길을 걷는 영적 순례자들은 어떠한 것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각오로 걸어갈 때에, 나를 해치려던 험한 짐승들이나 험악한 날씨나 환경도 내게 벗이 되고,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때에 원수도 벗이 된다는 진리를 직접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서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28:10-11)
사막에서는 작은 것에도 감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메마르고 협착한 땅, 마른 풀, 엉성한 모습으로 드러누운 나뭇가지들, 가끔씩 포악한 짐승에 먹히우고 버려진 잔재들, 그저 하늘뿐이고 바람뿐인 사막, 걸어도 걸어도 눈을 만족시키고 배를 만족시켜 줄 것 없는 사막에서는 아주 작은 것에도 마음 열고 감동하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작은 풀 한 포기에 구르는 이슬방울에서 마른 영혼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바람 소리 천둥소리에서 신의 근엄과 공의로움을 느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길 사십 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작고 미세한 만나를 주어 배를 채우며 하나님의 놀라운 공급하심과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 할 수 있었습니다.
사막에서는, 스스로 가슴을 열고 열린 영혼으로 걸어갈 때, 하늘로부터, 땅으로부터, 숲속으로부터, 바람과 별들의 속삭임으로부터, 잔잔하게 혹은 파도처럼 밀려와 영혼 내밀한 곳을 채워주는 감동의 젖줄을 마시며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출16:14)
사막에서는 이른 아침 바구니 들고 나가야 합니다
사막에는 아직도 이른 새벽, 하늘의 만나가 내립니다. 축복의 만나, 평화의 만나, 위로의 만나, 기쁨의 만나, 만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주리를 준비해야 하고 만나를 줍기 위해 빈 광주리 가득 채워가야 합니다.
만나를 내려주시는 분은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께 감사하고 내려주심에 합당한 찬양으로 영광 돌리기를 원하시며 감사와 찬양의 광주리 가득 들고 오는 이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동이 트기 전, 이른 아침 햇살이 동녘을 어렴풋이 밝혀오는 때, 부지런한 아이들은 감사의 광주리 가득 들고 오늘은 어떤 만나를 내려 주실 까 설레는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광야로 나아갑니다. 광야에서는 바로 나와 만나를 내려주시는 분과의 지극히 일대일의 만남이 이루어 지며 그 만남의 채널에 감사와 찬양의 기름이 차고 넘칠 때 하늘의 만나는 이 땅을 풍요케 하는 축복의 기름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92:3)
사막에서는 계절에 민감하되, 계절에 둔감해야 합니다
사막 길을 걷는 사람은 하늘의 소리와 바람의 움직임, 구름의 이동에 민감하여야 적응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숲이나 동굴 속에서 피해야 하고, 잔잔한 바람이 불면 다시 걷거나 하던 일을 해야 합니다. 험한 구름이 갑자기 모질게 나타나면 폭우가 쏟아질 것을 예상하고 잠시 피할 곳을 찾아야 합니다. 심한 바람이 모래를 동반하여 불어오면 꼼짝 못하고 몸을 숨겨야만 합니다. 항상 자연의 반응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지혜와 빠른 몸놀림이 필요합니다.
반면, 사막 길을 걷는 나그네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휴일이나 절기, 설날, 추석절, 만우절, 화이트 데이 등 일 년에 수 십 일이나 되는 휴가나 공휴일을 모두 챙길 수 없습니다. 바삐 걸어야 하고 해야 할 미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도회지를 떠난 자들의 해로운 점이며 동시에 이점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사람들의 눈과 의식, 옷차림, 문화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그 길을 가기 위해 묵묵히 바보처럼 걸어가는 행진, 그런 행진들이 있을 때에 여유 있게 걸어가는 도회지 인들이 좇아갈 길이 열리는 줄 압니다.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렘 5:24)
사막에서는 “아픔”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사막에는 문명이 발달된 도회지처럼 병원이나 의사가 있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이나 스스로 터득해 내어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내야만 오랜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약을 챙겨 놓았다가 주지 않는 이상, 들에서 산에서 나무를 구해 풀을 구해 각종 질병을 이길 수 있도록 스스로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 길을 걷는 이들은 때로 아픔이나 고난, 생명의 위험 앞에서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져야 합니다. 여행 중에 보면 깊은 숲속 혹은 모래 속에 조용히 자신을 눕힌 채 담담히 하늘을 보며 삶의 마지막 여행을 정리하는 많은 동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생명의 존엄성을 느낌과 동시에 비장함을 맛보게 됩니다. 어떤 짐승들은 자신의 신체일부를 단절시키거나 희생시키므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때론 자신의 생명을 담담히 창조주 앞에 내어놓으므로 생명의 주인되신 창조주의 전적인 뜻 가운데서 거둬들여 지거나 혹은 회복되어지기도 합니다. 사실 자신의 생명을 창조주 앞에 내어 드린다 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미 내 목숨이 된 이상 내 목숨을 포기하려 하는 이는 어느 누구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오래 장수를 해도 죽음 앞에서 여유를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진정한 뜻을 깨닫고 살아가려면 삶과 죽음의 연합체가 곧 광야이며 창조주의 뜻임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빌딩과 첨단 문명, 사람들과의 부딪힘을 떠나 좀 더 하늘의 소리, 바람의 소리, 별들의 움직임을 가까이 하고 빈 사막에 홀로된 자신을 발견하고픈 순례자들이 준비해야 할 첫 번째는 바로 <생명은 창조주께 속함>을 절감하고 내 생명도 전적으로 그분의 손에 일임하는 위임 식을 치룬 후에 사막 길을 떠나야만 훨훨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