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궁리한다면 시에 대한 명랑한 비유를 늘어놓으며 재치를 뽐낼 수도, 미문을 동원하여 시 쓰기가 아름답고 탐스럽기만 한 일처럼 느껴지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시 쓰기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나는 최대한 나의 쓰기에 따르는 실천을 수사 없이 말해 보고 싶다. ―유계영, 「나란한 우리, 개와 고양이와 여인초와 나」중에서
합평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혹은 듣고 돌아오는 길에는 늘 마음이 무거웠다. 누군가 쓴 시의 특정 부분을 아쉽다 지적하고는 돌아와서 후회하기 일쑤였다. 곱씹을수록 괜찮은 표현인걸, 하고. 내가 쓴 시를 합평받을 때는 더했다. 합평 자리에서 내 시는 늘 부족했고, 결함투성이였다.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고, 누군가 자꾸만 내 시를 그렇게 재단하는 기분이었다. ―박소란,「생활이라는 감각」중에서
나는 시라는 것을 무엇이 ‘되어 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려면 때론 ‘영원’도 필요하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물론 ‘함부로’ 어떤 거대한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시는 무한히 나아간다는 것이고 나는 그 무한 속에서 단지 하나의 프레임을 보고 있을 것이라는 거. 그러므로 그 누구도 층계의 끝은 알 수 없겠지만, 다정하고 단호한 사람이 좋은 시를 쓴다고 나는 믿는다. ―백은선,「결코 치환될 수 없는 것」중에서
시를 쓰며 시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란 바다 속에서 숨쉬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어렵고, 언어 속에서 언어를 생각하는 일은 물고기가 물을 생각하는 일처럼 위험하다. 때로 아직도 시를 쓸 때 ‘시’라는 형식을 떠올린다. 정확히는 시의 눈치를 본다. 그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혜미,「흔적과 자취가 되어 나아가기」중에서
시가 발생시키는 착각의 순간은 일종의 데자뷔와 자메뷔의 체험을 유도하며, 이로 인한 감각의 착란을 통해 독자의 인식 속에 새로운 시간의 형태를 부조한다. 우리는 선형적인 것이라 여겨지는 일상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감각할 수 있다. 혹은 감각할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를 통해 깜짝 놀라는 동시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김선오,「그럴 수 없음을 알면서 그렇게 하기 」중에서
그날 밤 나는 봉인된 말을 꺼내 시를 썼다. 물론 메모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상상력을 가미하는데 주로 나의 상상은 입장 바꾸기다. 바라보는 자와 보이는 자를 바꿔서 생각하기. 나는 저 식물에게 어떻게 비칠까. 어쩌면 저 식물은 나를 보며 악몽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이 식물에게는 가장 끔찍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은 시를 짓는다. ―손미,「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중에서
공간은 때로 이상한 시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공간을 통해 과거의 나, 아직 오지 않았지만 가늠할 수 있는 미래의 나와 만나게도 된다. 나의 더러움과 괴로움, 동시에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갈 수도 있을 가능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이곳이 바로 나의 궁전이다.
시의 공간, 혼자 되는 공간, 그러나 입구와 출구가 같아 다시금 들어왔을 때의 입구로 나가야 하는 질서정연한 공간. 궁전치고는 어쩐지 조금 모자란, 그 모자람이 천장과 기둥이 되는 공간. 무섭게 사랑하는 나의 궁전이다. ―김연덕,「나의 궁전 」중에서
저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시를 보여 줬던 에밀리 디킨슨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은 그의 시를 사랑하고 아꼈던 그 소수의 독자들 덕분에 어찌어찌 우리에게 닿았지요. 하지만 여전히 서랍 속에 혹은 관 속에 들어가 버린, 우리가 읽지 못한 많은 시들도 저는 떠올려 보고 있습니다. 쓰였지만 읽어 주는 이가 없어서 사라져 버린 것들이요. ―김복희,「악마와 계약할 사람 」중에서
선생님은 당장 오늘내일만 쓸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사실 그 충고는 값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내일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이야기의 미래를 꿈꿀 수 없었어요. 저의 가시거리는 그렇게 불충분했었으니까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밌었고, 죽음의 후기를 상상하는 일이 즐거웠고, 언어의 정수리 위로 물수제비뜨는 것이 좋았어요. 그래도 조금 더 멀리 가봐야 할 심부름이 있다면 그것은 모호함이었지요. 모호함은 질문이었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모호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서윤후,「나의 젊은 선생님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