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5년간 타이포그래피를 전문적으로 가르쳤다. 이 책의 예시들은 저자의 것이거나 저자의 수업 과정에서 나온 학생 작품이다. 이 책의 목적은 완전무결한 비결을 제시하거나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을 ‘타이포그래피—디자인 안내서’라고 한 이유는, 타이포그래피와 그 기술적 과정이 디자인에 대한 질문과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인하지 않는 타이포그래퍼는 없다.
P. 5 「개론」 중에서
어느 시대에나 뛰어난 인쇄물이란 기술의 힘과 고유의 법칙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들 작품은 인쇄 초기의 잘못된 비교에서 비롯된 열등감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그 본질에는 깨끗하고도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P. 22 「쓰기와 인쇄」 중에서
인류는 말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옮기는 것에 매료돼 왔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명되고 읽고자 하는 욕망이 더해지면서 기능과 형태 사이의 관계는 복잡해졌다. 말의 특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타이포그래피의 형태만이 웃자라다시피 한 시대도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책 표제지나 바우하우스 시대의 구성주의 타이포그래피가 그 예다. 또 한편으로는 괴테나 쉴러의 초판본처럼 가독성을 고려한 나머지 형태에 소홀했던 시대도 있었다. 타이포그래피의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에는 말과 타이포그래피적 형태 사이에 완벽한 일관성이 보인다.
P. 34 「기능과 형태」 중에서
타이포그래퍼는 자신의 분야에서의 현재 및 미래의 기술 발전에 대해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술의 발전이 형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과 형태는 분리할 수 없다. 그 시대의 참다운 인쇄물이란 높은 기술적 수준과 형태적 수준을 함께 갖춘 것이다.
P. 64 「타이포그래피 기법」 중에서
형태의 법칙에는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구조화하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포함된다. 디자인을 하는 타이포그래퍼라면 이런 방법에 정통하고 그 활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활자의 홍수에 시달리는 독자의 입장(물론 타이포그래퍼 자신도 그중 한 사람이지만)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야 기능과
형태 모두가 높은 수준인 인쇄물을 만들 수 있다.
P. 82 「구조화」 중에서
대비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상반된 것이라도 조화로운 전체로 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가 있기 때문에 ‘위’가 있고, ‘수직’이 있기 때문에 ‘수평’이 있듯이 대립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개념이 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대비를 통해 생각한다. 우리에겐 평면과 공간, 멂과 가까움, 안과 밖은 더 이상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외에도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 ’가 있을 수 있다.
P. 132 「대비」 중에서
타이포그래피에서의 최신 기술 발달은 즉흥적인 효과와 우연한 효과를 가져올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납 활자 기술의 제약에서 벗어난 사진 식자는 인쇄 재료를 자유롭게 다루며 심지어 활자의 모양을 바꿀 수도 있다. 이런 자유에 단점이 있다면 어떤 형태든 허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타이포그래퍼는 이를 장점으로 바꿀 수 있다. 어쨌든 규율과 냉정함, 객관성이라는 타이포그래피의 특징은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은 대부분 기술과 기능에 의존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P. 200 「즉흥성과 우연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