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서류 더미에서 발견된 한 권의 책,
죽음에서 부활한 여자에 얽힌 기록은 과연 진실일까?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엠마 스톤 주연 영화화
휘트브레드상, 가디언 픽션상 수상작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장편소설. 20여 년의 집필 끝에 완성된 첫 출간작 『라나크』로 단테, 조이스, 오웰, 카프카 같은 문학계 거장들에 비견되며 스코틀랜드 문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레이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얻으며 휘트브레드상과 가디언 픽션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느 빅토리아 시대 문건을 우연히 입수하고 재출간하게 된 경위를 알리는 서문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한 천재 의사에 의해 죽음에서 되살아난 여성을 둘러싼 기이한 일화들과 군상극을 담은 회고록, 그리고 이를 반박하는 편지로 이어지며 흥미롭게 전개된다. 환상적 리얼리즘 기법에 탁월한 앨러스데어 그레이는 ‘편집자’로서 개입해 허구의 이야기와 실제 역사를 뒤섞으며 제국주의, 빈부 격차, 성차별 등의 문제를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시선으로 그려 낸다. 과거의 기록물에서 수집한 삽화와 실제로 저명한 화가이기도 했던 그레이가 직접 그린 판화 역시 몰입감을 높이는 요소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킬링 디어」, 「더 페이버릿」 등)가 감독한 영화가 올해 중 공개될 예정이며 엠마 스톤, 윌렘 데포, 마크 러팔로가 출연한다.
나는 또한 도널리에게 내가 그것을 읽었을 때 역사임을 알 만큼 충분히 많은 허구 작품을 썼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이 허구임을 알아볼 만큼 자신은 충분히 많은 역사서를 저술했노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선 나 자신이 역사가가 되어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답이 있을 뿐이었다._본문에서
투신한 성인 여성의 시체와 태아의 두뇌가 결합하여
탄생한 유일무이한 피조물 벨라 백스터
앨러스데어 그레이는 어느 박물관 직원이 폐기 문서 더미에서 우연히 발견한 원고를 넘겨받는다. 이 문건의 가치를 알아본 박물관 직원이 그레이에게 편집과 출간을 의뢰하였고, 그리하여 빅토리아 시대 의사인 맥캔들리스의 회고록과 그의 아내가 쓴 편지가 ‘가여운 것들’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19세기 말, 꿈을 이루기 위해 의대에 진학했으나 농민 가정 출신이라 동기들 사이에서 겉돌던 청년 아치볼드 맥캔들리스는 저명한 의사의 사생아이자 몹시 기괴한 외모를 지닌 고드윈 백스터와 종종 어울리다가 친구로 발전한다. 이른 나이부터 부친의 일을 보조하고 그가 작고한 이후에도 홀로 연구를 이어 가던 백스터는 맥캔들리스에게 자신이 ‘구했다’는 여성 벨라를 소개한다. 놀랍게도 그녀는 강에 투신해 사망한 여성의 육체와 태아의 두뇌를 결합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이후 백스터와 함께 세계 일주를 하며 10대 초반의 정신 연령으로 성장한 벨라와 1년여 만에 재회한 맥캔들리스는 그녀에게 완전히 매혹된다. 그러나 맥캔들리스와 결혼을 약속하자마자 벨라는 백스터의 유언장을 검토하기로 한 변호사 웨더번과 눈이 맞아 도피한다.
탄생했을 무렵에는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지 못했지만 빠르게 언어를 익혀 나간 벨라는 도피 생활 중에도 자유분방한 태도로 사람들을 만나며 스펀지처럼 세상사를 흡수해 나간다. 글래스고에서 유럽과 중동 각지를 돌아 파리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에서 만난 인물들은 당대의 국제정세와 사회상, 정치, 문화를 주제로 논쟁하며 벨라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지식이 쌓이고 정신이 성장해 갈수록 천진했던 시절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의문과 모순도 보이게 되는 법이다.
나는 즉시 식사 테이블을 떠났어요. 내가 들은 모든 새롭고 이상한 것들에 대해 조용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아마도 내 금 간 뇌 탓인지, H박사가 앵글로색슨인이 불과 검으로 치유하지 않은 세상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설명한 이후로 덜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어요. 이전에 나는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정다운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어요. 심지어 다친 사람이 골이 잔뜩 난 우리 암캐처럼 덤벼들었을 때도요. 갓, 왜 내게 정치를 가르쳐 주지 않았죠?_본문에서
한편 충동적으로 사랑의 도피를 한 웨더번은 벨라의 왕성한 욕구에 부응하지 못해 점차 그녀를 기피하게 되고 도박에 빠져든다. 웨더번과의 결별 후 파리의 밑바닥을 경험하던 벨라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어두운 현실에 진저리치며 마침내 귀향하기로 한다. 그러나 글래스고에서는 백스터와 맥캔들리스뿐만이 아니라, 전생의 삶이 초래한 파국적 스캔들까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은 이제 두 가지 이야기 가운데에서 선택할 수 있으며,
어느 것이 더 개연성이 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대를 앞선 의학적 기적인 벨라 백스터에 대한 맥캔들리스의 충격적인 회고록은 그와 마찬가지로 의사였던 아내 “빅토리아”의 폭로성 편지에서 완전히 부정된다. 내성적이고 낭만에 빠져 있던 남편과 달리 운동가, 사회주의자, 독지가로서 많은 역할을 했던 빅토리아는 미래의 후손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의문을 던진다. 왜 맥캔들리스는 메리 셸리와 에드거 앨런 포 등 당대 유명 소설의 설정과 실제 사실을 교묘하게 섞은 이런 거짓을 만들어 낸 것인가? 그러고 나서 그의 공상을 “단연코 가장 병적인 세기라 할 수 있는 19세기에 존재한 모든 병적인 것들의 냄새”를 풍기는 이야기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극악무도한 패러디”라고 치부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할까? 그레이는 (역시 허구와 실제를 뒤섞은) 상세한 비평적·역사적 주석을 능청스럽게 덧붙이며 판단의 근거를 제시한다. 읽는 이가 “꾸밈없이 들려주는 좋은 이야기만을 원하는 독자”이든 “전문적인 의심가”이든 『가여운 것들』이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갈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