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음 (시인)
위단비의 소설은 경계 짓는 모든 숱한 세계에 대한 대항적 말 걸기다. 경계 지어져 이쪽과 저쪽으로 나뉜 삶 안에서 어리둥절해하거나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건네는, 체온을 품은 속삭임이다. 경계 짓기를 의심하며 차라리 경계 위에서 부유하기를 택한 자가, 구분 짓기 좋아하는 다수자들의 법과 규범과 믿음체계에 의해 쩍 갈라진 이분법적 개념의 세계 속으로 미끄러지듯 뛰어드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뛰어들어 수없이 비틀거리면서도 또박또박 들려주는 이야기의 릴레이다. 가진 것도 없고 힘이 센 것도 아닌데 그저 뛰어들어 그리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누군가를 구원하리라는 희망만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한다. 작가의 그 무모함마저 구원의 요소는 아닐까. 빈손으로도, 작디작은 목소리로도 체온을 건네고, 고백을 해오고,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 다친 몸으로도, 일부가 떨어져나간 마음으로도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는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라질 일만을 기다리며 희미해져만 가던 누군가 말이다. 이런 제스처는, 그곳의 창백한 당신도 눈을 깜빡이고 손끝을 까딱이고 입술을 움찔거려보라는, 그러면 멀지 않은 곳에서 당신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당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눈빛과 손길과 목소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메시지이기도 할 테니까.
다르게도 말할 수 있다. 작가의 이 같은 도전은, 이야기를 듣고 알아봐주고 그러다 자신과 겹쳐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누군가의 시간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믿음이 존재를 만든다. 없는 몸을 있게 하고, 없던 마음을 자라나게 한다. 독자는 언제나 이미 위단비의 작품에 초대되어 그 안에서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위단비는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의 실재와 상상의 사이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이야기의 행로를 기꺼이 따라와줄 미지의 독자를 모두 다 데리고서 이야기를 쓴다. 외줄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경계 위에도 삶이 있다고, 그 삶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삶이라고, 여덟 편의 이야기와 여덟 개의 목소리로써 말한다. 그 여덟 개의 목소리는 모두 그녀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미리 초대되고, 이미 초대에 응해 소설 속에 살고 있는 당신들 말이다. 여기서 마음껏 기대어도 좋을 당신들. 어디서든 외로웠으며, 어떻게 해도 괜찮지 않았던 당신들.
물론 위단비는 섣부르게 위로하거나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만나서 외로움을 해소하자고 하는 대신, 외로움 곁을 또 하나의 외로움이 지키고 서겠다고 말하는 방식을 취한다. 괜찮지 않은 상황이 이제 나아질 거라고 말하는 대신, 괜찮지 않은 삶들이 이따금 만나 괜찮지 않음의 별자리로써 한 번씩 함께 잊지 못할 빛을 내자고 제안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분법의 세계에서, 혹은 당신을 무엇 하나로 가두는 이름의 세계에서 한 번이라도 숨 막혀본 적 있거나 식은땀이 났거나, 어딘가 아주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 적 있는 당신이라면 서슴없이 당신의 삶을 안고 이 책 속으로 들어오기를 요청한다. 아니, 어서 이 책이라는 바깥으로 나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