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문화예술’과 ‘지역성’에 대한 단상
김 주 현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 문화기획전공 교수)
최근 ‘지역성(Locality)’의 개념은 문화예술 분야를 포함한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 모든 분야의 경계와 시공간 개념이 허물어진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앞 모든 것들의 기준이 전 세계적으로 평준화된 지금, 왜 ‘세계화(Globalization)’를 넘어 ‘지역성’의 개념이 주목받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 사용자들이 정보를 읽고 받아들이는 수동적 단계인 웹 1.0 시대를 지나 직접적으로 플랫폼에 참여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웹 2.0 시대가 도래하며, 온라인 세계는 정보의 가치를 평준화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새로운 기회를 탄생시키는 장이 되었다. 예를 들자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세계적 석학의 강의를 물리적 이동 형태인 ‘유학’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무료로 접할 수 있으며, 게시판을 통해 전 세계 수강생들이 각자의 관점을 공유하는 활발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다. 나아가 같은 내용의 강의를 대륙별, 국가별, 지역별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담론을 끌어내기도 한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과거 소수가 차지하던 정보의 가치와 분야의 경계는 웹 1.0 시대에서 이미 내파된 동시에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로 전환되었으며, 모든 것이 유사해지는 이 시기에 ‘차이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특이성’의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즉, 세상에 새로움을 제시할 수 있는 지점의 요구, 동일한 콘텐츠 사이에서의 차이점을 둘 수 있는 지점의 요구, ‘지역성’은 이러한 지점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동시대 주요 키워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경남, 부산, 울산에 속해있는 문화예술계는 동시대의 흐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지역성’을 도출해야만 하는가? 나아가 해당 ‘지역성’을 필두로 지역 문화 분권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떠한 태도를 갖춰야만 하는가? 미술계를 예로 들어보자. 2000년대 초반까지의 전국 미술대학 졸업전시회를 떠올려보자면, 대학에 따라 소위 ‘지역색’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서울 및 경기권에 있는 대학에서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주관적 표현법에 따른 추상적 작품이 주를 이루었던 반면, 경상도권의 대학 전시에서는 대상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표현하려는 구상적 작품이 다수 전시되었다. 또 다른 예시를 보자. 주로 새로운 심미적 영역을 탐구하는 뉴미디어 관련 전시의 경우, 서울권에서 개최되는 전시는 문화적·역사적 맥락을 기준으로 각 시기점에 관련된 작가와 작품을 전시 기획에 배치하는 압축보관(아카이빙) 방식의 전시가 기획되는 경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 부산에서 위와 같은 지역 및 역사적 맥락을 중심으로 하는 뉴미디어 전시 기획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리얼리즘’을 중시하던 과거 지역 문화예술의 특성을 이유로 한다. 현재 미술계를 둘러보자면, 과거에 존재했던 ‘지역색’은 현대 시각예술가의 창작물에서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대상이 ‘해당 지역의 모습’일 수는 있지만, 창작자의 사고방식, 제작과정, 결과물 등은 각자 다른 지역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별반 차이가 없다. 이는 대학 커리큘럼의 문제일 수도 있고, 모든 사고방식이 평준화되는 현시대의 탓일 수도 있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예술적 ‘특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며, 이는 항상 새로운 미적 영역과 실제 세계의 경계에 서 있어야 할 예술가에게는 치명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위 내용은 미술계만이 아닌 문화예술 분야에 속한 모든 이에게 당면한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지역성’이라는 키워드는 모든 것이 비슷한 선상에 존재하는 지금 시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예술가는 단순히 지역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지역 문화를 체화하고, 지역적인 관점에 의하여, 지역 맥락을 기반한 창작활동을 펼쳐야 한다. 위 과정을 통해 탄생한 창작물은 전 세계라는 거시적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특이성’, 즉 ‘새로움’으로 인식되며, 이는 미래 지역의 문화 분권을 실현화할 수 있는 당위성을 확보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스토리 소위원회’는 ‘경부울 문화연대’ 소속으로서 ‘지역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 개발을 추구하는 동시에 지역 문화의 힘을 갖추고자 창작활동을 펼치는 예술가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해당 위원회의 활동은 향후 지역 문화의 콘텐츠 자원을 개발하고 지역 문화예술계 존립의 타당성을 갖추는데 초석이 될 것이다. 이에 본 단체가 향후 지속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제언 하나를 지면을 빌려 올리고자 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자’. 이는 자크 라캉의 언어이다. 예술가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창작활동을 펼쳐야 할 것이다. 개인 사유의 미로에만 갇힌 예술가가 타인의 인정을 받고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영위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매우 드물었으며, 시대별 천재로 불리던 예술가들도 세상의 고민과 타자의 욕망을 탐구하며 활동을 펼쳐왔다. 즉, 예술가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속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개인화, 지능화, 상황인식 등이 대표 키워드인 웹 3.0의 시대로 진입하는 현재, 우리는 개인 삶의 패턴에 맞추어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편집한 정보를 토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유사한 사례로 사용자의 취향을 데이터화하여 관련된 콘텐츠를 제공하는 넷플릭스의 큐레이션 시스템을 들 수가 있겠다. 이러한 시대에서 예술가는 대중이 어떠한 사유방식으로 콘텐츠를 해석하는지, 자신의 결과물이 유사한 창작물 집단 안에서 어떠한 차이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동시에 고민해야만 한다. 창작물은 세상에 선보이는 순간부터 개인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되기에 예술가는 그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스토리 소위원회’는 향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 ‘스토리 콘텐츠’를 발굴하는 동시에 미래 경남·부산·울산의 대표적인 지역 문화자원 개발을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또한, ‘지역성’을 활용하여 작품의 ‘특이성’, ‘차이점’을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비전을 선보이는 동시에 지역 문화예술계 지속성에 큰 힘을 실어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