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돈 나름이고 사람도 사람 나름이다. 사람도 자신의 본래 가치보다 과대 포장되면 결국엔 그 실상이 드러나서 인품이 곤두박질친다. 지나치게 잘나서 사회 적응을 못하는 경우도 문제지만, 제대로 인품을 갖추지 못하면 진정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돈은 그대로 두고 돈 담았던 바구니만 훔쳐 가듯이 위급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을 놔두고 그의 허름한 옷가지만 벗겨가는 세상. 그런 세상이 아닌, 사람이 사람 노릇 하고 사람대접 받는 세상을 꿈꾼다. (p.22)
<돈도 돈 나름> 중에서
기다리지 못하는 인간의 조급증이 나의 퇴직 즈음과 겹쳤다. 정년이 다가올수록 후배들 눈치가 보였다. 한 해라도 일찍 퇴직하면 그들에게 승진 기회가 생길 텐데…. 쌓여가는 부담을 알아챈 퇴직 선배가 눈치 보여도 끝까지 버티란다. 퇴직하면 누구도 돌봐주지 않으니 심적 부담에 절대 밀리지 말란다. 선배 말이 옳다 싶었다. 연공서열 파괴로, 정년 가까웠다는 눈치로 밀어낸다고 물러날 일만은 아니었다. 시든 꽃은 때가 되면 땅으로 진다. 그러니 만사 조금 기다려주는 게 순리다. 시든 것도 서러운데 흔들기까지 하면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p.78)
<꽃도 잎도 한철이거늘> 중에서
“지금 사표를 쓰면 정말로 집으로 돈 싸 들고 오라고 인정한 게 되는 거야. 사표를 쓰더라도 나중에 다른 일로 써!”
결국 나는 수십 년 선배인 감사관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다시 사표 쓰는 일 없이 30년 넘게 감사 업무를 처리하며 정년퇴직했다. 근무 중 감사원 창립 기념일에 청렴한 직원에게 주는 마패상도 받았다. 감사관, 과장, 국장, 총장, 네 분 모두 고인이 된 지금도 새내기로 재직 시 감사원 빨간 승용차 사연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p.211)
<빨간 승용차 사연> 중에서
개펄을 밟으니 발이 무릎 위까지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줄자 끝을 잡고 첫 발짝을 옮기는데 장화는 그대로 개펄 속에 박히고 발만 쏙 빠져나왔다. 장화와 발이 함께 밖으로 나오려면 장화 등에 얹힌 뻘흙을 들어 올리듯 발을 올려야 하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몇 걸음 옮기다가 장화를 포기하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장화를 벗고 걸어도 개펄 걷기는 여전히 힘들었다. (p.248)
<개펄 재기와 종패 세기> 중에서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청년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불결하게 느껴지던 티셔츠지만 그 티셔츠를 통해서 청년의 따듯한 체온이 내 손으로 전해 왔다. 이름도 모르는 그 청년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 그에게 의지하는 그때, 갑자기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 마디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 그 청년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으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p.326)
<2달러의 체온> 중에서
그들은 내가 늦은 나이에 학생이 된 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왜 다시 학생 노릇을 하기로 했나 자문해 보았다. 퇴직 후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것이 먼저고, 그다음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40여 년 동안이나 써먹어 다시 충전할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문화교양학과를 택한 것은 수년째 배우는 수필 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이기도 했다. (p.363)
<노학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