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에 트럭이 전복되어 강물에 빠진 아버지를 건져 올린 날은 세상도 꽁꽁 얼었다. 아버지는 팔 베고 누워 잠든 나를 떼놓고 장사를 나갔다. 내 몸 열꽃이 더 심했더라면, 아버지는 보채는 나를 끌어안고 하루 장사는 쉬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헤어지던 그 장소다. 아버지가 마당에서 환하게 웃으며 초로의 딸을 바라본다. 다섯 살 아이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아버지는 스물여섯 청년 그대로다. 무슨 말을 할까, 어떤 말이 하고 싶었던가. 반세기를 건너뛴 시간이 부녀 사이를 침묵으로 막아선다. 어느새 커피는 식어간다.(p. 14~15)
-<커피가 식기 전에> 중에서
언어란 입으로 내뱉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표정으로 마음을 읽고 소리 높낮이로 감정을 알아차린다. 헛기침 소리는 오랜 시간 주고받은 암호화된 그들 부부의 전용 언어가 아닐까. 진정한 소통엔 그리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은지 모른다. 문제는 말의 모자람이 아니라 진정성의 정도일 터니.
치켜든 도끼날이 햇살에 반짝 빛난다. 모탕에 올려놓은 나무 둥치가 바짝 긴장한다. 식이 아부지가 숨 고르기를 한 후 내리친다. 수십 년 갇혀 있던 침묵을 깨고 나무는 둥글게 감고 있던 말을 뱉는다. 도낏자루를 세우고 헛기침을 하자 그의 아내가 부엌에서 막걸리 한 병을 내놓는다. 텔레파시가 방금 둘 사이를 통과했다.(p.19)
-<식이 아부지> 중에서
이제 기차는 멈췄다. 고향 간이역을 마지막으로 그는 기차와 작별했다. 삼십 년이 넘도록 그의 곁을 스쳐간 기차만큼이나 숱한 이야기들이 우리 곁을 머물다 갔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기차처럼 빨리 지나가버렸다. 놓쳐서 아쉬운 것들이 너무 많다. 종착역이 가까워진다. 수기를 흔들 듯 힘차게 흔들었던 삶의 깃발도 머지않아 내려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액자 속 남자가 기차를 배웅한다. 기차는 떠나고 기적소리도 멀어진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간이역에서 수기를 흔들며 기차를 맞이하고 보내는지 모른다.(p. 84)
-<기차는 지나갔다> 중에서
온 힘을 쏟아 꽃을 피우는 나무가 봄볕에 휘청거린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펼치는 축제일까. 불꽃처럼 타오르는 꽃빛이 서럽도록 곱고 눈부시다.
우리네 삶이라고 뭐가 다르겠나. 노을 지기 전 하늘이 가장 아름답고 떠난 사랑이 더 애틋하다. 스무 살 풋풋함도 서른이 되어야 알게 되고, 육십의 의미도 여든 황혼 길에 들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삶은 절박할 때 비로소 절실해진다. 비록 짧은 생이지만 뜨겁게 자신을 불사르는 사과나무의 마지막 투혼에 숙연해진다.(p. 123)
-<아픈 사과나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