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점점 작아졌다!
‘치매’로 통용되는 인지저하증의 대표적인 증상은 ‘퇴행’이다. 퇴행의 뜻은 ‘공간적으로 현재의 위치에서 뒤로 물러가거나 시간적으로 현재보다 앞선 시기의 과거로 감’이다. 치매는 시간적 퇴행에 해당한다. 인간은 청년이 될 때까지 성장을 하다가 노화에 접어들게 되는데, 퇴행성 질환이 생기면 다시 과거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아이처럼 행동하고, 최근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시절 일은 또렷이 기억하는 걸 보면 시간적 회귀가 분명하다.
국내에도 고정 독자가 많은 다비드 칼리가 이번에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빠를 이야기한다. 그림책 《나의 작은 아빠》는 싱글 대디 가정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남성 가족 구성원들이 양육, 성장, 살림, 부양, 간병 등 서로 돌봄 노동을 수행하며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생성해 나가는 관계를 시적으로 간결하게 그려 내어 잔잔한 감동을 전해 준다.
그림책 《나의 작은 아빠》의 메인 키워드는 제목 그대로 ‘작은 또는 작아지는 아빠’이다. 어떨 때 아빠가 작아질까? 상사에게 깨질 때, 승진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아이가 아플 때 등 이 시대 아빠들은 자주 작아질 수 있다. 그중에서 기억을 잃어버리고 아이처럼 행동하게 되는 퇴행성 질환에 걸렸을 때가 가장 충격적으로 작아지는 사건이 아닐까. 작가는 아들과 아빠의 관계가 묘하게 역전되는 모습을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찡하게 그려 냈다.
아들이 보살피는 작은 아빠, 웃음은 잊지 않았다!
이 책은 아들 입장에서 본 아빠의 모습이다. 병에 걸린 아빠의 깊은 슬픔은 가려져서 잘 안 보인다. 일부러 가린 것이기도 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빠는 매우 커다랗게 보인다. 아이가 자라고 나서는 아빠와 키가 몇 년 동안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빠가 조금씩 작아진다. 아빠는 아들에게 “이제 나보다 더 커졌구나!”라고 말하지만 아들은 진작에 다 자랐고 반대로 아빠가 작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른 뒤 아빠는 의자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그림 속 아빠가 점점 작아진다.
아들은 아빠의 변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다. 아빠는 작아질수록 아이처럼 행동한다. 방 청소도 하지 않고 욕조 같은 데서 잠들기도 한다. 단 걸 좋아하고 가끔은 아이처럼 운다. 열쇠를 못 찾거나 티비 끄는 걸 잊었다. 어느 날 아들이 긴 출장을 떠났다. 한 달 동안 못 만나면서도 아들은 매일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빠는 더 조그매졌다. 집 안은 엉망진창이었고 밖에 나갈 수 없었던 아빠는 개도 안 키우면서 사둔 사료를 먹고 있었다. 아들은 이제 인형처럼 작아진 아빠를 받아들인다. 아들은 작아진 아빠를 무릎에 앉히고 자장가를 불러준다. 어느새 작아진 아빠는 머리도 하얗게 샜다. 다른 걸 다 까먹어도 웃는 건 안 까먹었다. 매일 아빠를 보러간 아들은 아빠가 어릴 때 자기에게 해준 것처럼 책을 읽어 주거나 함께 놀아 준다. 아빠 기분이 늘 좋은 건 참 다행이다. 아들은 아빠를 목마 태우고 산책을 나간다. 모든 걸 처음 배우는 아이를 대하듯 아빠를 챙기고 돌보고 간병한다.
돌봄의 형태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선한 영향력
인생은 탄생 이후부터 시간과의 싸움이다. 리베카 솔닛은 “언제나 시간이 이긴다. 우리의 승리란 단지 유예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태어난 뒤부터는 남은 시간과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 아프지 않게 자라 학교를 가고 학업을 마치면 돈을 벌러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가고…. 가끔 일어나는 달콤한 유예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시간, 추억, 서로를 살펴봐주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빠와 아들은 가장 밀접한 가족이며 서로를 돌봐야 하는 책무를 짊어져야 하는 관계이다. 노인 돌봄이 주로 여성에게 짐 지워지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주체적으로 돌봄을 실천하는 것과 아버지가 아들을 돌본 뒤 역으로 그 아들이 아버지를 돌보는 수순이 자연스럽게 그려진 것이 이 그림책의 미덕이다. 어쩌면 우리의 이상을 담은 것일 수도 있다. 알츠하이머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모의 병을 지극히 아름답게 그려 낸 것, 여성이 아닌 남성이 친밀한 모습으로 부모를 부양하는 것, 아들이 아버지의 병을 대하는 태도와 감정이 성숙한 가족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 이 모든 것이 이상적이다. 현실을 지극히 핍진하게 그린 그림책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상적인 그림책 또한 필요하다. 이상적인 그림책이 독자에게 더 나은 길을 알려 주기도 하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슬픈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이 책 출간을 앞두고 글 작가 다비드 칼리에게 서면 인터뷰를 요청했다. 어떤 계기로 이 책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냐는 질문에, 몇 년 전에 어머니가 조기 노인성 치매에 걸려 온 식구가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다비드 칼리의 작품에는 늘 유머가 있다. 아빠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많은 스킬을 잊어버렸지만 웃는 것만은 끝까지 잊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도 작가의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작가의 “나는 인생이 단순히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척 행복한 순간에도 약간의 슬픔이 있을 수 있고, 슬픈 순간에도 유머를 찾아낼 수 있어요. 그래서 글을 쓸 때 항상 이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섞어요.” 이런 답변은 그의 모든 책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전시 ‘그러면, 거기’의 아티스트 장 줄리앙이 그린 그림책
이 책은 작년 가을부터 올 초까지 동대문DDT에서 했던 전시 ‘그러면, 거기’의 아티스트 장 줄리앙이 그림을 그렸다. 전시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몇 년 전부터 아는 사람은 아는 작가였지만 이제 장 줄리앙은 상당히 많은 한국 팬을 가진 성공한 아티스트이다. 장 줄리앙은 프랑스에 살고 있지만 전속 에이전시는 미국에 있고 전 세계를 무대로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는 비주얼 아티스트이다. 전시, 출판, 잡지 등 래거시 미디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기본이고, 서핑보드, 다양한 패키징, 궂즈 상품, 옷, 포스터 등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경계 없이 그림을 그리고 판매하고 영상 제작까지 하는 작가이다. 수 년 전부터 한국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허재영과 함께 브랜드를 만들고 전시를 하고 의류 상품을 판매하여 어느 나라보다 한국 팬이 많다고 한다. 세계적인 아티스트 장 줄리아의 몇 권 안 되는 출판 그림책 중 한 권이 될 《나의 작은 아빠》는 작년 전시의 여운이 남아 있는 독자들에게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으로 다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