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백혈병에 걸렸어.
아빠는 나에게 무슨 병인지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어. 어차피 비밀도 아냐. 우리 병실에는 온통 백혈병하고, 백혈병과 비슷한 재생 불량성 빈혈 환자들만 있으니까.
나는 키가 작아. 백혈병에 걸린 2년 동안 다른 아이들처럼 쑥쑥 자라지 못했어. 백혈병이 내 키를 나무 기둥에 쾅쾅 못을 박아 둔 거야.
또 백혈병은 심술쟁이 고양이 톰 같아. 만화영화 <톰과 제리>에 나오는 고양이 말이야. 나는 매일 도망만 다니는 생쥐 제리 꼴이지. 제리가 아무리 도망쳐도 톰은 끈질기게 제리를 쫓아다니거든. 못된 고양이 톰처럼 백혈병은 날 끈질기게 못살게 굴어. p.13
2)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
누군가 다움이의 침대 머리맡 벽에 써놓은 글입니다. 아주 작은 글씨라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겨우 읽을 수 있습니다.
며칠 전 다움이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빠는 차마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혹은 내일 당장 위험한 순간을 맞을지도 모르는 다움이였습니다. p.57
3)
다움이가 다시 입원했을 때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밤바다의 등댓불처럼, 불빛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육지를 찾는 고깃배처럼, 아빠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병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이제는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절망뿐이었습니다. 마치 빠르게 가라앉는 난파선에 올라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p.85
4)
“다움이는……, 다움이는 꼭 다 나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서 아빠를 기쁘게 해 드리렴.”
성호 엄마가 나를 껴안았어.
내 반질반질한 머리통 위로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어.
다시 한 방울, 또 한 방울.
내가 잠깐이라도 성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성호 엄마가 울지 않아도 될 테니까. p.98
5)
아빠는 천천히 걸으며 말했어.
“지금처럼 업고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아야 겨우 잠이 들었지.”
“창피하지 않았어?”
“그랬을까?”
나는 대답 대신 아빠의 귀를 가만히 만져보았어. 그리고 속으로만 말했지.
나중에 내가 커서 힘이 세지면 실컷 업어줄게, 아빠. p.139
6)
아빠는 오늘도 뱀탕을 끓였어. 아, 끔찍한 뱀탕.
그동안 무시무시한 독사를 백 마리쯤 먹었을 거야. 생각해 봐. 열 살짜리 꼬마가 그 많은 뱀을 하루도 빠짐없이 먹는 게 말이나 돼?
아빠는 닭을 푹 고은 삼계탕이라고 했어. 처음엔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맛도 삼계탕하고 똑같았다니까. p.161
7)
아빠는 그동안의 일을 후회했습니다.
어쩌자고 다움이를 사락골로 데려갔을까.
차라리 병원 치료를 계속 받았다면, 지금처럼 빠르게 나빠지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는 중환자실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