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이 아이는 큰일을 할 인물이 분명하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으니, 이 아이의 이름을 응할 응, 일곱 칠을 써서 응칠(應七)로 지어야겠다.” 이렇게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아이가 바로 안중근이었다. 응칠은 안중근의 아명으로 북두칠성의 기운을 따른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훗날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안중근은, 뒷날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성은 안(安)이요, 이름은 중근, 어릴 때의 이름은 응칠이다. 나의 타고난 성질이 가볍고 급한 듯하여 이름을 중근이라 짓고, 가슴과 배에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어릴 적 이름을 응칠이라 하였다 한다.”
<제1장_ 북두칠성을 등에 새긴 아이> 중에서
안중근은 문반이기보다 무반에 가까웠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중에서 해박한 사적(史的) 감각으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분석한『동양평화론』이나 애국혼이 넘치는 한시와 수많은 유묵에 나타난 필력 등은 당대의 석학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그의 학문과 식견 그리고 필체가 우수했음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집안 서당에 초빙된 스승에게서 각종 유교 경전과『통감』 등을 배우고, 조선사와 만국 역사에 대해서도 두루 섭렵했다. 또한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겨 숙부와 사냥꾼을 따라 종종 산을 탔고, 그 과정에서 사격술도 익혔다. 안중근이 뒷날 대의를 위해 의병이 되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은 어릴 때부터 지녔던 이와 같은 상무적인 기풍 때문일 것이다.
<제1장_ 북두칠성을 등에 새긴 아이> 중에서
이렇듯 안중근은 그 생각이나 행동이 소년 시절부터 남달랐다. 글공부를 통해 과거를 준비하는 것이 당시 양반층 자제들이 밟던 전형적인 과정이었으나, 안중근은 과거 시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 안태훈 역시 이를 강요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익힌 무예와 병법, 여기에 담대한 용기와 탁월한 지략으로 상무의 기풍을 키우면서 동학군과의 전투에 앞장섰다. 그리고 열여섯 소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줬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칭찬이 끊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학군과의 싸움을 경험하면서 안중근은 국가의 안위를 이렇게 걱정하기 시작했다.(『안응칠 역사』, 1979)
“나라에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업신여겨 백성이 군사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라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 만약 갑자기 외국 열강이 우리의 약함을 노려 침략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약에서 벗어나 무강의 기풍을 조성함으로써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
<제2장_ 동학농민운동의 횃불 아래> 중에서
“이처럼 나라가 어려운 이때에 자네는 분명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활동하지 않는가? 지금 서북 간도와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 등에는 한국인이 백만여 명 살고 있네. 그곳이야말로 물산이 풍부해 활동하기에 충분하네. 그런데 어찌 이곳에서 가만히 앉아 일본의 만행을 보고만 있는 것인가”
벌써 오래전에 만난 김진사의 말이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국내에서 학교를 설립해 사람들을 교육하고, 또한 단체를 만들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의 간섭은 점점 심해져 갔으므로 국내에서는 활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지금 벌이는 교육구국사업과 애국계몽활동들은 분명 조국에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활동만으로 나라가 독립하기를 기다리기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는 막연하게나마 하고 있었다.
<제4장_ 나라 잃은 슬픔을 배우다> 중에서
한참을 고백하듯 말하던 최재형이 드디어 눈을 떴다. 그리고 안중근을 바라봤다.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도 그런 굶주림 때문이겠지. 조국을 떠나 이곳까지 온 것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려는 것도 말이오. 조국에 대한, 동포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뜻에 대한 굶주림.”
안중근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최재형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의 눈빛에서 좀 전에 살짝 비쳤던 의심의 그림자는 사라진 채였다. 그런 안중근을 최재형은 미소를 지으며 쳐다봤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빛이 되겠소. 당신의 굶주림을 채워 줄 빛 말이오. 지금 그 눈빛, 어떤 것도 감내하려는 각오가 서려 있는 그 눈빛을 간직하시오. 그러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당신이 걷는 길을 비추도록 노력하겠소.”
순간 안중근의 눈앞에는 정말 한 줄기 빛이 솟아난 듯했다.
<제5장_ 의병투쟁을 벌이다> 중에서
안중근과 맹원들이 선혈로 쓴 ‘한국독립기’와 단지동맹 때 절단한 손가락 그리고 기타 서류는, 독립운동가들과 러시아 지역 한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배일배는 신을 숭배하듯이 하고 새로 조선에서 오는 자는 일부러 와서 예배를 청하는 자조차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중근은 단지동맹의 의미를『안응칠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다음 해 정월, 연추 방면으로 돌아와 동지 열둘과 상의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이제까지 일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할 길이 없다. 생각컨대 특별한 단체가 없다면 무슨 일이든 목적을 이루기가 어렵다.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하여 표적을 남긴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뭉쳐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더니 모두가 좋다고 따랐다. 이에 열두 사람은 제각기 왼손 약지를 끊고, 그 피로써 태극기의 앞면에 네 글자를 크게 쓰기를 ‘대한독립’이라 하고는, 다 쓴 다음에 ‘대한 독립 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
단지동맹은 의병의 재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당장 일제와 싸우기보다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하고자 결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의병을 조직해 일제와 전쟁을 하려는 것이었다.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고 의병활동을 함께해 온 김기룡은 뒷날 시베리아 지역에서 한인사회주의운동을 했고, 안중근 의병부대에 참가했던 조응순은 고려공산당의 한인부 위원과 한국독립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황영길은 대한민회 연추지방회 사무원과 훈춘의용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의용군 1,300여 명을 조직해 경원과 은성 등 국경 지방의 습격을 주도했다. 백규삼은 훈춘조선인기독교우회 회장, 안중근유족구제회 간부 등을 지내면서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했다(윤병석, 1999).
<제6장_ 의병활동과 단지동맹> 중에서
마침내 운명의 순간, 하늘이 마련해 준 순간이 다가왔다.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를 받으며 맨 앞으로 누런 얼굴에 희고 긴 수염의 조그만 늙은이가 염치도 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누비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저것이 틀림없이 늙은 도둑 이토 히로부미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안중근은 곧바로 권총을 뽑아 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세 발을 쏘았다.
그러나 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의아심이 크게 일어났다.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쏘았다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뒤쪽을 향해 다시 총을 겨누었다. 걸어나오는 일본인들 중에서 가장 위엄이 있어 보이는 앞장선 자를 향해 세 발을 쏘았다. 그리고 만일 죄 없는 자를 쏘았다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우르르 달려온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세 발을 쏘았다. 이때 쏜 총탄은 세 발이었다. 안중근은 재판장의 심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러시아 병대의 대열 중간쯤의 지점으로 갔을 때, 이토 히로부미는 그 앞에 열을 지어 있던 영사단 앞에서 되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병대의 열 사이에서 안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고 맨 앞에서 행진하고 있는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향해 십보 남짓의 거리에서 그의 오른쪽 상박부를 노리고 세 발 정도를 발사했다. 그런데 그 뒤쪽에도 또 사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가 생각하고 그 쪽을 향해 세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 헌병에게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