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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김화전투 조선의 자존심을 구하다


  • ISBN-13
    978-89-6511-407-9 (03990)
  • 출판사 / 임프린트
    시간의물레 / 시간의물레
  • 정가
    18,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2-11-10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유준호
  • 번역
    -
  • 메인주제어
    역사, 고고학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유림 장군 #김화전투 #유림 #백전전투 #안주성 #토산전투 #광교산전투 #역사, 고고학 #인물, 문학, 문학연구
  • 도서유형
    종이책, 반양장/소프트커버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40 * 210 mm, 188 Page

책소개

이 책은 작은 병자호란사(丙子胡亂史)이자, 병자호란 중에 김화전투(金化戰鬪)에서 청나라 철기병에 대승을 거둔 한 장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병자년 12월 초에 청의 수도 성경을 출성한 청 태종 홍타이지는 철기를 앞세워 의주, 곽산, 정주를 지나 무인지경으로 휩쓸며 안주성에 이른다. 이때 안주성을 지키던 이가 평안병사(平安兵使) 유림(柳琳)이다.

한편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仁祖)는 근왕(勤王)을 하달하고, 외로운 임금을 풀고자 조선 8도의 근왕군은 산성으로 몰려들었으나 대소 10회의 전투에서 청의 철기 앞에 모조리 무너지고 괴멸되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청(靑)은 우리 스스로가 오랑캐라 부르던 무리들이다.

이런 오랑캐 앞에 우리 임금이 맨땅에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를 올리며 항복을 했으니 조선의 백성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치욕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느꼈다. 호란의 참화를 겪은 우리민족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홀로 안주성을 지키던 평안병사 유림 장군이 5천의 안주병을 이끌고 근왕의 길에 올라 김화에 이르러 조총과 화약무기로 청의 철기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김화전투에서 우리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시퍼런 자존심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목차

전설을 찾아 나서다
충장공휘림신도비명
생창리 사당에서 날벼락을 맞다
평안도관찰사홍명구신도비명
평안도병마절도사유공림대첩비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다
서북에 칼바람 불다
토붕와해
청군의 이동상황
남한산성 부근 근왕병 전투상황
양서지역 근왕군 전투상황
멀고 먼 근왕의 길
연려실기술 쌍령전투
청 태종실록 광교산전투
연려실기술 광교산전투
양서지역 근왕군 상황
토산(兎山)전투
전설의 김화전투
김화 백전전투 분석
김화백전전투의 재구성
팔도변방(八度辨謗) 김상헌의 평안감사 홍명구신도비명에 대한 평가
총변
병자호란, 김화고전장 조선의 성지가 되다
후기
참고문헌

본문인용

옛날 우리 인조(仁祖)대왕께서 왕위에 계실 때 호신(虎臣)에 통제사 유공(柳公)이 있었는데 50년이 되어가는 지금 묘도(墓道)에 문자가 없고 공(公)의 작은 아들 승선군(承宣君) 역시 이미 늙었다. 그는 속히 일을 이루려고 행장을 갖추어 내게 글을 부탁하였다. 내가 공경히 허락하고 5~6년이 지나는 동안에 재촉하는 서신이 6~7차에 이르도록 아직 보답하지 못한 것은 감히 늦추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다리는 바가 있어서였다.

대체로 병자(1636년), 정축(1637년)년간에 공이 서곤(西閫:평안도병마절도사)으로 명을 받고 동협(東峽:동쪽 골짜기)에서 공을 세웠는데, 세월이 이미 아득하여 전해 들은 것이 엇갈려 그 군사를 거느리는 방법과 승리를 결정하는 전략이 비록 자손과 막빈들의 기록한 바가 있으나 그 역시 간혹 몸소 겪고 직접 본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발로 공을 세웠던 땅을 밟고 얼굴로 지휘에 따랐던 사졸을 방문하여 반드시 믿을 수 있음을 증명할 생각이었으나, 그럴 길이 없었는데 마침 내가 나라의 영을 받고 연경(燕京:베이징)에 가게 되어 안주(安州)를 두 번이나 지나고 또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면서 길이 김화(金化)를 거치게 되므로 두 지방 사람의 구담(口談)과 필록(筆錄)을 갖추어 얻어 보았다. 또 몸소 싸움터에 올라 돌아보고 서성이며 당시의 일을 상상하니 마치 눈 속에 있는 듯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들은 대로 사실을 기록하여 앞 세상에 보이노니 비단 공의 상산(象山:무덤)의 개인적인 빗돌(비석)을 위함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에 빠진 글을 보충하는데 견줌이었다.

숭정(崇禎:명나라 16대 황제의 연호) 병자년에 서쪽 걱정이 매우 심하여 조정은 그를 부원수에 제수하고 절월(節鉞:왕이 내리는 생살권의 표지물)을 주기 전에 원수에게 소속됨이 병사(兵使)의 전권만 못하다 하고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옮겨 제수하였다.

전일에 평안병사를 두 번 맡았는데 이번까지 세 번째 인지라, 백성과 병사들은 이미 신임하고 공적도 연속됨이 있었다. 주성(州城:안주성)이 겨우 정묘호란(丁卯胡亂:1627년)을 겪고 난 후라 인심이 흉흉한데 공이 장수와 사졸을 독려하여 전쟁과 수비의 도구를 수선하고 성첩을 증설하고 해자(垓字:성 주위에 둘러 판 못)를 준설하여, 토장(土墻:흙으로 쌓은 담)을 쌓고 토장 안팎으로 품자(品字) 형태의 구덩이를 파서 서로 접속연결 되게 하여 사람과 말이 가까이 올 수 없게 하고, 새 성곽을 붙여 쌓아 강물을 끌어들여 샘이 마르는 것에 대비하며, 곡식을 쌓아 몇 년을 충분히 지탱하게 하고 날마다 사졸에게 연향을 베풀어 전쟁에 대비하였다.

경보가 전해지자 막하의 비장들이 가족들을 외부로 내보내자고 요청하였다. 이에 공(公)은 ‘당연히 군민의 부모 처자와 사생을 같이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청(淸)의 병사가 성 아래로 지나갔으나 기병(騎兵)이 작아서 나가 막을 수가 없었고 오직 엄밀하게 수비만 할 뿐이었다. 청주(淸主:청 황제)가 스스로 큰 낙타를 타고 지나면서 성 위를 바라보았으나, 한 조각의 깃발 한 사람의 소리도 없으니 대군이 성에 다다랐는데 이처럼 질서 있고 조용하니 성을 지키는 장수는 반드시 지략이 있을 것이니 공격할 수 없다 하고 성 밖에 풀을 쌓아 바람 따라 불을 놓고 연기 밖으로 지나갔다. 이는 아마도 뒤에서 추격함을 두려워해서 그랬을 것이다.
이때 서울 소식이 막혀 공은 날마다 성 위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왕을 도울 계획으로 영변부사 이준(李浚)에게 영(營)에 머물게 하고 다음과 같은 주의를 시켰다.
-- 『삼가이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서평

알려지지 않았던 병자호란 김화전투에 대해 알리고 있으며, 그 전투의 중심은 홍명구가 아닌 유림이었음을 밝혀 냄으로, 충장공(忠壯公) 유림(柳琳)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디딤돌이 될 것이라 본다.

저자소개

저자 : 유준호
유준호 선생은 197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대신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학원의 이사이다. 저서로는 『아무것도 구하지 마라』(2001, 시공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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