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쪽 관중분지는 황허강의 지류인 웨이수이(渭水)강이 남쪽의 친링(秦嶺)산맥, 동쪽과 북동쪽의 타이항(太行)산맥, 북쪽 산베이(陝北)의 산지를 침식해 형성된 침식분지다. 관중이라는 지명은 네 관문(關), 동쪽의 함곡관, 서쪽의 대산관(大散關), 남쪽의 무관, 북쪽의 소관(蕭關) 가운데(中)에 있다는 뜻이다. 즉, 관중은 험준한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이기 때문에 이 네 관문만 잘 지키면 외적의 침공을 매우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_「거록대전, 패왕의 탄생」 중에서
119쪽 팽성은 상업 도시로서는 적합했을지 몰라도 도읍으로서는 부족함이 적지 않았다. 탁 트인 평야지대의 상업 도시는 달리 말하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읍은 방어에 유리한 곳에 세워졌다. 도읍이 함락되면 나라를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막 분봉을 끝낸 초나라로서는 더더욱 방어에 유리한 곳에 도읍을 정해야 했다. 그러나 항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_「항우의 18제후 분봉」 중에서
176쪽 팽성 주변의 구릉지와 저산성산지는 함곡관처럼 항우와 서초군의 침공을 철통같이 방어하기에는 확연히 부족했지만, 항우의 기습을 받아 와해되며 패주하기 시작한 제후 연합군 군사들을 무사히 탈출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데는 충분했다. 차라리 험준한 산악지대였다면 죽기 살기로 산속으로 들어가 적을 따돌리고 몸을 숨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팽성 주변 애매한 규모의 구릉과 산은 효과적인 도주와 퇴각만 방해할 뿐이었다._「팽성대전, 56만 대군의 궤멸」 중에서
189쪽 대체 왜 유방은 동쪽이 뚫려 있어 방어에 유리하지도 않은 형양을 사수하려 했을까? 형양의 북쪽에는 오창(敖倉)이라는 진나라의 대규모 곡식 창고가 있었다. 진나라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에 대비해 대규모의 곡식 창고를 설치했다. 황허강 변의 광무산(廣武山) 기슭에 있는 오창은 황허강의 수로를 이용해 곡식을 운반하기 용이했던 데다 광무산이 도적이나 외적의 침임 및 황허강의 범람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곡식 창고가 입지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_「경색전투, 유방의 위기 탈출」 중에서
252쪽 하지만 면만수에서 배수진을 친 한신군이 조나라군의 예상과 달리 선전했다. 부하들을, 퇴로가 없다는 불안감을 이겨내고 기세가 오른 조나라군과 용감히 싸울 수 있게 만든 한신의 지휘 통솔 능력도 빛났지만, 사실 한신의 군사지리학적 안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한신이 배수진을 친 면만수 동안에는 해발 300~500미터의 구릉성 산지가 발달해 있었고, 한신군은 이러한 지형을 활용해 조나라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했다._「정형전투, 승리의 배수진」 중에서
340쪽 한신의 충성심은 어디까지나 제후로서의 충성심에 가까웠다. 그런데 당시 중국 땅에서 봉건제는 이미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은 항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던 불세출의 명장 한신이었음에도 이 같은 대전환을 명확하게 읽어내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러니 우리의 눈에, 유방에게 제왕 자리를 요구해 사실상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해 놓고 한편으로 무섭과 괴철의 종용에 흔들리지 않으며 주군인 유방에게 충성을 바친 한신이 이중적으로 보이는 것이다._「길어지는 초한의 대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