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평면표지(2D 앞표지)

사람과 삶을 담는 공간, 건축


  • ISBN-13
    979-11-91625-77-6 (03540)
  • 출판사 / 임프린트
    이다북스 / 이다북스
  • 정가
    14,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2-09-05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권혜주
  • 번역
    -
  • 메인주제어
    사회, 사회과학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건축 #사람 #삶 #권혜주 #사람이란무엇인가 #이다북스 #사회, 사회과학
  • 도서유형
    종이책, 반양장/소프트커버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23 * 188 mm, 168 Page

책소개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의 막막함이 기억난다. 결국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고 나서야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논점을 벗어난 질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었다. 이 질문으로 시작해도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건축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는 건축과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건축가는 삶이 건축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 나는 건축이 우리가 생존하는 이 부당한 세상에서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니마이어의 이 말은 건축의 목표가 건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이 표현은 낭만적인 레토릭으로 건축가의 시적 표현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이와 같은 표현이 단순한 시적 낭만성에서 표출된 것이 아닌, 인류의 투쟁 과정에서 얻은 결론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투쟁은 건축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뿐 아니라 건축으로 생존해야 하는 이들의 삶의 이야기다.
따라서 이 글은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은 주로 프랑스 파리의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 해결되지 못한 개인의 문제, 즉 주거 문제를 다루었다. 두 번째 장에서는, 개인의 주거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그 문제의식에 기꺼이 동참한 사람들의 꿈과 도전을 다루었다. 마지막 장에서는, 뒤늦게 근대화 과정을 시작한 우리나라의 도시와 건축이 처해 있는 현실을 돌아보고, 전 세계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우리 방식으로 풀어나갈지 고민했다. 
이 책은 멋있는 건축물이나 성공한 건축가의 디자인 철학을 소개하는 내용은 아니므로 건축을 교양으로 감상하려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거리가 먼 이야기일 수도 있음을 미리 알리고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건축이 사회의 전반적인 조건들을 다루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회적 다이어그램 역할을 하는 매체임을 인식하는 분들에게는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감히 말씀드린다.

목차

프롤로그

1장__도시 안의 사람
도시는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카유보트와 장 베로, 그리고 파리의 근대화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
오노레 도미에가 본 파리의 주거 문제

2장__사람 안의 건축
프랑스 소셜 하우징의 시작
사회적 약자와 최소 주거
오스카 니마이어가 꿈꾸는 세상
건축가의 집, 장 프루베

3장__건축 안의 우리
한국적 건축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우리가 프리츠커상을 받는 날
다시 건축의 미래를 생각한다

에필로그

본문인용

도시는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인 문호 괴테는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정의했다. 생각해보면 이 표현 속에서 건축은 곧바로 음악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즉 건축=음악이라는 등식이 직접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얼어붙은’, 즉 동결이다.
사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일정한 장소에서 정지된 사물을 바라보는 회화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야 느낄 수 있는 예술이다. 멜로디도 리듬도 시간의 흐름을 타고 완성된다. 그래서 음악은 현장성이 중요하며,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는 연주자와 연주를 들으며 현장에서 함께 시간을 공유하거나 녹음된 음악을 통해 임의로 지연된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다. 음악을 감상하면 시간의 흐름을 타고 바로 직전의 음률은 사라지지만, 그 여운과 함께 바로 이어지는 현재의 음률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이 갖는 리듬은 음악과 같지 않다. 건축물이 내는 각각의 음, 즉 하나하나의 건축물은 도시라는 악보 위에 단단하게 박혀 있는 음표와 같다. 따라서 한 도시를 구성하는 건축물의 집합은 그 하나하나의 음표들로 이루어진 동결된 음악이 된다. 그래서 건축을 살아 있는 음악으로 느끼려면 음악을 듣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음표들의 연속을 따라 거리 위를 끊임없이 지나가야 한다.
유럽의 거리를 걷기가 즐거운 것은 연속적인 보행로 옆으로 비슷한 높이와 입면을 가진,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각각의 차이를 지닌 그 입면들이 변주해내는 리듬을 읽기 때문이다. 건축적인 측면에서 좋은 도시란 사람들이 그 건축물의 리듬을 느끼기 위해 기꺼이 걷고 싶어지는 곳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걷고 싶은 거리 혹은 도시에 대한 고민은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고민 속에서는 항상 뉴욕 혹은 유럽 각지의 도시들이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되었다. 이 도시들에 대한 선망은 문화적 열패감을 동반한 것과 달리 다행히 우리나라의 변화와 적응 속도는 매우 빨라, 지난 20여 년간 이런 결핍을 메우기 위해 정책적인 대안들이 제안되고 실현되고 있다. 또한 대중의 취향이 고급화됨에 따라 이에 부응하는 노력으로 서울과 같은 도시의 상업지구 안에 다양한 개성으로 무장한 거리가 속속 생겨났다.
대표적인 사례는 폐철길을 중심으로 연속된 보행로를 조성한 ‘연트럴파크’다. 경의선이 지하화됨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폐철길이 있던 부지를 무상 임대받아 ‘경의선 숲길’을 조성했다. 마포구에서 용산구까지 6.3㎞에 달하는 공간 중 특히 가장 긴 연남동 구간은 경의선 숲길에서 가장 사랑받는 산책 코스이며,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빗대어 ‘연트럴파크’라고 불리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운행이 중단된 경춘선 철도 길을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로 단장한 ‘경춘선 숲길’의 ‘공트럴파크’가 있다.
길이 1.3㎞의 연트럴파크나 1.9㎞의 공트럴파크는 차도와 분리되어 보행자의 안전이 보장된 보행자로이며, 주행 중인 자동차를 마주칠 걱정 없이 산책과 조깅을 할 수 있고, ‘파크’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책로 주변으로 조경이 이루어진 환경 속에서 잠시 머무를 수 있는 휴식공간도 되어준다. 특히 이 산책로가 재미있는 것은 길 건너편에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인도가 따로 구획되어 있지 않은 이면도로가 대부분인 저층 주거지에서 이 산책로는 보행자를 위한 통로라는 기능적인 역할은 물론 도시경관과 자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산책로라는 심미적인 공간 역할 또한 함께한다. 어쩌면 이런 유형이 ‘한국적 거리’로 정착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닐까 싶다.
유럽의 거리와 문화를 좋은 사례로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우리의 공간으로 옮길 수 있다거나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물론 좋은 사례가 되는 도시를 분석 대상으로 보고 그 도시의 형성 원리를 추출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똑같이 적용한다고 해서 같은 결과를 얻을지 확신할 수 없으며, 과연 적용이 가능한 환경인지도 중요한 문제다.
사실 유럽에서도 걷고 싶은 거리는 근대화의 산물이며,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는 멋있는 거리는 파리의 고급스러운 입면을 가진 오스만 스타일 건물이 들어서 있는 대로변을 말한다. 이 대로변 건물의 저층부는 주로 상점과 카페 등이 들어가 있고, 사람들은 거리를 따라 다양한 상점을 구경하고, 카페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행인들을 도시 환경의 일부로 인식한다. 하지만 파리에서도 대로의 뒤편으로 갈수록 저층부의 상점은 사라지고 주거만 집중된 매우 단조로운 분위기를 띤다.
유럽식의 거리를 우리나라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도시의 조직, 건물과 필지, 그리고 가로의 관계가 형성하는 도시의 패턴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건축물의 형태가 다르며, 건물을 땅에 앉히는 방식이 다르고, 따라서 도시의 블록이 정해지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가로를 형성하는 파리의 방식이 유럽 전역에 옮겨지기는 쉬웠어도 우리나라에 이식하기에는 적합성이 많이 떨어지는 방식이 아닌가 싶다. 최근 1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테라스 카페들이 심심치 않게 생겼으나 아직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테라스 카페들이 즐비한 파리의 거리에서는 카페와 식당을 겸하는 브라스리가 일방통행로 옆 1m 정도 되는 인도까지 침범해 테이블을 놓은 것이 도시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인식된다.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작은 원형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테이블 밑에서 노는 반려견과 눈을 맞추고, 그들이 앉은 테이블 바로 옆으로 보행자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파리라는 도시가 부여하는 스케일 때문이고, 이 도시의 스케일에 이미 적응한 거주자들이 그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도시가 가지고 있는 ‘휴먼 스케일’은 중층의 건축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높은 밀도감으로 얻는다. 도시의 밀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자연히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거리도 상대적으로 좁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적 거리가 오랫동안 일상 속에 반영되고 정착되면 거주자들 역시 이 거리와 도시의 스케일을 선천적인 것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나라에서 카페의 테라스가 인도를 넘어온다면 불법이기도 하거니와 보행자들은 보행을 방해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어느 쪽이 맞거나 틀리다를 떠나 자연스럽게 체감되는 사회적 거리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누군가는 서울에서 체감되는 사람들 사이의 밀도가 파리의 그것보다 낮다는 것을 믿지 못할 수도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서 사람들 간의 부대낌을 경험하다 보면, 서울의 밀도가 파리보다 낮다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파리의 면적은 105.40㎢로 서울 면적의 6분의 1이고 제곱킬로미터당 인구수는 20,641명이다. 서울의 인구밀도가 제곱킬로미터당 15,780명인 것과 비교해볼 때 제곱킬로미터당 5천 명이 더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시밀도만으로 한 사회의 사회적 거리를 전부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마다 이런 밀도를 다루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유럽 도시의 거주자들 대부분은 서울에 사는 거주자들보다 더 밀접한 사회적 거리에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들의 인사 예절과 대중교통 수단에서의 좌석 배치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프랑스인들의 인사 예절을 보면, 비주라고 불리는 서로 볼을 맞대는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대화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시선을 오랫동안 교환한다. 그리고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나 트램, 특히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 노선인 2, 3, 6, 11호선 등을 타면, 서로 마주보며 앉는 좌석이 대부분이고 그 좌석 간의 폭도 매우 좁아, 눈이 마주치거나 무릎이 닿기라도 하면 즉시 사과와 함께 서로의 어색함을 상쇄하기 위해 미소를 교환하거나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이렇듯 동아시아 문화권의 우리나라와 사회적 거리를 다루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이 그들의 도시 환경 속에서도 나타난다. 유교문화권 안에서는 낯선 사람과 만날 때 적절한 물리적인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예의 바른 것으로 여겨진다. 대중교통 이용을 제외하면 서로 간의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지 않거나 다른 이들의 행동에 방해받는 상황에 태연해지지 못한다.
이렇게 볼 때 연트럴파크나 공트럴파크는 저층의 상가와 보행로가 공존하는 한국식 가로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가로는 보차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이면도로가 대부분인 저층 주거지에서 대안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공간은 안전한 보행로가 되고 도심 공원으로서 공공 휴게공간 역할을 해내면서 편안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줄 만큼의 공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공간을 발굴해서 기존 도시 조직에 결속시키는 시도가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서울 도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하천은 한국식 가로 개발에 매력적인 공간이 된다. 예를 들어 성북천의 경우 청계천보다 규모가 작아 좀 더 편안하게 인지되고 천변 위의 일방향 도로와 연계도 더 직접적이다.
이 방식은 연트럴파크의 사례와 공간적인 위계가 비슷하다. 길의 중심은 하천으로 소규모 자연이며, 연속해서 보행할 수 있는 보행로가 조성된다. 이 보행로는 도로 높이보다 낮게 위치해 공간적으로 분리되지만, 이런 공간상의 분리는 종종 인도를 침범한 음식점의 테이블이나 그 옆을 지나는 자동차들을 신경쓰고 싶지 않은 보행자들을 적절한 수준에서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도시와 자연, 도로와 자연이 과연 어울릴까 싶기도 하겠지만, 국토의 63%가 산지이며 대도시 서울도 도시 면적의 26%를 산림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연을 선호하고 애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운명이 환경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듯 도시 역시 이미 주어진 지리적인 조건과 그 환경을 이용하는 선택으로 운명이 결정된다. 서울이 지금과 같은 서울이 된 것은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따른 결과다. 유럽의 도시와 같은 명칭을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나라의 도시 공간은 다른 색깔과 모습으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도시와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려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어서 뒤따르는 세 개의 챕터에서 파리라는 도시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고찰하려 한다. 이를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서평

-

저자소개

저자 : 권혜주
현재 삼육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숭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국립 파리-벨빌 고등건축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파리-에스트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 분야는 가로와 주택의 관계를 읽을 수 있는 도시 형태와 근현대 주거의 역사로, 대학에서 학생들과 건축설계 및 근현대 건축사를 공부하며 연구를 진행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주방 근대화가 주거공간 근대화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빛나는 도시로서 위니테 다비타시옹의 공간 구성 방식에 대한 이해〉 〈연립주택의 배치 방식과 공지 유형에 따른 가로형 주택으로서의 잠재성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상단으로 이동
  • (54866)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중동로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