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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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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별나지 않다


  • ISBN-13
    979-11-91625-75-2 (03840)
  • 출판사 / 임프린트
    이다북스 / 이다북스
  • 정가
    15,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2-08-19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헨리 스티븐스 솔트
  • 번역
    서나연
  • 메인주제어
    인물, 문학, 문학연구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채식 #채식주의 #식습관 #태도 #인도주의 #인물, 문학, 문학연구
  • 도서유형
    종이책, 반양장/소프트커버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28 * 188 mm, 280 Page

책소개

채식주의의 논리를 명확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명한 저술가들이 이미 채식주의의 윤리적이고 과학적이며 경제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아직 논리적인 관점을 제시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은 없었다. 즉 채식주의 옹호론에 기반이 되는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논거들의 변증법적 식견을 제시하려는 노력은 아직 없었다.
나는 논리 자체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당분간은 채식주의에 관한 장황한 설전이 펼쳐진다고 해도 결국에는 참된 자연적 본능에 기초한 위대한 인도주의적인 원칙이 실현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렇지만 그 결과를 더 앞당기려면 대중 앞에 분명하고 오해할 여지없이 쟁점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나는 이 작업으로 채식은 무엇인지 보여주고, 그에 못지않게 본질적인, 채식주의가 아닌 것은 무엇인지 보여주려 한다.
계속된 다양한 노력 덕분에 채식주의에 대한 논의가 증가했고, 그 원칙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채식주의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에는 여전히 많은 오해가 있다. 채식주의를 아우르는 거대한 진보적 운동의 다른 국면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것은 수많은 맹목적이고 분노한 편견을 자극할 뿐이다. 
오래된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무시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가 없다. 따라서 흔히 상대가 품고 있는 의도와는 사뭇 다른 것을 상대에게 귀착시키고, 무의식적으로 실체가 없는 허수아비를 내세워 공격해 즐거움을 누리려 한다. 언제나 공감하지 못하고 대체로 유머가 없는 그들은 터무니없이 상대의 생각에서 핵심과 가장 먼 지점을 과장하며,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따라서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논거는 실제 쟁점에 대한 의구심은 물론 모든 의구심의 가능성까지 불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힘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적어도 일치하지 못하는 지점이라도 정확하게 들여다보자.
이 결과를 고려하면서 때때로 대화 형식을 활용하면 논쟁에서 찬성과 반대를 더 선명하게 대비시키기에 편리할 것이다. 이 대화들이 모두 허구적인 것은 아니다. 비현실적인 대화로 상대편의 반박 논거를 희화화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나는 실제로 주장되어 온 채식주의에 대한 반대 의견만 소개할 것이다. 사실상 음식 개혁에 관한 모든 대담에서 거듭하는 상투적인 반대들과 논쟁자가 직접 한 말을 함께 제시할 것이다. 
이들 중 일부가 어리석게 보인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나는 이 새롭고 낯선 개념과 싸우려는 사람들이 지적 안전장치도 갖추지 않은 채 오래되고 일반적인 오류만 맹목적으로 따르는 무모한 방식에 놀라곤 했다. 그런 오류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인간의 사고방식에 고유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육식을 하는 이들이 채식주의자들에게 내세우는 많은 반론 방식은 노예제도에서부터 남편과 함께 아내를 산 채로 순장하는 풍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잔인하고 부당한 관습의 옹호자들이 매번 고집하는 주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궤변들이 근거로 삼는 오해를 제거함으로써 그 궤변들의 비현실성을 보여주고 채식주의의 원칙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들을 억지로 끌어내어 우리 편으로 전향시키려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뿌리 깊은 신념으로 누가 육식을 하는지, 그들을 둘러싼 무지와 오해를 걷어내고, 비록 그들 편에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을 우리 편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이 역시 쟁점들을 오해할 여지없이 확실하게 정리하고 일관된 뜻을 세워야만 가능하다.
덧붙여 나는 이 책이 그들에게 채식주의자들이 흔히 묘사되는 것처럼 나약하고 모자란 감상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인류가 동물을 먹는 것을 포기했다면, 동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채식주의자는 이성보다 감성이 발달했다.”
얼마나 흥미롭고 애석한 일인가! 우리는 그에게 그의 이성이 그의 감성보다 낫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진실이 아니므로 그 칭찬을 돌려줄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모든 인도주의적인 제도와 마찬가지로 채식주의는 감성이나 이성 한쪽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 모두에 호소한다. 그리고 이런 심판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 주장들은 필연적으로 공허하고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감정의 시험 못지않게 논리의 시험에 도전한다. 식습관 문제, 아니 위대한 사회적 문제라도 느끼는 만큼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생각하는 만큼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올바른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유별난 것이 아니다.

목차

프롤로그

1장__왜 채식을 하는가
2장__채식주의의 존재 이유
3장__인류의 식습관
4장__구조적 증거
5장__자연의 법칙
6장__인도주의적 주장
7장__변명과 궤변
8장__일관성에 관한 문제
9장__누가 도살자인가
10장__미학적 주장
11장__인간성과 위생에 대하여
12장__소화
13장__기후 조건
14장__먹는 음식이 자신이다
15장__경제적인 주장
16장__그래도 여전히 남는 문제
17장__성서와 소고기
18장__그들의 친척
19장__모두를 위한 시작
20장__채식을 넘어 삶의 태도로

에필로그

본문인용

1장__왜 채식을 하는가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피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반드시 달걀·우유·치즈와 같은 동물성 식품까지 먹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 용어는 영국에서 채식주의자협회가 설립되었을 때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그전까지는 개혁된 식습관 체계를 나타내는 고유한 명칭이 없었고, 당시 문헌에 대한 언급에서 보이듯이 대개 ‘피타고라스식’ 혹은 ‘식물성 식이’로 알려져 있었다.
짐작하건대 그 운동이 조직된 선전 활동으로 이어지고 규모가 커졌을 때, 그리고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독창적이고 차별성 있는 명칭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채식주의자’라는 명칭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아닌지는 음식개혁가들 사이에서도 견해 차이가 있다. 더 나은 명칭이 마련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빼놓고, 부정적인 비평만 훨씬 더 강하게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반적으로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은 상당히 쓸 만하다. 단점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이들이 궤변을 늘어놓을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채식주의가 주제인 모든 논쟁에는 단어의 외피 너머에서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보지 못한 채 어구만 따지는 사람들과 논리를 난도질하고 소소한 반대를 제기하려는 이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말 많은 비평가: 왜 채식주의자입니까?
채식주의자: 그렇다면 왜 채식주의자가 아니죠?
말 많은 비평가: 당신이 인정한 대로 우유와 버터, 치즈, 달걀 모두 동물로부터 나온 질 좋은 음식입니다. 이것들을 섭취하면서 어떻게 채식주의와 일치한다는 겁니까?
채식주의자: 그것은 전적으로 채식주의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말 많은 비평가: 확실히 그 뜻은 너무 뻔합니다. 동물성 식품은 조금도 없이 식물만 먹는다는 뜻입니다.
채식주의자: 일반적으로 인정된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였던 적도 없지요. 그 문제는 채식주의자협회 초기에 자주 논의되곤 했는데, 언제나 달걀을 먹거나 우유를 마시는 것은 금지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고기와 육고기, 조류 등 동물성 고기를 자제하는 습관을 권유하는 것’이 채식주의가 공언한 목표입니다. 채식주의협회 회보에 공식적으로 언급되어 있지요.
말 많은 비평가: 하지만 채식주의자라는 단어에 내가 생각한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채식주의자: 그 말을 만든 사람들이 그 말의 뜻도 가장 잘 판단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말로 뜻한 바는 협회가 쓰는 용법으로 확실하게 입증되죠.
말 많은 비평가: 하지만 그들에게 그 단어 본래의 어원을 왜곡할 권리가 있습니까?
채식주의자: 어원학에 호소하겠다면, 완전히 다른 문제를 불러와야겠죠. 그리고 그 문제에서도 당신에게 반하는 권위와 마주할 겁니다. 위대한 라틴어 학자인 존 메이어 교수보다 이 문제에 더 권위 있는 발언을 할 사람은 없죠. 그런데 그는 그 단어를 어원학적으로 보면서, 채식주의자는 ‘채소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활기 있는’(vigorous)이라는 뜻의 라틴어 ‘vegetus’(베제투스)에서 유래하는데, 엄격하게 해석하면 ‘활기를 지향하는 사람’을 뜻해요. 채식주의자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이들이 이런 뜻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단어의 어원학적 의미가 역사적 의미만큼이나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말 많은 비평가: 그렇다면 채식주의자는 무엇을 뜻한다는 겁니까?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는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자제하고, 주로 식물에서 얻은 음식을 먹는 사람이에요.

이 대화는 헨리 톰슨이 “모호한 용어들, 얼버무리기, 즉 허위”라는 말로 채식주의자들을 비난한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부당한지 보여준다. 의사인 그는 《19세기》에 기고한 글에서 유제품이나 달걀과 같은 동물성 식품을 먹는 사람은 채식주의자로 부를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같은 지면에서 채식주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본래부터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고안했던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채식주의자들이 순수하게 채소만 먹는 식사에서는 충분한 영양을 얻을 수 없어서 그 명칭의 의미를 바꾸었다는 주장 역시 이와 유사하게 사실을 잘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한다.
다음은 헨리 톰슨의 오류를 보여주는 두 가지 예다. 《19세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우리는 모호한 언어 혹은 부정확한 표현을 쓰지 않을 때가 되었다.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생활 습관을 통해 사용할 권리를 얻은 명칭을, 우유와 달걀을 먹는 사람들이 가장하며 사용하려 한다.”
1847년에 세상에 나온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을 헨리 톰슨이 ‘수 세기’ 동안 쓰였다고 믿고 있는 것을 보라! 이름은 차치하더라도 채식의 실행 자체도 정확하지 않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에서 낭만파 시인 셸리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맥을 이어온 권위 있는 작가들을 통해서도 우유와 유제품의 사용은 처음부터 피타고라스식 혹은 채식과 양립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식을 하지 않는 몇몇 사람이 다른 동물성 식품도 모두 절제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모든 채식주의자들이 그렇게 더 엄격하게 절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13년 후에 헨리 톰슨의 주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같은 월간지에서 채식주의자라는 명칭이 오래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조용히 철회되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그 명칭이 새롭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코 오래전이 아닌 때에 채식주의자들은 원래 그 이름을 채택했던 이들과는 다르게 더는 식물성 식품에만 식사를 의존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비평가는 이번에도 완전히 틀렸다. 결코 오래전이 아닌 때에 그 이름을 채택했던 이들의 식습관과 지금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식습관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동물성 식품을 피하는 일부 채식주의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달걀과 우유를 먹는 것을 허용한다. 1850년에 열린 연례회의에서 연사들 중 한 명은 “채식주의자협회가 허용하는 음식의 범위에서 배제되는 것은 동물의 살과 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언명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다시 말하면, 채식주의자라는 명칭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채식주의의 역할이 아니다.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우리가 옹호하는 것은 그 명칭에 대한 우리의 권리다. 근거 없고 자기 모순적인 주장으로 뒤집히지 않고 파기할 수 없는 역사적 권리다.
그 명칭에 역사적인 진실성이 있다 해도 그것이 분명히 오해로 이어지는 한 바꾸는 것이 낫다고 할 수도 있다. 기꺼이 바꿀 의향도 있지만,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다른 어떤 만족스러운 명칭도 제안된 적이 없다. 둘째, 이제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는 언어에서 공인된 지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없애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 모른다. 어쨌든 대체어가 최소한의 성공 가능성을 가지려면 매우 간명하고, 대중적이고,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
헨리 톰슨이 제안한 ‘육식을 절제하는 사람’이나 ‘반육식자’를 예로 들어보자. 이런 용어는 채식주의가 단지 부정형에 불과하고, 채식주의자는 절제하는 것 그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반대 의견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육식을 절제하는 사람’을 채식주의자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하는 데 전혀 반대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를 대체하는 말로 쓰는 데는 반대한다. 이 말은 우리가 육식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육식을 하지 않는 것도 결국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하나의 특정한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우리가 삶을 보는 관점에서는 육식이 혐오스럽고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절제가 육식자의 특별한 관심을 끌고 즉각적인 논란거리가 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가진 신념의 총체와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인도적인 사회에서는 육식과 같은 관습에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육식이라는 바로 그 개념을 견딜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식습관과 우리의 차이만 드러내는 부정적인 용어로 꼬리표를 붙이는 것에 반대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고유한 것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용어를 선호한다. 그리고 더 적당한 명칭을 찾아낼 때까지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왜 채식주의자인가?’라는 논쟁 전체는 사실상 솔직하지 못하다. 채식주의자와 육식자 사이의 실질적인 쟁점은 언제나 그것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완벽히 분명했고, 말 많은 비평가들이 그 쟁점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이름에 묶어두려는 시도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실질적인 주요 쟁점과 채식주의자 혹은 육식 절제 식습관, 그리고 순수한 채식의 추가적인 구분은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다.



2장__채식주의의 존재 이유


현재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은 지배적이지만, 어떻게 불리든 개혁된 식습관을 가리키는 명칭에 불과한 그 이름 뒤에는 훨씬 더 중요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채식주의의 진정한 취지,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동물성 식품은 인간이 먹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식의 직관적인 추정은 확실히 답이 아니다. 그 운동이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동물성 식품을 사용하지 않도록 이끌 가능성은 상당히 크지만, 채식주의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고정불변의 공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본능적인 마음으로 제안되었지만, 이성과 경험을 통해 확정된 생각, 육식의 관습과 뗄 수 없는 어떤 중대한 악이 있다는 확신에 기초한다.
육식에 대한 혐오는 화학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적이고 위생에 관련된다. 우리가 더욱 역겨운 형태의 식습관을 행하는 동안 동물에게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불필요하게 가해지고, 인류의 건강과 도덕에는 가장 해롭게 돌아온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육식의 점진적인 중단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운동이 성공적으로 시작된 이상, 그 운동을 일컫는 명칭은 단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명칭과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쟁점에서도, 우리는 동정적인 미소를 띤 오만한 사람, 우리 가엾은 금욕주의자들이 왜 이유 없이 스스로 괴롭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갈등을 빚는다.

오만한 사람: 하지만 왜 구운 소고기 한 점도 거절해야 합니까? 소를 굽는 것과 달걀을 삶는 것이 뭐가 다릅니까? 삶은 달걀은 배아 상태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채식주의자: 하등 유기체와 고등 유기체를 구분하지 않나요?
오만한 사람: 전혀요. 사실상 둘 다 화학적으로 똑같으니까요.
채식주의자: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는 화학이 아니라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도덕적인 견지에서 달걀은 분명히 소와 똑같지 않습니다.
오만한 사람: 음식 섭취의 도덕적인 측면이 어떻게, 아니면 어떤 점에서 영양학에 개입하는 겁니까?
채식주의자: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는 식인 풍습의 문제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육식동물인 동시에 과일을 먹는 동물이고, 인육은 인간의 음식으로 적합하지 않다. 인간이 왜 일반적으로 인육을 먹기를 피할 뿐 아니라 식인 풍습에 빠진 이례적인 개인이나 집단을 끔찍하게 바라보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런 일반적인 태도에는 정서적이고 종교적인 동기가 모두 원인이 된 것이 명백하다.”
오만한 사람: 물론이죠. 왜 그런 걸 읽어주는 겁니까?
채식주의자: 당신이 “음식 섭취의 도덕적인 측면”이라고 부른 것이 우리 식습관에 틀림없이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겁니다. 인육을 먹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역겨워지죠. 하지만 인육은 동물의 고기와 화학적으로 똑같아요. 달걀을 삶는 것이 소를 굽는 것과 똑같다면, 소를 도축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과 똑같죠. 모든 생명의 가치가 동등한 것은 아니지만, 고등한 생명일수록 그 생명을 파괴하는 자들에게 부과되는 책임도 더 크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당신은 논리적으로 이런 입장을 갖게 됩니다.

혹은 오만한 사람은 도덕이 영양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하는 대신 도덕주의자처럼 매우 금욕적인 입장에서 동물성 식품은 여전히 이용하면서 단지 육식만 절제하는 시시한 타협을 경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경우나 결과는 같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장은 때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제기된다.

오만한 사람: 옳고 그름에 관해서라면, 나는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을 바에는 아예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육식을 피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동물성 식품을 먹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채식주의자: 하지만 최악의 학대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분명히 합리적입니다. 전부가 아니면 소용없다는 방침을 고집하면 어떤 개혁에도 실패할 겁니다. 전체가 한꺼번에 개선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고, 언제나 조금씩 나누어 개선되니까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빵 반쪽이라도 있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반동주의자일 뿐입니다.
오만한 사람: 하지만 이 경우에는 충분히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우유나 달걀 없이 오직 식물성 식품만 먹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들의 행동은 적어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채식주의자: 맞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동료들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 운동의 미래 단계를 지금부터 예상하는 선구자죠.
오만한 사람: 그럼 이 극단적인 채식주의가 더 이상적인 식습관이라고 인정하는 겁니까?
채식주의자: 그렇습니다. 하겠다고 약속한 일보다 더 많이 하는 것은 귀중한 가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약속한 일을 완수하는 사람들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톨스토이의 표현대로 ‘첫걸음’은 도축장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에서 자신의 모든 공모 관계를 깨끗하게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만한 사람: 거듭 말하지만, 어떤 형태든 금욕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면 어설프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채식주의자: 물론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항상 그렇게 생각하죠.

금욕주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원칙과 연관 짓는 이상한 생각이다. 채식주의에 관해 이보다 더 잘못된 견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오해는 채식주의 운동의 의미에 근본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육식을 하는 친구들에게 예의 바르면서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언어로 그들의 식습관이 우리에게는 혐오스럽다는 사실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절제는 금욕과는 거리가 멀며, 결코 퇴색하지 않는 기쁨과 더 밀접하다는 점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지독한 냄새가 나는 돼지우리를 훑어보는 농부는 돼지와 똑같은 여물통에서 음식을 먹을 마음이 없으므로 금욕적인가? 그런데 왜 정확히 똑같은 이유에서 돼지 자체를 먹기를 거절하는 것을 금욕주의로 간주해야 하는가? 아니다. 반대자들이 채식주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형성하고 싶다면, 채식주의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심미주의에, 고행이 아니라 한층 높은 차원의 즐거움에 기초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마음속에 품은 대의는 결실 없는 학문적 공식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육식, 특히 정육점의 고기는 해롭고 야만적이라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확신의 결과라고 결론짓는다. 지금은 이런 믿음을 자세하게 알아볼 필요는 없다. 그런 믿음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채식주의에서 오직 변덕스러운 ‘일시적 유행’만 보는 이들은 그것의 진정한 취지와 의미를 파악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채식주의의 존재 이유는 육식이 잔인하고 역겨우며 건전하지 않고 소모적인 관습이며, 인도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일관성이 없다’라거나 ‘전부 아니면 소용없다’라는 흔하디흔한 위선적인 말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속도로 식습관을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을 널리 퍼뜨리는 데 있다.
“굳이 그렇게 유별날 필요 있나요?”라는 말에 우리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그것은 유별난 것이 아니라 진실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유별나지 않습니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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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헨리 스티븐스 솔트
영국의 작가이자 사회개혁운동가. 채식주의자로서 동물의 권리에도 큰 관심을 보여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서 동물권을 가장 먼저 주창했으며, 동물에 대한 그의 철학은 마하트마 간디의 채식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851년 인도에서 영국 육군 대령의 아들로 태어나, 다음해에 부모가 이혼하자 어머니를 따라 영국으로 돌아왔다. 열다섯 살 때 영국왕실장학기금 수혜자로 이튼칼리지에 입학했으며,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이튼칼리지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사회적 윤리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아 33세 때인 1884년 런던 남부 틸포드의 허름한 농가주택으로 옮겨갔다. 이후 이곳에서 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전기를 비롯해 40권의 저서를 집필했고, 직접 채소를 키우며 미니멀리즘 운동에 나섰다.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1891년 인도주의연맹을 공동 설립하고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한편 동물 학대 등 비인도적인 관행을 규탄하고 인도주의적 개혁을 촉구했다. 굳건하면서도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실천하던 중 1939년 87세에 세상을 떠났다.
번역 : 서나연
숙명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비교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우리가 동물권을 말하는 이유》 《이사도라 덩컨의 영혼의 몸짓》 《아내들》 《예술가로 살아남기》 《보이는 기호학》 《디즈니 미키마우스 90주년 기념 아트북》 《미신 이야기: 믿긴 싫지만 너무 궁금한》 《젊은 리더들을 위한 철학 수업》 《책 쓰기의 기술》 등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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