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똘히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문득 다리 부근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털뭉치 같은 것이 내 다리에 기대 몸을 비비고 있었다. 그것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펄쩍 뛰어올랐다. _15쪽
갑자기 녀석이 입을 쩍 벌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입에서 무언가를 토해 냈다. 젖은 털 뭉치였다. 로봇이 토하다니, 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득 언젠가 읽은 책에서 고양이가 털을 고르다 삼킨 것을 뭉치로 토하기도 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걸 헤어볼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왜 로봇이 헤어볼을 토하는 거지? 그러자 머릿속에서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가 스쳤다. _27쪽
문득 녀석의 이름이 은실이인 것이 은빛 실 같아서 주인이 지어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는 내가 저를 팔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만 애교를 부렸다. 내 다리 위에 올라와 꾹꾹이를 하고, 발라당 누워 배를 보이고 꼬리로 바닥을 툭툭 쳤다. 나를 그만큼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었다. _48쪽
그런데 잠시 후, 분명 지하실에 있던 아빠가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내 뒤에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지만, 아빠는 ‘비밀’이라며 빙그레 웃기만 했다. ‘혹시 지하실에 바깥으로 연결되는 비밀의 문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벌떡 일어나 벽을 살펴보았다. 역시 색깔이 다른 부분은 문이었다. _97쪽
긴장감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구소 입구로 다가갔다. 우리는 이미 긴 줄을 선 아이들 틈에 슬쩍 끼어들었다. 레드홍 아저씨의 생체 인식칩이 잘 작동했는지 무사히 정문 보안 시스템을 통과할 수 있었다. _125쪽
갑자기 마구 흔들리던 기계가 진동을 멈췄다. 그러더니 꼭 진공 상태처럼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뒤로 날아갔다. 문에 달린 작은 창을 통해 빛이 뒤로 휙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마침내 눈앞에서 하얀 섬광이 번쩍하고는 폭발했다. 귀가 멍했다. 삐- 하는 이명이 사라지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사방은 고요했다. 기계는 사라지고 나와 은실이만 덩그러니 있었다. _145쪽
메일을 다 쓴 엄마가 전송 버튼을 클릭하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웜홀이 열리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왜 벌써? 의아해하는데, 웜홀에서 갑자기 손이 쑥 튀어나왔다. 곧이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한 소장의 몸이 완전히 빠져나왔다. _219쪽
엄마의 말에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풍차 마을이 없으면 호세도 없는 거야? 호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환하게 웃으며 뛰어가던 호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사라진 듯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_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