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는 도덕적 가치와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이기에 늘 정쟁과 권력투쟁의 수단이 되어왔다. 자신의 정적을 부패한 인물로 비난하는 것만큼 날카롭고 치명적인 무기는 없다. 사실여부를 떠나 부패한 인물로 비난받는 순간 그의 사회적 명성은 추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p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들이 중요한 집회와 의회 그리고 재판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독립적인 자유의지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고대 아테네에서 부패한 사람이란 독립적인 자유의지와 판단력을 상실한 자로서 당시로서는 시민에 속하지 않았던 노예나 국외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24p
‘부패는 암’이라는 서양의 은유는 부패는 외부가 아닌 내부, 상층이 아닌 하층, 집단이 아닌 개인, 그리고 과도한 욕망에 의해 생겨나는 문제점이라는 사고를 내포한다. 이런 사고는 부패를 ‘썩은 사과, 신체의 곪은 부위’로 묘사하는 데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데, 많은 사과 가운데서 썩은 사과를 골라내고 환부를 도려내면 부패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46p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리를 강조하는 근대적 부패의 정의는 제국주의 어법과 많이 닮아 있다. 제국주의의 본국은 대부분 공적이고 도덕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청렴한 이미지로, 식민지들은 대부분 사적이고 타락했고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부패한 이미지로 묘사되곤 했다. -56p
부패는 매우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18세기 영국에서 부패는 때때로 히드라에 비유되었다. 계속해서 목을 쳐도 다시 새로운 목이 자라나는 고대 그리스신화의 괴물처럼 부패는 아무리 처벌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 에드워드 스노든은 반부패를 위한 노력 역시 히드라와 같다고 말했다. 즉, 진실을 말하는 한 명의 내부고발자를 처벌한다 해도 진실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도처에서 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1p
인간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부패를 저질러왔는지를 개탄하는 사람들에게 우루카기나의 점토판은 인간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부패에 맞서왔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러니 부패와 관련한 인류문명의 첫 기록은 부패를 저지른 것에 대한 기록이 아닌 부패와 맞서 싸운 것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67p
솔론의 개혁에서 제도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사법개혁이다. 솔론은 최하층 계급인 테테스가 참여할 수 있는 시민법정 헬리아이아(Heliaia)를 창설했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에서 이 시민법정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으나 나중에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적었다. -95p
절대권력의 대리자였던 옴부즈맨이 후대에 이르러 권력의 감시자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옴부즈맨 제도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큰 변화를 겪었다. 왕권의 시대에는 왕권 견제를, 인권 탄압의 역사적 비극을 겪었던 나라에서는 인권 보호를, 부패의 폐해를 경험했던 나라에서는 부패 감시를 그 고유기능에 추가했다. -151p
자본주의가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회계는 체계화된 모습을 띠고 발전하기 시작한다. 1340년 제노아공화국은 중앙관청에 대규모 기록처를 설치하고 복식부기로 국가재정을 기록했다. 복식부기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이탈리아 수학자이자 수도사였던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다. -159p
프라이머리 제도는 라폴레트로 인해 역사적으로 매우 적합한 시기에 미국 정치에 등장했다. 정당이 정치권력의 핵심 조직으로 등장했던 시대, 그리고 거대기업이 본격적으로 경제를 좌우하며 정당과 결탁하던 시대에 프라이머리 제도는 정치를 투명하게 만들고 정당 내부의 부패를 견제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했다. -210p
로크가 밀턴의 사상에서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면, 밀은 사상을 가진 각 개인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궁극적으로 인류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며 ‘경쟁의 자유’를 강조했다. 아테네의 아고라가 말하는 장소이면서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였던 것처럼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 역시 표현의 자유를 시장경제의 자유와 연결시켰다. -222p
알권리에 대한 쉬데니우스의 가장 큰 기여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검열 폐지와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즉, 다른 모든 의견을 검열할 수 있는 특권적 지위를 가진 국가의 눈이란 없으며 그 특권적 지위와 의견에 따라 정부기록에 대한 접근과 열람, 출판을 가로막는 것은 진리 추구를 가로막는 것과 다름없다는 강고한 생각이 언론 자유의 역사를 크게 진보시켰다. -257p
미국의 저명한 환경운동가 랠프 네이더(Ralph Nader)는 내부고발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내부고발이란 공익이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이익보다 우선한다고 믿고 그 조직이 관여하고 있는 부패, 불법, 사기 또는 유해한 활동에 대해 호루라기를 부는 행위이다.” -272p
국제투명성기구는 부패가 “이미 산업화된 나라에게도 엄중한 문제이긴 하지만 개발도상국과 전환기에 있는 대부분 국가들에게는 위기의 문제”라고 강조함으로써 비서구국가들의 부패 극복을 더 강조하고 있다. 서구 전문가들의 의견에 기초한 부패인식지수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손가락질’과 ‘창피주기’의 전형적 수법인 순위 매기기로 하위권에 위치한 비서구국가들의 부패를 부각시킨다. -329p
근대 최악의 대역병이라 불리는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한 숫자는 약 5000만 명으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망자의 3배에 달했다. 당시 보건당국의 감염 경고를 무시한 채 대규모 시내 퍼레이드를 개최한 필라델피아의 사망률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했던 세인트루이스의 8배에 이르기도 했다. -355p
투명성과 사회적 거리, 연대는 코로나19 이전에는 함께하기 힘든 개념들이었다. … 그러나 코로나19 시대 혹은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의 뉴노멀(new normal)은 이 공존할 수 없던 것들의 공존으로 이루어진다. 세월호와 메르스, 촛불혁명을 거치며 한국사회에 구축된 공공성, 책임, 참여, 신뢰가 이 공존할 수 없던 것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우리가 ‘새로운 정상’을 살아가는 데 기초가 되어주고 있다. -362p
한 사회의 성숙도는 위기 속에서 빛난다. 금세기 들어 한 국가의 기능을 정지시킨 정치재난과 사회를 공포에 빠뜨린 자연재난이라는 이중재난을 시민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사회는 한국을 빼곤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 책의 마지막을 한국 시민으로 장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36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