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장본으로 새롭게 돌아온 진주 귀고리 소녀
신비롭고 매력적인 초상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었던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새옷을 입고 개정판으로 돌아온다. 피터 웨버의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원작이기도 한 이 책은 2003년 처음 발간된 이래 많은 이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베스트셀러다.
『진주 귀고리 소녀』에는 원서에 없는 23점의 원색 도판이 실려 있다. 모두 35점으로 알려져 있는 베르메르의 그림 중 소설의 내용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되는 작품 22점을 가려서 실었다.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설에서 중요한 장소로 언급되는 곳들을 표시한 지도도 첨가되어 있다. 열여섯 살의 소녀 그리트와 화가 베르메르가 빚어내는 내밀한 이야기, 『진주 귀고리 소녀』가 네덜란드 델프트의 그 생생한 거리로 독자들을 또 한 번 불러낸다.
‘북구의 모나리자’ 매혹하는, 동시에 매혹된 듯한 시선
17세기, ‘황금 시대’를 구가하던 네덜란드에서 예술은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그 중심에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있다. 베르메르는 오랫동안 후세 사람들에게 베일에 싸인 화가로 남아 있었다. 200여 년 간 거의 잊혀졌고, 그의 작품을 둘러싸고는 진위 여부에 관한 논쟁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베르메르의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신비롭고 매력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북구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는 '진주 귀고리 소녀'다. 살짝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돌려 우리를 응시하는 소녀의 초상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미적 모호성의 한 극치를 보여준다. 빛나는 두 눈은 순수한 듯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하다. 벌어진 입은 놀란 듯도 하고 무슨 말을 건네려는 듯도 하다. 머리에 두른 천은 이국적이고 갈색 옷은 커다란 진주 귀고리와 어울리지 않게 수수하다. 도대체 이 소녀는 누구인가? 어떻게 그림의 모델이 되었는가? 소녀는 우리를 응시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커다란 두 눈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소녀의 귀에는 진주 귀고리가 달려 있는가?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이 신비로운 소녀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놀라운 소설적 상상력을 선보인다. 작가는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의 일상에 대한 치밀한 복원과 정확한 미술사적 지식, 그리고 화가 베르메르의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폭의 그림을 정점으로 촘촘하고도 다층적인 드라마를 빚어나간다. 이는 마치 밑바탕이 칠해지고 그 위에 여러 색이 거듭 덧칠된 뒤 마침내 점과 선과 면, 그리고 색과 빛이 하나로 어우러져 한 점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을 보는 듯한 생동감과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화자 그리트의 시선을 통해 묘사하는 델프트의 풍경은 마치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 집 안과 시장과 길거리 풍경들. 광장의 부산스러움과 소란스러움이, 푸줏간 시장의 피 냄새가, 가축 시장의 노린내가, 부엌에서 나는 고기 굽는 냄새와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이러한 정밀한 묘사를 통해 작가는 물감의 제작, 빛과 카메라 옵스큐라의 활용, 인물과 배경의 배치 등 한 편의 그림이 탄생하기까지 필요한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양피지에 봉해져 작은 질그릇 단지 안에 들어 있는 상아, 매더(madder), 청금석, 단사(丹砂), 매시콧(massicot), 레드틴 옐로(lead-tin yellow), 골탄, 백연(白鉛) 등의 재료들과 돼지 오줌보 안에 소량씩 보관되어 있는 구하기 쉽지 않은 물감들”로 나열되는 재료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낯설고, 곱게 간 입자에 아마인유를 섞어 만든다는 물감의 제작 과정도 흥미로운 풍경이다. 그리트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처음으로 들여다보곤 “악마의 장난질”이라며 겁을 먹는 장면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 상자가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지, 그의 말에 대해 계속 되새겨봤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와 같은 대목은 “사람들은 구름이 하얗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구름 속에서 순전한 흰색을 찾기란 힘들”고 “벽은 흰색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새로운 발견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다른 눈으로 사물을 응시하는 화가의 시선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에서 풍경을 바라보게 하는 즐거움과 발견의 순간을 제공한다.
색채가 뿜어내는 눈부신 빛의 세계에 사로잡힌 한 소녀의 내밀한 초상
열여섯 살 난 타일 도장공의 딸 그리트는 폭발 사고로 아버지가 두 눈과 직업을 한꺼번에 잃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화가 베르메르 집의 하녀로 들어간다. 그리트가 할 일은 물건을 들어내고 청소를 하되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완벽하게 제자리로 돌려놓으면서 화실을 청소하는 것이다. 능숙하게 하녀의 업무를 해내는 그리트에게는 한편 그림에 대한 재능과 빛의 세계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숨겨져 있다. 이를 발견한 베르메르는 서서히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시작하고, 그들은 위태롭고 어려운 관계를 향해 나아간다. 마침내 그리트의 귀에 진주 귀고리가 걸리고 베르메르가 그녀의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 『진주 귀고리 소녀』는 찬연한 빛을 뿌리며 빛난다.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 인터뷰’에서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베르메르의 작품 속 인물들은 비밀스런 세계에 거주하는 듯 보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잘 파악할 수 없는 무수한 일들이 흐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말한다. 이 말대로 작가는 '진주 귀고리 소녀'의 그림자 진 듯 어두운 배경에서 두 인물의 운명을 감지해내고, 그들이 만나는 순간을 밀도 있게 포착해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하녀의 삶, 여성의 일상, 반 라위번으로 대표되는 신흥 부르주아 계층과 예술(가)의 윤리, 반종교개혁기 구교와 신교의 대립 등의 서사가 층층이 쌓여 있다. 소설의 배경인 1664~1666년과 10년 뒤인 1676년, 총 4년이라는 짧은 시기 속에 베르메르의 전 생애와 작품 세계, 나아가 17세기 델프트와 예술의 전모가 집약되어 있는 듯하다. 작가 슈발리에는 이렇게 말한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방 안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죠. 이는 또한 이 소설이 구현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해요. 소설은 의도적으로 좁혀지고 한 곳에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리고 그 안에 세계 전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독창적이고 명민한 솜씨”는 화가 베르메르의 독창성이자 명민함이기도 하다. 색채가 뿜어내는 눈부신 빛의 세계에 사로잡히지만 화가의 차가운 시선에 부딪쳐 끝내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오고 마는 한 소녀의 내밀한 초상은, 베르메르의 그림만큼이나 좀체 시선을 떼기 어려운 매력과 감동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