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5일은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의미 있는 날이다. 70년 전 그날을 회상하면서 다시 한 번 애국심에 불을 댕겨보는 것도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 필요할 것 같다. 특히 요즈음 한국전쟁 4대 영웅 지칭에 일부 혼선이 오는 것도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의도에서 오류를 정리하고 새롭게 되새겨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글씨 한 자 한 자 정성껏 다듬었다.
김홍일 장군은 흔히 오성장군으로 불리운다. 그 연원은 항일전 당시 중국군의 2성과 한국군의 3성을 합한 별의 수에도 있지만 김홍일의 오성장군은 별의 숫자 개념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김홍일은 일본의 압제에, 반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단신 대륙으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
비록 중국군에 몸을 두고 있었지만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을 밀착 지원했다. 가령 1932년 1월 8일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왕 히로히토에 수류탄을 던져 세상을 놀라게 한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과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도시락폭탄을 던져 침략의 원흉들을 처단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폭탄도 바로 김홍일 장군이 제공했다.
해방을 맞은 조국에 귀국한 김홍일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한국군 사상 단 한 사람 장군으로 임관, 육군준장의 계급장을 달았다. 태릉 화랑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 4년제 정규 육사로 발전시키는가 하면 6·25전쟁이 발발하자 글자 그대로 구국의 위업을 달성하여 조국의 명운을 이어가게 한 청사에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
38선에 연해 4개 국군의 사단이 북한군 대공세에 직면 괴멸 상태에 이를 때 한강선방어를 주장하며 시흥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그 소임을 다해 북한군의 남침전략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나는 당시 정규 육사 생도 신분으로 김홍일 장군 휘하에서 한강방어작전에 참가했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을 회고하면서 한국전쟁의 3대 기적을 인천상륙작전, 워커 장군의 낙동강 방어작전, 김홍일의 한강방어작전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한강방어작전에 대해서는 미국의 군사개입을 가능케 한 직접 계기로 강조하고 있다.
1983년 10월 육군본부는 한국전쟁 4대 영웅으로 한국군 측 한강선방어작전의 김홍일 장군, 춘천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일시 저지, 북한군의 남침전략에 타격을 가한 6사단장 김종오 장군, 미군 측의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 장군, 낙동강 방어작전의 워커 장군으로 정하고 첫 작업으로 한국군 측 두 장군의 전기소설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널리 읽혀 홍보하도록 조치했다.
다음해 10월 1일 국군의 날을 기해 KBS 1 TV 저녁 골든타임에 五星將軍김홍일이 3부작으로 3일간에 걸쳐 방영됐고 KBS라디오에서는 1년 동안 내 작품이 낭송됐다.
나는 당시 전역 후 전업작가로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었는 데 나에게 김홍일 장군의 전기 창작을 의뢰해 그때 쓴 작품이 ‘五星將軍김홍일’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격동기여서 책 내용에 민감한 부분을 보류해달라는 제의를 받고 나는 수용해 상당 분량을 보류한 개작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번에 다시 펴내게 된 이 책은 당시 보류했던 민감한 부분을 보충하는 한편, 이형근 장군, 이한림 장군 등 6.25 당시 직접 책 내용과 관계있는 당사자의 자서전 감수를 하면서 이 책의 정확성을 강화했다.
특히 김홍일 장군 임종 전에 효창동 자택에서 직접 넘겨 받은 장군의 육필기록을 첨가했다.
나는 전역 후 40년 간 전업작가로 또는 군사평론가로 작업을 계속하는 동안 김홍일 장군에 비견될만한 구국의 별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감히 김홍일을 5성장군으로 호칭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의 프롤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