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이념의 전파 도구이자
유행과 문화, 사회 문제를 거울처럼 비추며
안방으로 들어온 일상의 역사, 중국 드라마
중국의 미디어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전파 도구로 작용해 왔다. 특히 TV드라마는 당과 관방이라는 중앙 정책의 목소리를 개인의 안방까지 충실하게 전달하며 사회 질서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 따라서 드라마는 늘 당국의 관리 대상이고, 제작 환경 또한 사회주의 계획경제처럼 통제되고 규격화되어 있다. 드라마 제작 계획은 매년 발표되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 부합해야 하며, 제작자도 사상적 문제가 없는 검증된 자여야 한다. 사상적, 이데올로기적 ‘안전’을 기하기 위해 기획 단계부터 회차별 줄거리 등 검열을 거쳐야 하고,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방영이 가능하다. 즉, 중국 드라마는 기획부터 방영까지의 모든 과정에 중국 체제와 그 운용 방식이 적용돼 있다. 이 책은 이를 잘 보여주는 제편인(드라마 제작자) 제도, 검열 제도, 수상 제도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중국 TV드라마는 예술성이나 심미적 가치로 볼 때 주목받는 문화는 아니다. 그러나 유사한 장르와 패턴이 반복적으로 대량 양산되고 일정한 붐을 이루는 전형성은 당대 중국 사회의 시사와 이슈를 즉각 반영하기에, 중국의 다양한 면모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 시청과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드라마는 일상생활의 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사회를 거울처럼 투영하는 미시사인 동시에 언어, 유행, 성별, 노동, 계급, 관습의 측면에도 영향을 발휘하는 미디어다. 또한, TV드라마는 물론 중국 문화산업 전체가 자본 유입으로 전례 없는 발전을 구가하고 있다는 점도 문화 연구의 중요성을 더한다.
‘주선율 드라마’가 재미있어졌다?
드라마 제작의 시장화, 장르의 다양성을 추구하며
오락성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타협하다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면서 기존의 드라마 제작 방식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났다. 영상 콘텐츠 제작과 생산에 자본의 영향력이 미치면서 자본 투자가 제작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했고, 이를 위해 시청률로 나타나는 드라마의 상품 가치를 고려하게 된 것이다. 시청자의 욕망이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라 콘텐츠에 투사되면서, 중국 드라마는 관방의 제도와 관리 체계, 시장과 자본에 의한 실질적 운용, 시청 수요라는 세 축이 서로를 지탱하는 독특한 미디어 지형으로 발전했다. 사회주의 이상 고취라는 이데올로기 전파와 교육 기능으로 제작된 중국 특유의 장르 ‘주선율 드라마’ 또한 달라지고 있다. 주선율 드라마는 본래 관방이데올로기 선전용 드라마로서 중국 역사를 미화하는 틀에 박힌 내용 때문에 시청자의 외면을 받았으나, 2000년대 이후엔 정부 주도의 제작에서 벗어나 과감한 시장화를 도입하며 다양화를 꾀했다.
혁명 역사를 다룬 정극에서 첩보극 등으로 세속화, 장르 다변화가 나타난 2000년대 이후의 주선율 드라마는 점차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고, <위장자>(2015), <인민의 이름으로>(2017) 등의 히트작을 배출한다. 저자는 여러 주선율 드라마의 줄거리를 소개하며, 결과적으로 주선율 드라마가 재현하는 ‘위대한 공산당’이라는 상징적 허구의 이미지는 이상적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라는 ‘바람직한’ 가치 체계의 본질로서 현실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속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드러낸다고 본다. 사극과 무협이 어우러진 드라마 <랑야방>(2015)을 통해 오락성과 이데올로기가 대립하고 타협하는 최근의 경향을 소개하기도 했다. 저자는 나약한 ‘강호인’인 <랑야방>의 주인공이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무력한 당대 중국인의 현실, 그리고 주요 시청자인 80후, 90후 세대의 현실 인식과 정치 참여 열망을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현대 중국인의 생활방식과 이들의 삶을 구성하는 도시라는 물질적 감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보기 위해 상하이 배경의 드라마 세 편을 집중 탐구한 점도 눈에 띈다. 상하이는 수도 베이징과 더불어 중국 대도시를 표상하는 전형성을 띤 공간이며, 시장체제와 발전에 대한 국가와 도시 정책의 성과를 상징하는 현대적 공간이다. <달팽이집>(2009)에서는 토지와 주택이 상품화된 이후의 중국 도심에서 단칸방 달팽이집에 사는 자매를 통해 소유 욕망이 투사된 물신화 대상으로서의 ‘집’과 분열하는 도시인의 도덕적 자아를 보여준다. <위장자>(2015)는 화려한 자본주의 도시 상하이를 사회주의 혁명 공간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로 재구성하며 부단히 강화한다. ‘중국판 섹스 앤 더 시티’로 불리는 <환락송>(2016)은 다섯 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계층 간 화합과 화해, 사회 통합적 이미지 구축을 시도한다.
뉴미디어 시대, 문화 상품에 대한 대중의 욕망
더 새롭고 더 환상적인 중국 드라마가
청년문화와 미디어산업의 변화 이끌 수 있을까
미디어의 중심이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으로 전환함에 따라 중국 드라마 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최근 출현한 중국의 뉴미디어 경향과 새로운 구조의 드라마 산업을 분석한다. 1990년대 중반 인터넷 보급을 시작으로 중국의 거대 미디어 자본과 문화산업은 ‘IP(Intellectual Property)산업’이라는 새 산업 모델을 창출했다. 인터넷소설 기반의 콘텐츠 확장 및 변용이 나타났고 이는 고장극, 즉 시공초월극, 궁투극, 현환극, 선협극 등 다양한 장르 드라마의 붐을 일으켰다. 이 책은 이러한 IP산업과 장르 드라마의 특징을 분석하며 기술 변화와 비물질 노동을 통한 인터넷소설 창작, ‘데이터베이스 소비’ 경향을 살펴보았다.
20세기 중후반 크게 유행한 진융(김용)의 무협소설이 고대 사회로부터 내려온 의협, 용기 등의 가치 관념을 강조하며 시대정신과 민족정신을 강조했다면, 21세기의 인터넷소설은 선인과 악인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환상적 요소가 가미된 신무협소설, 현환소설로 변주됐다. 인터넷 하위문화와 온라인게임에 익숙한 세대인 80후, 90후는 고전극의 전범인 <사조영웅전>(1994), <신조협려>(1995), <녹정기>(1998)가 아닌, <보보경심>(2011), <궁쇄심옥>(2011) 등의 ‘시공초월’ 서사에 열광하게 되었다. 수많은 모방과 아류작이 범람하자 ‘시공초월’이라는 역사 왜곡이 금지되었으나, 이번에는 가상의 역사를 내세운 ‘가공극’이 등장해 <미인심계>(2010), <삼생삼세 십리도화>(2017), <천성장가>(2018)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저자는 젊은 세대 중심의 인터넷 현환소설-IP드라마 붐에 주목하며, 환상과 허구라는 순수한 오락의 세계가 ‘중국풍’의 세계 진출 전략 가능성, 상대적으로 검열에서 자유롭다는 조건 때문에 대량 양산되었지만, 이것이 ‘가상의 중화 감각’이라고 보았다. 즉, 대중문화 상품을 향한 폭발적인 수요와 대중의 욕망이 특정 취향 콘텐츠 소비로 포획 혹은 분절되었다는 평가다.
가장 최신 트렌드인 웹드라마에 대한 분석도 눈여겨 볼만하다. 1990년대 후반 상용화 이래, 상업 미디어와 관방의 통제 미디어가 투쟁을 벌이는 장인 인터넷이 그야말로 고삐 풀린 발전과 확장을 거듭하자 중국 정부는 인터넷에 체제 위협 요소가 잠재해 있다고 보아 전면 관리에 나섰다. 저자는 이를 두고 위협 요소와 가능성을 사전 차단하고 안전한 ‘홍색 지대’로 재편하는 관리 통제가 중국 네티즌의 파놉티콘적 자기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정부의 표적이 될 만한 ‘위험한 콘텐츠’ 생산을 자제한다면 비교적 편안하게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유쿠, 투도우, 아이치이 등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이 발달하고 네티즌이 제작하는 2차 창작물과 웹드라마가 전성기를 맞았지만, 지원 위주의 문화 정책에서 통제 강화와 검열 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는 중국 정부의 관리 경향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주요 드라마 소비 주체인 80후, 90후 세대 시청자를 분석한다. 문화를 ‘창조’하던 20세기 청년과 달리, 다양한 모순을 겪으며 단순한 ‘소비’자로 전락한 21세기 청년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80후, 90후 세대로 길러지며 부모 세대의 부와 권력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계층으로 분화했다. 상하이대학교에서 중국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당대 중국 청년 세대의 현 상태와 정서 구조를 분석하면서 자기 환멸과 속물성, 성찰의 부재와 진정성의 소멸, 우울과 자조 및 낭만적 자아 등으로 이를 설명한다. 이는 중국 정치, 경제 구조 전환에 따른 좌절과 불투명한 미래가 가져온 추세이지만, 강화된 소비 자본주의 아래 사회 변혁을 이끌 추동력으로서가 아닌 물질적 욕망을 긍정하고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속물화 현상은 이미 전세계에서 나타난 변화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러나 이전처럼 청년의 주체성이 저항적이지 않더라도 문화 영역 등에서 간헐적으로 실천이 나타난다며 이것이 새로운 역량이 될 수 있도록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